생명의 삶

12월 28일

“철 연장이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전 10:10)

삶이 간단한 ‘이원론적’ 대비나 대조로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관계를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이치가 선과 악, 행복과 불행, 진리와 거짓 식으로 쉽게 양분화 되지 않고, 그 중간쯤에 속한 애매모호함에 갇히곤 합니다. 의를 행하고 선을 추구하는 사람의 삶이 반드시 복되고 번창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의와 선을 추구하는 열심과는 반대로 낙심과 낭패에 빠지는 경우가 잦습니다. 그럴 때마다 누구든 선하고 의로운 것의 한계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들의 가치 자체를 부정하려는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매사에 둘 중 하나 식의 손쉬운 답을 구하기 어려운 경우, 성도의 삶의 참된 지혜는 그 때를 오히려 자신을 새롭게 하는 삶의 기회로 여기는 것입니다. 인류사적으로도 인간이 뭔가 생존의 한계를 경험할 적마다 새로운 발견과 창의적 혁신을 통하여 문명의 발전을 이룩한 경우가 많습니다. 개인의 삶 속에서의 절망과 낙심이 보다 깊고 우월한 차원의 인간성의 성숙과 성장의 계기가 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권력이나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세상적인 지식의 목표와 달리,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바탕으로 하는 인생의 참된 지혜는 언제든지 자기 자신에 대한 단련과 초월, 그리고 정결함을 목표로 삼습니다. 남다른 지혜와 지식을 터득하여 얼마만큼 남이 누리지 못하는 유익과 편의를 얻었는 지 여부보다, 참된 지혜와 지식을 토대로 하여 스스로의 삶의 자유함과 평안함을 누릴 수 있는 지의 여부가 더욱 중요합니다. 타인에게 강요하는 선과 악, 또는 참과 거짓의 이중 구도에 자기 스스로 메임을 당하지 않아야만 정말로 선한 것과 참된 것에 대하여 논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하는 데에 유익하지 않은 지식이나 지혜는 정말로 무가치한 생각의 유희에 불과합니다. ‘경건함’의 본질에 관한 성경의 교훈 그대로 입니다 –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약1:26-27). 순전히 자기 임의로 설정해 놓은 이원론적 가치관의 대비 구조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의와 유익을 우선시 하다보면 매사에 불행의 원인이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나, 또는 온 세상의 불의함과 악함 때문이라는 식의 푸념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정작 반성하고 개혁해야 할 대상이 자기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까지 자기 아닌 타인의 잘못으로 돌리곤 합니다. 그러다가 그만 영영 자기반성의 기회를 놓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철 연장이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는 말씀의 교훈은 흔히 수고로운 노역으로 대비되는 인생 자체의 문제점보다, 삶의 주체로서 우리들 자신의 책임, 즉 매사에 새로운 자기 이해와 가치판단의 온전함을 촉구하는 데에 있습니다. 날이 무디어진 연장으로 일하는 것만큼의 괴로움과 비효율성을 강요하는 원인이 변화와 개선을 거부하는 자기 자신의 이기적 본성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서, 연장의 날을 세우듯이 스스로 내면의 정결함과 거룩함을 회복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지혜는 결국 매사에 자기 자신에 대한 변화와 개선의 필요성을 깨닫는 데서 기인하며, 따라서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만큼 온갖 면에서의 삶의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는 법입니다. 뭐니뭐니 해도 성도의 삶의 가장 위력적인 무기는 자기 자신입니다.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온갖 문제점들을 대처함에 있어서도, 자기 스스로를 가장 괴롭게 하거나, 그 반대로 자기 자신을 가장 편하고 강하게 만드는 힘의 원천도 언제든지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잘 다듬어진 연장은 결코 과업의 특성을 탓하지 않습니다. 힘든 일을 맡을수록 연장의 효율성과 참된 가치를 입증해 보일 뿐입니다. 인생의 궁극적 주관자인 주님의 오른손에 붙들린 익숙한 도구와 같은 삶을 사십시오. 그가 보시기에 의롭고 순전하기만 하면 우리 중 누구나 그가 친히 계획하고 준비한 일을 위해 귀히 쓰임받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의 새로움이 문제 해결의 절반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잠 16:7)는 말씀 그대로 입니다. 인생의 참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이 되시는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스스로 삶의 길을 마련하는 진정한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샬롬!

12월 21일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전 8:3)

현재의 삶 속에서 정의의 실현이 불가능할 때, 고대인들은 종종 왕의 행동을 통제하고 심지어 그들의 심판을 예고하는 데 있어서 뭔가 전조가 될만한 것을 파악할 수 있는 마술사들의 지식과 환상에 의존하여 미래를 바라보기도 하였습니다. 신들에 의해 깨달은 사람 만이 그러한 질서를 들여다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러한 환상가에 대한 염원을 구체화하기도 하였습니다 –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전 8:1). 이와는 대조적으로 전도서 기자는 동시에 인간의 모든 현실적 판단 능력 자체의 불확실성을 강조하는 데 몰두합니다 –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전 7:16-17). 미래를 보는 눈에 대한 염원 역시 사실은 그 한계를 강조하는 언급에 불과합니다. 전도서 기자에게는 오히려 지금 당장의 위험을 최소화하는 데에 더욱 즉각적인 관심사가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불확실한 전조에 근거하여 권위를 가진 자들에게 저항하는 것은 헛된 일임을 강조합니다 –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전 8:4). 사람마다 지금 살고 있는 삶의 상황의 무법천지의 비참한 질서에 속한 것과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지위 자체에 내포된 기능적 신성함은 그의 명령의 변덕스러움에 상관없이 충성을 요구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보다 구체적으로 통치자가 신민들에게 휘두르는 무한한 권력 앞에서 미래에 대한 추측에 너무 사로잡혀 현재 정치적 위험에 처하지 말 것을 촉구합니다. 그러한 ‘실용주의’식 태도에 교리나 믿음의 뒷받침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서 기자의 주장은 오히려 미래의 심판의 현실과 죽음에 의한 ‘평준화’ 효과를 재확인시켜 줍니다 –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전 8:8). 독재자들의 삶까지 포함하여 모든 인간의 삶 자체가 회피나 유예가 없는 전투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에 의한 미래의 심판이 있을 것이며, 이 땅의 가장 강력한 독재자들의 행동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저울질 될 것입니다. 인간성은 물론 인간의 삶 자체가 모호함으로 가려져 있어서, 종말론적 심판의 예고가 추측이나 선동, 심지어 말장난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전도서 기자의 ‘실용적인’ 지혜는 그것이 풍부한 인생 경험의 결과임을 강조합니다. 정치 권력을 포함하여 우리의 삶에 수반되는 모든 권세와 권력의 주체에 의한 상처를 경험할 때 참된 성도는 당장에 벌어지는 일만을 고려하면서 자신과 남에게 상처를 가중하는 식의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또한 무조건 미래를 미화하면서 현재의 자기 자신을 모든 사람들의 발에 밟혀도 좋은 ‘도어 매트’ (door mat)처럼 여기지도 않습니다. 새롭고 보다 더 정의로운 질서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상태에서 현재의 가혹한 정치의 실체를 이해하고자 할 뿐입니다.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는 말씀은 불의한 권력의 실체를 대하는 두가지의 상반된 태도, 즉 두려움과 지나친 용기에 대한 금언입니다. 권력자를 의식하여 스스로 두려움에 사로잡힐 필요도 없으며, 권력의 폭거에 대해 마찬가지의 폭력을 대안으로 여길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법의 태두리 안에서 권력자의 감시를 벗어나 또 다른 시기와 판단을 고려하는 것이 낫습니다 –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전 8:5). 그것 만이 미래의 심판의 현실성과 죽음에 의한 모든 인간의 삶의 ‘평준화’를 믿음의 교리로 삼는 성도의 특권이며 또한 한계입니다. 무엇이든 이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매함과 악이며, 이를 인정하고 따르는 것만이 지혜이며 선입니다. 불의하고 불법한 왕이라도 그 왕의 지위만큼은 하나님께서 정한 질서에 속한 것임을 믿어야만, 그 왕의 불의함에 대한 하나님 편의 심판의 유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불법한 왕의 권세가 남용되는 삶의 상황 속에서 마찬가지로 불법과 폭력을 일삼으면서 불나방처럼 스러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용서와 대속의 취지만을 고려하면서 일방적인 희생의 삶을 살라는 것도 아닙니다. 무법한 자를 대함에 있어서 불법의 올무에 메이지만 않으면, 보다 나은 삶의 기회와 판단은 이 땅의 참 주권자인 하나님의 몫에 속한 것입니다. 그 신적인 기원을 간직한 삶의 기회와 때를 염원하며 구할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항상 그의 지혜로 무장하며, 그가 허락하시는 삶의 기회와 때를 붙잡아야 합니다. 성도의 참 왕은 언제든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샬롬!

12월 14일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전 3:22)

사람마다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의 근거를 자기 자신 속에 확고히 할 수 있을 때라아먄 매사에 참된 기쁨과 보람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위가 누구나 인정할만한 객관적 기준치에 얼마나 맞느냐 보다, 스스로가 뭔가로 인한 진정한 내면의 기쁨과 만족이 있는 지의 여부가 훨씬 더 크고 중요한 삶의 동기를 부여하곤 합니다. 물론 사람의 성향 자체가 다른 사람의 판단을 지나치게 의식하거나, 타인의 견해를 자신의 생각보다 더 중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삶의 결국은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만족스러운 판단의 여지를 지녔는가에 달려있기 마련입니다. 사람마다 최종적으로 자기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은 항상 자기 속에 있는 법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한, 소위 삶의 새로운 반전의 기회는 늘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자기 스스로 의의 근거를 부인하고나 허물어 버리고 나면, 여간해서 삶의 초석을 다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욥이 당장에 펼쳐진 그의 삶의 불행의 원인을 그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친구들의 권고에 대해, 오히려 “나는 결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 (욥 27:5-6)고 대꾸합니다. 그 말은 욥 자신이 절대적으로 의로운 삶을 살았노라는 고집과 아집이라기보다, 그의 삶의 근거 또는 의의 근거를 마련해야 할 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 자기 스스로를 돕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이 임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예고와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영원한 의의 근거가 되시는 분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들로 인해 우리들 각자의 의로움의 토대를 쌓기가 무척이나 힘들고 어려운 세상살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를 대속의 주님으로 믿는 믿음 안에서 영원한 의, 즉 ‘칭의’의 선물을 제공합니다. 독생자를 희생 제물로 내어주신 영원한 사랑의 언약 안에서 삶의 온갖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가 하나님 자신의 무한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의 대상이 될만한 자임을 믿게 하며, 그것의 보장을 이미 십자가의 언약을 통해 제공해 놓았습니다. 그 일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조건이 바로 매사에 하나님 편의 최종적 판단을 기대하고 신뢰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라는 말씀의 의도는 그럴 수 없게 만드는 삶 자체의 요인들이 너무 많다는 데에 있습니다. 주로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 주고받는 지극히 상대적이며 주관적인 판단 또는 비방이 바로 그 실례입니다. 사람의 기질 자체가 타인의 평가나 판단을 지나치게 의식하거나 의존하게 되면, 그것처럼 삶의 질적인 면의 비생산성과 비효율성을 자극하는 요인이 없습니다. 어차피 유한한 인생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판단을 앞두고 살아가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선 당장 사람들의 눈에 띄는 대로의 판단만을 좇다가 그만 자기 자신과 자신이 하는 일의 중요성과 보람에 대해서는 영영 무뢰한이 되기도 합니다. 삶의 외형적인 조건에 있어서만 아니라, 내면적으로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마다 인생의 최종적인 판단의 근거를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외심에 두고 살아갈 때에만, 자기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또는 자기가 하는 일 그대로의 만족과 감사를 ‘그의 몫,’ 즉 정해진 ‘분복’처럼 누릴 수 있습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전 3:1)라는 말로 시작하는 인생 자체의 유한성에 대한 지적은 온갖 이기적인 마음의 동기에서 비롯된 인간의 판단에 대한 두려움의 여지에 대해서까지 적용됩니다.  사람마다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불순하고 거만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과거의 잘못을 캐내고, 그 토대 위에서 현재와 미래의 가능성을 저울질하는 식의 비판의 당사자가 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남을 비방하였던 것이 그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비난의 화살처럼 되돌아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성도는 그런 식의 비방을 전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참된 뜻이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보장되었은즉,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 대한 일체의 비방과 비난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에서 자기 모습 그대로의 감사를 누리며, 남을 위한 작은 선행의 실천에 힘쓸 뿐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과 자기가 하는 일을 즐거워하다 보면, 하나님 외의 다른 대상과 조건들에 대한 판단의 필요성조차 없어지고 맙니다. 판단과 비방의 여지들로부터 자유로운 참된 자유인의 삶을 사십시오. 자기 자신을 즐거워 하는 사람이라야만 다른 사람들을 역시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샬롬!

12월 7일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 40:16)

시 40편은 전반부의 찬송과 감사의 고백 (1-10절)에 이어, 후반부 (11-17절)의 탄식과 간구가 대조를 이루는 시입니다. 마치 별개의 형태의 두 개의 시를 한데 묶어 놓은 것 같은데, 그처럼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형태의 시의 구조가 오히려 우리 속의 믿음의 동기와 이유가 지닌 ‘복잡성,’ 또는 ‘복합성’을 사실적으로 잘 반영합니다. 삶 자체가 어느 순간에는 그야말로 감사와 찬양의 이유와 조건으로 일관하는 것 같다가, 금시 사소한 몇 가지 이유들로 인하여 이내 절망스런 탄식에 빠져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침에는 주님께서 주신 확신과 감사로 인해 “내가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9절)라고 고백하였다가, 저녁이면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 (12절)라는 식의 탄식을 주님께 드릴 수 밖에 없는 변화무쌍함이 인간의 삶의 단면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믿음은 삶의 어느 한 순간 이룩한 대단하고 완전 무결한 성취와 업적을 이룩하는 데에 있지 않고, 온갖 실패와 성공을 거듭해가는 복잡한 삶의 과정을 지나는 동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믿음의 의지와 진실함을 유지하는 데 달려있습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2절)라는 말씀처럼, 우리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현재적’ 구원의 능력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고백이 넘쳐날 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를 향하여 하하 하하 하며 조소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놀라게 하소서” (15절)라는 간구처럼 치욕스러운 일들로 인한 피해의식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도 많습니다. 시 40편 내에서 그 두가지의 상반된 인생의 체험이 모두 하나님을 향한 일관된 찬송과 간구로 융화된 것처럼, 우리의 믿음생활 역시 인생 자체의 온갖 다양하고 복잡한 면들을 거치면서 원래의 순수함과 간절함이 변질되거나 맥이 끊기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온전케 하는 능력으로서 그의 구원에 대한 갈망이 더욱 새로워지고 충만해져야 합니다.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라는 고백은 결코 시편 기자의 완전무결한 심령상태를 반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백은 자신의 삶을 둘러싼 수많은 재앙 앞에서 스스로의 죄를 한탄하면서, 자신의 머리털보다도 더 많은 죄로 인한 두려움과 낙심의 상황 속에서의 고백입니다. 이는 재난과도 같고 재앙과도 같은 삶의 물리적인 위협과 죄로 인한 넘어짐이 초래하는 심리적 위협에 동시에 노출된 시인의 정직한 ‘자기 고백’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백의 위대성은 위협에 대한 두려움보다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의 능력의 위대함을 의지하고 기리는 데에 있습니다. 시 40편의 전반부가 감사 찬양의 내용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후반부의 탄식과 괴로움에 대한 고백은 ‘종말론적’ 승리와 기쁨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한 ‘의도성’을 내포합니다. 즉 인생의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일관되게 주를 찾고 또 찾는 자는 반드시 주 안에서 즐거워 하고 기뻐하게 되리라는 것이며, 주의 구원하심을 바라고, 그를 정말로 자기 삶의 구원자로 모시는 자는 반드시 위대한 주님의 구원의 능력을 찬양케 되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을 ‘찾는’ 일과 그의 구원을 ‘사랑’하는 일이 모두 인간의 원초적 갈망에 속한 행동이며, 또한 의도적인 행위입니다. 의식하거나 조심하지 않으면 주님을 찾는 일과 그의 구원을 사랑하고 갈망하는 일 자체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마음의 순수함의 표현으로서 간절함과 사랑의 속성을 없이하거나, 변형시키는 여지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믿음생활의 참된 덕과 용기가 결코 일회적 성취가 아니라, 전 생애적 일관성과 단순함, 그리고 충만함에 있다고 믿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성도로서 우리들 각자의 ‘소원과 바램’의 영역에서의 거듭남과 온전함이 있어야 합니다. 매사에 그분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식의 단정과 결심을 통해서만 신앙인으로서 순수함과 믿음의 원초적 특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찾되 더욱 간절히, 그리고 그의 구원을 사랑하되 정말로 크고 위대한 분의 호의를 힘입게 되기를 바라는 진실함과 정직함으로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마음을 다해 그를 찾는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그를 향한 우리의 믿음의 크기만큼 크고 위대한 능력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샬롬!

11월 30일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 36:9)

성도의 삶의 특징을 가리켜 죄의 ‘요동함’에 처해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좇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죄를 이기고 악을 선으로 갚는 식의 삶은 죄악을 끼치는 대상만을 고려하는 식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죄의 미혹과 악의 성립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하나님의 초월성, 즉 초월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성품을 기억하고 그 능력을 힘입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윗이 자신의 삶 속에서 악을 조장하는 여러 사람들과 여러가지 원인들을 대처하면서 오히려 참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음을 고백하는 이유는 정말로 그의 삶의 원천이 하나님 자신이며, 그것이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행복을 증명하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역사 상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삶 속에서 생명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자비, 그리고 의의 능력을 경험하며 누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긴 삶 자체를 생명의 샘으로 여겼습니다. 이는 단지 육체적 생명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영적인 생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다윗의 경우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영적 생명은 죄 가운데 죽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는 참 생명의 기회를 통해 살아납니다. 다윗이 그를 괴롭히는 수많은 악행자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생명의 원천되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살아나고, 그로 말미암아 참 생명, 즉 영생의 은혜를 얻은 것처럼, 성도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힘입어 삶을 살아 갑니다. 그것은 마치 주의 빛 안에서 우리 각자가 빛을 발견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빛 그 자체, 또는 빛들의 아버지이시며, 모든 면에서 빛의 성품을 반영하는 분입니다. 그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얼굴과 그의 사랑의 빛 안에서 자신의 삶의 모든 처지 가운데서 참 빛을 발견하고 위안을 누립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의의 태양처럼 온 세상을 비추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그의 은총을 누리며 그리스도 자신의 영광과 탁월함을 봅니다. 성도는 지혜와 계시의 영인 성령의 빛 안에서 자신들을 위협하는 온갖 죄의 미혹과 악의 세력을 초월하고, 그들의 의가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와 희생 안에 있는 참된 의의 소중함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의의 빛 안에서 복음의 진리의 단순함과 탁월함을 입증해 보이는 ‘거룩한 삶’의 의무감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빛 안에서 보이지 않는 다른 세상, 즉 하늘나라 영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성도가 그러한 믿음의 빛으로 말미암은 계시와 환상에 접하게 될 때 자신의 삶을 포함하여 온 세상이 더 이상 어둡지 않고 환한 빛 가운데 인도함을 받는 식의 삶을 살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자신을 대면하게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죄의 미혹과 악의 세력으로 인한 몸과 마음의 괴로움을 겪는다 해도, 성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원천과 빛이 주어져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삶의 참된 기쁨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생명은 샘과 같이 하나님 안에 있으며, 그에게로부터 우리에게로 나옵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우리 각자의 존재의 기반을 갖습니다. 은혜의 하나님으로서, 그는 누구든지 와서 그 생명과 빛을 자유롭게 취하도록 초대합니다. 따라서, 믿음 안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따라 참으로 영화롭게 된 성도들의 참 행복은 다만 그분의 비전과 결심, 그리고 그분의 사랑과의 즉각적인 교통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처럼, 모든 시대 모든 성도가 죄악된 현실을 대하는 방법에 있어서 죄된 대상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의 영원 무궁함을 기억하고 더욱 잘 알기위해 힘쓰고 애쓰는 이유입니다. 거룩한 성도는 죄악을 이기는 방식까지도 거룩해지기 마련입니다. 온갖 죄악된 여지들로 인해 삶이 척박하고 어려울수록 참 생명과 빛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에 의지하여, 참으로 그가 이기게 하는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참된 생명력과 빛의 능력이 모든 것을 관통하듯,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 안에서 다른 모든 피조물의 한계는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이며, 또한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의 능력은 항상 영원무궁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직 믿음만이 성도의 삶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생명과 빛의 능력을 좇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사람들을 위해 세상에 오신 참 빛, 생명의 빛입니다.  샬롬!

11월 23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창 50:19)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의 장례 후 혹여라도 요셉의 마음이 변하여 지난 날 그들이 범한 악행에 대해 다시 보응하지 않을까 염려하였습니다. 그 일을 두려워 한 나머지, 있지도 않은 아버지의 유언을 들먹이며, 형제 간의 화목을 강청하였고, 그들 스스로 동생 요셉의 종이 되기를 자청하였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악행에 대한 용서를 청하는 형들의 모습을 보면서 요셉이 민망함 때문에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습니다. 요셉은 절박한 심정으로 용서를 청하는 지난 날 형들의 죄악을 용서하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이룩하고자 하는 일을 스스로 거슬려 행하는 일이 결단코 없을 것이라는 뜻에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라고 말합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표현, 즉 ‘창세기적 신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그렇게 말한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그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할 자, 즉 그의 뜻과 계획에 ‘맞서’ 행할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들의 악을 악으로 갚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형들을 미워할 수 없는 것은 요셉 자신의 하나님께 대한 의무감의 표현입니다.  요셉의 용서는 그의 인간적 너그러움이나 인내심이 어떠한 지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의 삶을 지배하는 방식, 즉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 우수함과 우월성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은 우리 자신의 그것보다 높고 광대합니다.  지음받은 피조물의 견해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그것은 그를 창조하신 자의 ‘보는 눈’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친히 피조물을 아끼고 보존하고자 하는 창조주의 사랑의 속성에서 기인하는 하나님의 생각과 견해를 능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자신의 생각보다 더 높고 위대한 차원의 유익을 가져오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대한 피조물로서 자기 생각의 포기이며 부인입니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대신하는 ‘대체물’ 이 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입니다. 요셉 자신이 결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우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를 우리들 자신보다 더욱 온전히 그리고 많이 사랑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삶은 다만 하나님에 의해서만 대신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전까지 우리는 결코 안심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요셉은 자기 몸에서 난 자식들을 포함하여 그의 형제들의 자식을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는 자리에서 그들 모두의 ‘후견인’으로 ‘하나님’을 지목하였습니다 – “나는 죽으나 하나님의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24절). 원인을 알 수 없는 불행한 현실상황들을 대하면서 사람마다 매사를 인간의 책임 영역에 속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뭔가 난해한 인생의 문제점들 앞에서 누군가 에 대한 개인적 원망과 책임소재를 규명하는 식으로 섣부른 해답을 구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의 삶의 불행에 대하여 다른 누군가를 억지로 희생양을 삼는 식으로 보응의 방법을 찾으려고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삶의 문제점들은 궁극적으로 현실 세계에서 일어난 일의 원인을 현실 세계의 일원인 인간이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흔히 ‘고통의 신비’라고 부르는 것처럼, 조건 반사적인 인간의 감정이나 논리체계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최고의 지혜와 선은 침묵과 공감이 전부일 수 있습니다.  욥처럼,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를 견뎌야 할 때, 또는 하나님께서 친히 현실 속에서 침묵과 부재와 무능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 같을 때, 오히려 침묵 속에서 기다리면서 그가 반드시 ‘대신’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의 책임소재를 잘 가리거나, 사건의 원인 규명을 잘 하는 것만이 문제 해결의 비결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 모두를 온전케 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를 인정하는 식으로 매사에 즉 그가 대신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회복이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해결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상대성과 주관성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삶의 성공과 성취에는 반드시 그만큼의 어둠과 포기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거두시고 이룩한 일에는 일체의 그림자도 없습니다. 그가 친히 모두를 복되고 온전케 하기 때문입니다. 친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 속에서 대신하는 일이 많은 참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믿음 안에서 결코 하나님의 자리를 가로채지 않는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말로 우리의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샬롬!

11월 16일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서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의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 (창 47:24)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한 공로로 인하여 애굽의 총리가 되어 칠년 간의 풍년 동안 양식을 예비하고 곧 이어 찾아온 또 다른 칠년 동안 굶주린 백성들에게 양식을 나눠줍니다. 물론 무상 배급을 한 것은 아니며, 돈을 받거나 가축 떼를 헌납 받는 방식으로 각각 일년 치 양식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바칠만한 물건이나 소유물이 없게 되자 백성들은 자신들의 몸과 토지를 애굽 왕 바로에게 양도하는 조건으로 양식을 구하였습니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자신의 몸과 토지를 내어놓는 백성들을 위해 요셉은 단지 일회성 구제방식으로 일년 치 양식을 제공하는 대신 곡식 종자를 나누어 주고 그것을 땅에 뿌려 수확을 얻도록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결실의 오 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남은 것으로 각각 가족 모두의 양식을 삼도록 했습니다. 한 마디로 자급자족에 필요한 삶의 대책을 제공한 것입니다. 백성의 몸과 토지를 모두 왕궁에서 몰수한 상태에서 곡식 종자를 나눠주고 일종의 ‘청지기’의 삶을 살도록 한 것이 무슨 배려인가 라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사회의 왕권에 의한 절대적인 지배 현상을 고려할 때, 어차피 왕궁의 소유인 토지에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서 이듬 해에 수확의 오 분의 일만을 요구하였다는 것은 도리어 파격적인 호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흉년의 악조건 하에서 백성들로 하여금 씨를 뿌리고 가꾸면서 수확을 기대하는 진취적이며 창조적인 생산성의 주체로서 삶을 살도록 한 것이 요셉의 가장 큰 공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애굽 백성 대부분이 요셉의 다스림을 선의로 이해하고 받아들였습니다 –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25절). 요셉은 백성들 각자의 외부적 삶의 조건의 황폐화에 상관없이 내면의 풍성함을 기해야 하는 필요성과 당위성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당장에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한 줌의 양식을 나눠주고는 쉽지만, 평생에 걸친 삶의 대응방법으로서 건전하고 창의적인 인생관을 심어주는 것은 여간 어렵습니다. 요셉이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 곡식의 ‘씨앗’에 내포된 무궁한 생명력의 원천과 같은 것이 건강하고 복된 삶의 철학 또는 인생관의 유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의 면모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건강하고 복된 인생관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의 인생관이 그와 같아야 합니다. 요셉은 정말로 죽음의 위협을 경험하는 상황 속에서도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제로 하여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그것에 의존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요셉 스스로 하나님의 참 생명의 씨앗을 자기 속에 간직하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단일 인물에 관한 성경의 묘사로는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창 37-50장의 ‘요셉 이야기’ (the Joseph Novella)를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의 한 형태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인생의 근본 지혜를 일깨워주는 것이 요셉의 행동이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생존 자체의 위협에 처하는 어려움의 한 복판에서도 여전히 인생의 근본 지혜가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집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경우 인생의 근본적 유익이 무엇이며, 그것을 얻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무지와 소홀함 때문에 삶의 현실적 어려움이 가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뭄의 때에 곡식의 씨를 가져다가 ‘토지의 종자’ (the seed of the field)로 삼으라는 요셉의 충고는 애굽 백성들이 듣기에 얼른 알아듣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나일강 삼각주에 위치한 천혜의 곡창지대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던 자들이 거듭된 흉년으로 인해 척박할 대로 척박해진 토지에 씨를 뿌리면서 이듬 해의 수확을 기대한다는 것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말대로 이행한 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당장에 손에 쥘 수 있는 곡식의 양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것의 종자, 즉 씨앗의 가능성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참 생명의 가치는 결코 당장에 얻을 수 있는 얼마 간의 이익이나 잉여물에 있지 않습니다. 영원히 기댈 수 있고, 참된 소망과 기대감의 이유가 되는 것에 있기 마련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5:5-6)는 말씀의 주인공이 되는 삶을 사십시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인생의 근본이 되는 참 생명의 씨앗을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설혹 온 집안이 불에 타버리는 재해를 겪는다 해도, 지혜로운 농부처럼 ‘씨앗 주머니’를 확보하기만 하면, 이듬 해에 가족 모두의 생계와 재기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씨앗을 통해 인간에게 참 생명의 기회를 주신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선한 본성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요셉처럼 생명의 씨앗, 즉 토지의 종자가 될만한 것을 나누고 꾸어주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 (눅 12:42)는 다만 자기 속에 참 생명의 씨앗을 간직한 사람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참 생명이며 그 씨앗입니다 –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 5:12). 샬롬!

11월 9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창 45:7)

요셉이 기어이 형제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면서, 지난 날에 그들의 끼친 해악, 즉 자신을 이방 땅 애굽에 종으로 팔아넘긴 인신매매 죄를 용서하면서 대신 고한 말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과 형제들 모두를 위해 ‘큰 구원’의 계획을 준비하고 실행에 옮기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유익을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 또는 구조사역의 범주 또는 실행방법에 있어서의 크기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시, 공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미처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신비롭고 기묘한 방식의 구원의 행동을 가리킵니다 –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 139:14). 요셉은 비록 이복형제이긴 하지만 피를 나눈 친 형들에게서 살해의 위협을 받고 종으로 팔려가는 억울함과 비참함을 겪은 다음, 자신의 주군에게 신의와 충성을 다한 것과 달리 주군의 아내에 의해 성범죄자라는 억울한 누명과 함께 수 년간의 옥살이를 해야했습니다. 그처럼 불행하기 이를 데 없는 자신의 삶의 여정이 하나님께서 자신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모두를 온 세상에 불어닥친 흉년의 위기로부터 건져내기 위한 하나님 편의 큰 구원계획을 완성하기 위한 수단이 될 줄을 미처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섭리적인 구원계획의 진행과정 상 요셉의 고초와 재난이 꼭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셉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큰 구원’을 경험하는 길이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성취와 관련하여,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처음부터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를 ‘획득’하고 ‘쟁취’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반면에, 요셉은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이 잘 이루어지도록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과 마음의 동기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라는 요셉의 고백에는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대한 복종과 자기 포기의 결심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의 백성 된 우리 각자의 삶의 궁극적 유익이 무엇인지를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 또는 그의 ‘전능하심’에 대한 인정을 의미합니다.  우리들 각자의 인생경험이 아무리 풍부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미리 아심’의 능력과 범위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큰 구원은 그처럼 초월적인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형들에 대한 복수심보다 하나님께서 행시고자 하는 ‘큰 구원’에 대한 인식이 앞섰다는 것은 요셉 스스로 그 일의 협력자요 주체자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요셉자신이 형들로 인해 초래된 자신의 삶의 행복과 불행의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모두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차질없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며, 그것을 위해 자신의 이기적인인 관심과 욕구를 저버렸음을 의미합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큰 구원은 매사에 하나님에 의한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서 자신들의 목숨을 좌우할 권한을 가진 동생 요셉을 대하는 그의 형들이나, 또는 처량한 몰골로 자신에게서 은혜를 구하는 형들을 대하는 요셉이나 모두 공통적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자신들의 불우한 과거의 기억으로부터의 단절과, 또한  앞으로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의 유익을 위해 일하실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참 모습을 노출시키는 요셉 앞에서 한 마디의 대꾸도 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떠는 형들을 안심시키며 ‘근심치 말고 한탄하지도 말라’ (4절)고 당부하는 요셉의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큰 구원’을 기대하는 자로서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기본적으로 우리를 ‘온전케’하는 것이어서 누구든지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 스스로가 붙잡힌 상태에서는 구원의 기쁨과 유익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구원의 산물로서 주어지는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화해와 일치, 그리고 용서의 경험이 잘못된 과거의 기억에 의해 붙잡힌 상태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에 의해 마련된 새로운 현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모든 선입견에서 비롯된 판단근거를 초월하며, ‘과거의 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나 자신, 그리고 우리 모두에 대한 이해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식의 놀라운 변화를 수반하는 까닭에, 요셉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큰 구원’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습니다.  요셉 개인의 인생 여정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의 ‘크기’가 그러할진대, 하물며 그의 독생자를 대속물로 내어 주면서 이룩한 십자가의 구원은 과연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처럼 크고 광대한 삶의 질적 변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하나님의 ‘큰 구원’을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단지 개인적인 차원의 내면적인 감동과 감격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관계에 있어서의 참된 변화를 능히 일구어 낼 수 있는 능력과 힘의 원천으로 경험되는 ‘큰 구원’을 맛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늘 자신의 삶 속에서 보다 더 큰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도 또한 ‘큰 구원’의 은혜를 더할 것입니다. 샬롬!

11월 2일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창 42:20)

요셉은 13년만에 그의 형들을 다시 만난 자리에서 지난 날 그들이 자신에게 저지른 죄, 즉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20냥을 받고 그를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한 인신매매 죄에 대한 즉각적인 보응 대신에 그들로 하여금 ‘유사체험’을 갖도록 함으로써 지난 날의 과오를 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흉년에 먹을 양식을 구하기 위해 가나안에서 애굽 땅까지 먼 길을 찾아온 열 명의 형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자청해서 볼모로 잡혀있고, 남은 형제들은 다시 돌아가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오면, 그들이 정탐꾼이 아니라는 하는 말의 진정성을 믿어줄 것이라고 약조합니다. 이는 두말할 나위 없이 요셉에 대한 시기와 돈욕심에 눈이 멀어 자신을 죽이다 못해 종으로 팔았던 형들로 하여금 그 일이 얼마나 요셉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었는지 대리 체험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셉이 어린 시절에 아버지 야곱의 그늘 하에서 형들과 함께 지내던 때에 형들이 그를 시기하였던 주된 이유가 베냐민과 함께 어린 동생의 처지 임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며, 그 꿈의 실현을 염두에 두었던 아버지 야곱의 요셉에 대한 편애 때문이었습니다. 야곱 자신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한 꿈, 즉 장자의 복을 차지하기 위한 평생의 꿈을 좇았던 터인지라, 그 일이 무리가 되는 줄 알면서도 요셉이 꾼 꿈의 내용처럼, 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리라는 것을 마음에 품고 살았습니다 –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창 37:11). 어차피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이 땅 위의 구원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보편타당한 윤리와 관습을 초월한 사례가 흔하다는 사실을 알고, 다만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무슨 일을 행하시는 지 두고 보기로 한 것입니다. 어리다는 이유로 흔히 세상에서 통용되는 것과 같은 무시와 차별 대신에, 순전히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한 일의 실현을 위해서 불편한 ‘진실’을 허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제외한 야곱의 다른 열 아들 모두에게는 그 일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동생 요셉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구원역사에 대해서는 물론,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자신들을 대하는 아버지 야곱에 대한 반역심리까지 더해진 나머지 야곱을 살해하고자 하였으며, 결국 살인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온갖 우여곡절을 경험한 끝에 하나님의 섭리적 돌보심에 힘입어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자기 눈 앞에 나타난 형들에게 ‘막내 아우’를 데리고 올 것을 명한 이유는 오래 전 다분히 ‘어린 아우’에 불과하였던 자신의 목숨을 임의로 해할 수 있다고 여겼던 그의 형들의 ‘작은 자’에 대한 멸시와 무시, 그리고 폭력적인 차별대우의 잘못을 떠올리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단순히 외관상 작고 보잘것 없다고 해서 사람이 함부로 다른 이의 목숨은 물론 삶 자체의 가치를 소홀히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무리한 죄를 범하는 일입니다. ‘여호와께서 더하신다’라는 뜻의 요셉의 이름처럼, 사람은 누구나 그의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더해지는 삶의 여지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생명 그 자체가 창조주의 선물인 이상, 모든 생명체의 근본적 존엄성은 반드시 하나님의 ‘샘법’을 따라야만 합니다. 사람의 눈에 사소하게만 여겨지는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매우 특별하고 존귀한 지위를 갖는 예가 많으며, 그 반대로, 사람의 눈에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일들도 많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마 6:22-23)라는 주님의 말씀이 이에 해당합니다. 요셉의 삶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은 하나님 편의 정한 가치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성도의 삶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전통과 관습을 좇는 식의 세계관에 편입될 수 없는 삶의 가치들에 대한 하나님 편의 판단기준을 끝까지 소중히 여기며, 온 마음과 뜻을 다해 청종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요셉의 형들이 그에게 범한 악행이 인간적 시기의 측면에서는 ‘그럴만한’ 이유를 지닐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 25:40)는 주님의 말씀을 비추어 볼 때, 요셉의 형들은 결국 아우를 해함으로써 하나님께 위해를 가하는 엄청난 죄악을 범한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스스로 역시 ‘작은 자’임을 자인하는 길 뿐입니다. 다른 누군가에 대한 차별 대우는 결국 자기 스스로를 ‘차별화’ 한 탓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그 사람보다는 ‘크다’는 인식 때문에 결국 그 사람을 자기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기 마련입니다. 요셉을 살해하고 위해를 가할 계획을 세운 형들 (르우벤, 유다)이 모두 야곱의 둘째 부인인 레아의 소생이라는 점에서, 첫째 부인이며 레아의 아우인 라헬과 그의 소생인 요셉에 대한 인간적 혐오의 여지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 야곱의 ‘장자’ 임을 내세우는 마음이 그만 동생 요셉의 삶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적 진행과정 자체에 대한 거역심리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스스로 작고 겸손한 자라야만 작고 적은 것의 ‘미학,’ 즉 아름다움의 가치를 외형이 아니라 내면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또한 자기 자신의 내면의 가치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를 대하든지, 그 사람의 삶의 가치를 하나님께서 ‘더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요셉처럼 존귀한 자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의 형들 모두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을 알아본 후에야 비로소 요셉으로 인하여 흉년에 살아남고 애굽에서 생존의 길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가치를 더해주시는 인간관계의 유익을 누리는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샬롬!

10월 26일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창 40:8)

고대 이집트는 나일강의 삼각주를 기반으로 인류의 4대 문명중 하나인 나일강 문명을 태동한 나라입니다. 이집트의 왕인 바로는 자신이 태양 신 (Ra)의 아들이라 칭할 정도로 불멸의 생명력을 앞세우며 스스로 신의 대리자 임을 자인하면서 애굽 전역과 애굽의 식민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면서 또한 태양신에 버금가는 죽음의 신 (Osiris)의 위력을 항상 두려워하며 지내던 사람들이 바로 고대 이집트인었습니다.  태양이 의미하는 절대권력의 투사체이면서도, 그만큼 죽음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던 고대 이집트, 즉 애굽 왕 바로의 ‘양면성’과 같은 것이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모든 인간의 실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라는 바로의 술관원장과 떡관원장들의 탄식은 생명의 주체이면서도 여전히 사망의 지배를 벗어날 길이 없는 모든 인간의 한계상황을 반영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꿈은 있으나, 그 꿈을 해석할 능력과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것처럼, 인간은 전능자 하나님의 완전한 호의와 선의, 즉 은혜를 힘입지 않고는 항상 ‘실체’가 없는 삶의 환영을 좇는 무의미함과 불안함의 노예일 수 밖에 없습니다. 형제들의 미움과 시기를 받아 애굽의 노예로 팔려온 17세의 꿈 많던 소년 요셉이 애굽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한 일로 인해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기 전 먼저 시위대장인 보디발의집에 있는 사설감옥에서 만나게 된 두 사람이 다름아닌 바로의 음식을 맡은 자들, 즉 술관원장과 떡 관원 장이었습니다. 이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가 벌인 자자극의 희생양이 되어 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 순전히 하나님 편의 더 큰 그림, 즉 요셉을 애굽의 총리대신의 지위에까지 오르도록 하기위한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다분히 특별한 꿈을 꾸며 해석하는 ‘꿈장이’ 요셉의 면모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꿈을 매개로 하는 요셉의 동정과 연민의 마음에 내포된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피조물 자체의 인식능력의 한계상, 현실에서는 물론 꿈이라는 무의식의 세계에서조차 늘 불안하고 비관적인 생각을 강요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바로의 두 신하가 자신들이 꾼 꿈을 해석할 자가 없다고 탄식한 것은 단지 꿈의 내용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의 무의식적 불안과 긴장의 여지를 떨치지 못한 탓이었습니다. 그들 각자의 인간으로서 존재론적 불안함이 곧 의미를 알 수 없는 꿈으로 인한 불안과 염려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모든 꿈의 의미와 해석을 하나님에게서 찾고자 하는 믿음의 삶을 살며 또한 믿음의 꿈을 간직하고 유지하는 일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바로의 두 신하의 꿈의 해석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는 요셉의 권고는 사실 요셉 자신의 꿈과 삶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 41:46절에 의하면 요셉이 바로 앞에 섰을 때에 그의 나이 삼십이라고 했는데, 그가 형들에게 팔릴 당시의 나이가 17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창 37:2), 애굽에서 종살이를 한 세월이 무려 13년이나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의 소외와 연단을 경험하면서도 요셉이 절망과 죽음 대신 희망과 생명의 여지를 도모하는 식의 삶을 살 수 있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나일 강은 마르고 그 땅의 가축과 곡물은 시들어도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의 마음에는 결코 쇠함이 없는 것처럼, 믿음은 어떤 경우에도 죽음을 위한 봉사자가 아니라 하나님 편의 생명을 위한 협조자로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꾸는 모든 꿈의 해석이 하나님께 있다는 요셉의 주장은 스스로의 삶이 생명을 위한 봉사이며 협력을 이루기 위한 것인 까닭에 꿈을 통한 무의식의 세계의 표출에 대해 전혀 두렵거나 주저할 것이 없다는 자기선언과도 같습니다. 실제로 요셉의 꿈해석의 방법은 죽음의 위협을 능가하는 생명의 꿈, 즉 생명을 꿈꾸는 식입니다.  아무리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이 땅 위의 모든 것은 정해진 한계가 있기 마련이며, 완전한 희망과 부유함만큼 더욱 철저한 자기한계와 가난을 경험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의 실체입니다. 사람마다 번번이 목전에 닥친 죽음의 위협 앞에서 어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순전한 믿음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을 능가하는 꿈과 희망의 마음가짐을 지니며 살아야 합니다. 요셉이 자신의 삶의 과정을 통해 생명과 죽음의 ‘연속선 상’에서 생명의 승리를 희망하는 식의 선택을 따른 것은 순전히 자신과 함께 한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그로 하여금 참 생명의 꿈을 꾸게 하며, 모든 꿈의 의미를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으로 가득 찬 것이 되도록 만든 이유입니다. 항상 생명의 위력이 넘쳐나는 삶의 실천을 통하여, 꿈이 주는 허황하고 무책임한 생각의 그늘까지도 모두 벗어버리는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꾸는 모든 꿈의 궁극적 성취의 비결과 방법이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믿음 안에 있습니다. 주님은 정말로 우리가 꾸는 모든 꿈의 내용과 해석 기준이 되는 분입니다. 샬롬!

10월 19일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창 37:17)

신약성경에 그려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은 구약의 인물을 들자면, 단연 요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한 그를 못마땅히 여긴 나머지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 형들에 의한 무력과 폭력의 희생양이 되었으면서도, 하나님의 돌보시는 섭리에 힘입어 마침내 살아남아 자신을 괴롭게 하였던 형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후견자, 또는 구원자로서 사명을 감당한 요셉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의 모형을 찾게 됩니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사게 된 가장 큰 요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꿈 때문이었습니다.  말째 동생인 요셉의 곡식단은 일어서고 열명의 형들의 곡식단들은 모두 둘러서서 절을 하더라는 요셉 자신의 꿈은 얼핏 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더욱이 해와 달과 열한별이 모두 자신에게 절하더라는 꿈은 형들의 말 그대로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사악한 욕심의 표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꿈은 무의식 속의 ‘초 자아’의 욕구의 표현인 일반적인 꿈과는 달랐습니다. 그것은 ‘이상’ (vision)이라고 부를만한 것으로서, 각자의 믿음과 소망을 매개로 하여 하나님께서 보이시고자 하는 새로운 일이나 계획에 대해 자신의 모든 것이 연합하고 일치하는 경험을 뜻합니다. 요셉의 꿈을 하나님께서 주신 ‘이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평소의 삶 속에서의 진실함과 성실함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은 장성한 그의 형들과 함께 들에서 양을 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창 37:2).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라는 말의 원래의 의미는 요셉이 그들의 helper 로서, 모세를 도와 일한 여호수아의 모습을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요셉이 꾼 꿈의 내용이 방자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 야곱이 “그 말을 마음에 둔” (11절)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꿈’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삶의 내용입니다.  입으로는 제 아무리 굉장한 미래의 계획과 야심에 찬 소원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현실적인 삶의 내용과 질이 그러질 못하면 아무도 그 꿈의 가치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큰 꿈’을 갖는 일이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고 신뢰할 수 있게끔 가꾸는 일입니다.  사람이 진실한 해야만 진실한 꿈을 꾸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이상은 지극히 선한 것이었습니다.  가족 모두의 왕이 되려는 듯한 그의 꿈은 결코 형제들을 악하게 부리거나 고생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꿈은 결국 그 형제 모두를 기근에서 건져내고 이스라엘 전체의 번영을 이룩하기 위한 하나님 자신의 구원계획을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시기하는 형들이었지만, 그들이 안녕한지의 여부를 살피고 오라는 아버지의 권고를 받아들여 요셉은 헤브론 골짜기에서 세겜으로, 그리고 다시 세겜에서 도단까지의 먼 여정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60 마일, 80 km.; 18마일, 21 km.).  이미 도단으로 떠나고 없는 형들의 자취를 찾기위해 세겜 골짜기 빈 들을 헤메는 요셉의 모습 (16절)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빈들을 헤메시는 우리 주님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끝까지 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믿음의 선한 양심을 지키는 것이 결국 그로 말미암아 그의 형제 모두를 구원하는 길이 됩니다.  왜냐하면 선한 마음의 동기에서만 악을 이기는 담대함과 용기가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은 다만 선한 것만이 악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악은 다만 또 다른 악을 부르는 연결고리일 뿐입니다.  그 계속되는 결박의 사슬을 끊는 것은 다만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 뿐입니다. 꿈과 이상의 차이는 본래의 자아와 초월적인 자아 사이의 분리와 갈등 대신에,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대한 전인적인 순종과 일치를 경험하는 데에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 편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도 그 나름의 갈등과 고민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기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치르는 인내와 수고의 대가일 뿐입니다.  어쩔 수 없이 경험하는 자기 본연의 욕구나, 초월적인 욕구 간의 신경질적인 갈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롬 8:28의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와 같은 전 우주적인 차원의 일치와 연합을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꿈’보다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는 일과 관련하여 최대한 정직하고 진실한 면모를 갖추어야 합니다.  매사에 하나님 편의 선의 의지를 갖고서 악을 이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요셉’이라는 이름의 뜻처럼, 매사에 하나님 편의 온전한 것을 ‘더해주시는’ 분입니다. 스스로 얻기를 바라면서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개별적인 것들을 하나님 자신의 풍성하고 복된 것으로 대해주시는 은혜의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샬롬!

10월 12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창 33:15)

야곱과의 화해를 마친 에서는 20년 만에 다시 만난 동생 야곱의 가나안 땅 정착을 위해 함께 동행할 것을 청하지만, 어린 자녀들과 가축 떼의 안녕을 염려한 야곱은 에서의 거듭된 호의를 사양합니다. 에서가 자신의 종 중 몇 사람을 야곱의 일행과 함께 하도록 하겠다는 배려까지도 어린 자녀들과 새끼를 벤 가축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이유 때문에 사양하는데, 그 이유는 야곱 스스로 가나안 땅에의 정착을 이루고자 하는 실질적 염원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야곱은 그가 20년 전 가나안 땅을 떠나 올 때에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축복한 언약의 내용의 실현을 염두에 두고 평생을 살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창 28:3, 4). 어린 시절 야곱이 형 에서에게 범한 잘못, 즉 허기진 에서를 유혹하여 팥죽 한 그릇으로 그의 장자권을 넘겨받고, 늙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이 받아야 할 장자의 축복을 가로 챈 일에 대해서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 한 예물과 함께 용서의 은혜를 청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남은 생애를 형의 그늘에 매어 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한 믿음의 꿈과 소명을 저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형 에서에 대한 지나친 의존 본능이나, 과도하게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 역시 야곱이 조심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십 년 만에 다시 찾은 가나안 땅에서 새로운 삶의 기반을 닦는 일과 관련하여 이미 그곳에 거주하면서 충분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에서에 대한 기대감이나 의존 본능을 부인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사람마다 뭔가 익숙하고 미안한 마음을 갖는 대상에 대한 합리적이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다분히 인간적인 정이나 인습에 메이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올바른 영적 분별력을 유지하는 일조차 어려워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연합하여 더불어 함께 살아보고자 하는 형 에서의 청을 두번이나 정중히 거절하면서 야곱이 제안한 말이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라는 대답입니다. 그 말의 뜻은 야곱이 자신의 진심어린 용서를 받아들인 에서의 너그러움 만으로도 평생의 짐을 내려 놓을 만한 큰 호의를 받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 이상의 배려를 중지해도 좋다는 감사의 고백일 수 있으며, 야곱 가족들의 가나안 땅 정착을 위한 남은 과제는 야곱 스스로 해결함이 마땅하다는 겸양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야곱이 에서를 가리켜 ‘나의 주’ 또는 ‘주님’이라고 부른 것이 단지 에서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형과의 화해를 전적으로 가능케 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표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 말이 하나님께 대한 야곱 자신의 ‘궁극적인’ 믿음의 고백이었다는 뜻입니다. 그 말을 듣는 에서의 입장에서는 야곱이 그만큼 자신을 대우하고 존경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터이지만, 그 말의 실제 내용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야곱의 찬양과 믿음의 고백이라는 뜻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신뢰하면 결코 사람 앞에서 비굴해 지거나 약해질 이유가 없습니다. 도리어 매사에 그분의 은혜의 공급을 신뢰하는 것만이 누구를 대해서나 진심이 가득하고 당당한 처사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형 에서에 대한 인간적 존경과 애정을 표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삶의 근본 열쇠를 지닌 분은 다만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식의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으로는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은혜로는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 바로 은혜의 원리입니다. 은혜는 더한 자에게 더해 지며, 덜한 자에게는 덜해지는 것입니다. 믿음의 원리에 입각하여 불가능한 중에도 힘써 구하고 누리는 만큼 더욱 크게 사용할 수 있는 삶의 원천과 같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입니다. 아무리 사람의 도움이 절실한 것만 같은 경우에도, 위로부터의 신적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은혜와 은혜 안에서의 공급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혜는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만큼 순전히 ‘내 것’이 되는 삶의 원리입니다. 그분의 은혜를 얻는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샬롬!

10월 5일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창 31:24)

‘사기꾼’ 야곱이 그의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을 통해 전수된 하나님의 언약의 진정한 계승자가 되는 과정에 있어서 핵심적 요소는 그 일 자체의 신적인 특성, 즉 하나님께서 직접 불의하고 죄된 야곱을 언약 당사자가 되게끔 하신 데에 있습니다. 장자인 에서 대신에 차자인 야곱이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장자권을 넘겨받은 인물로 설정된 것 자체가 어쩌면 사람마다 태생적 한계 때문에 뭔가 삶의 근원적인 차원의 변화와 유익을 구하는 삶에 대한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이유와 변명을 없이하기 위한 하나님 자신의 공평과 정의의 성품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신적인 문제’ (the divine agenda), 또는 ‘영적인 일’ (the spiritual issue)이라는 말이 갖는 중요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일체의 현실적 가치를 부정한다기보다 현실적 차이의 부족함을 메꾸는 하나님 편의 온전함, 바르게 함과 같은 특성을 지닙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19:26)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런저런 현실적 이유와 조건들 때문에 우리 스스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서 오히려 믿음의 원리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다고 믿게 하시는 분입니다. 한 때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장자권을 탐하였던 야곱은 그러한 신적이며, 영적인 차원의 문제를 다분히 현실적인 대안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아무것도 이루지도 개선하지도 못한 체, 이십 년 간의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습니다. 야곱보다 몇 배나 영악한 그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결혼을 빌미로 종살이를 하며 지냈던 야곱은 여전히 인간적 기질과 권모술수를 사용하여 자신의 집을 일으킬만한 소유를 확보하는 일에 성공하였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그의 계획은 여전히 라반의 공격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라반이 허락하지 아니하면 결코 되돌아 갈 수 없는 여정에 놓인 것입니다.  라반의 허락없이 야간도주를 일삼은 야곱과 그의 일행은 무려 칠인 동안이나 그들의 뒤를 쫓아온 라반의 무리들에 의해 적발되었고, 그에 상응한 보복과 보응의 위기에 놓였을 때, 하나님께서 라반의 꿈에 나타나 야곱의 행위의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권고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명령한 일 –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13절) – 자체가 선악의 가치 기준에 해당하는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그 일 자체의 선함과 악함의 여지를 결정하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소관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말이 야곱의 도주행위나 라반의 재산, 즉 양떼들을 탐하여 제 것으로 삼은 일 자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은 이십 년간의 방랑생활을 뒤로 하고, 일찍이 그의 조부를 통해 허락한 하나님의 축복의 계승자로서 삶을 살고자 하는 야곱의 믿음의 열망과 열심만큼은 아무도 함부로 세상적 가치관의 적용을 일삼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최소한 야곱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고 그 일을 실행에 옮긴 것과 관련해서만큼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선악의 가치판단을 금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 일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이었고, 그가 이룩하고자 하는 일의 특성을 잘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오해와 욕을 먹더라도 성도의 삶의 일부부만큼은 반드시 ‘신적인 문제’의 특성을 내포하여야 합니다. 즉 매사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의 동기와 결심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단지 선악 간의 현실적 판단을 회피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보다 몇배나 더 높은 도덕율의 실천을 도모하기 위함입니다. 높은 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마을 안에서의 온갖 복잡한 인간사가 한낱 개미떼의 움직임처럼 여겨지듯이, 세상의 온갖 시름과 걱정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끔씩 믿음의 ‘고 지대’에 올라서서 하나님께서 보게 하시는 것을 그의 눈으로 내려다볼 줄 아는 마음가짐이 절실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 8:3, 4)라는 말씀의 의미 그대로 입니다. 야곱의 가나안 행을 위한 결심이 그의 절박한 삶의 처지에서 ‘자기 집’을 세우기 위한 지극히 인간적인 바램에서 기인하였습니다 (창 30:30). 그 같은 염려를 벗어날 길이 없던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친히 ‘벧엘의 하나님’임을 내세우면서, 일찍이 야곱이 서원한 대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을 세워야 할 자로서 사명을 감당케 합니다. 이제부터 범사에 야곱이 상대할 자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임을 일깨운 것입니다. 성도가 사람들이 정해놓은 선악간의 판단기준에 매이지 않으려면, 매사에 하나님의 판단을 의식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야곱처럼 이방인 외삼촌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그의 행동에 대해 선악 간의 판단을 금할 수 밖에 없는 신적인 위엄과 존귀함을 덧입는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사람들 앞에서 함부로 판단받지 않는 일이 인간적으로는 어렵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계승자가 되십시오. 샬롬!

9월 28일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창 29:1-2)

아담과 이브의 ‘실락원’ 이후 성경에서 ‘동쪽’ 은 인간의 불순종과 반역, 그리고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갖습니다. 예를 들면, 타락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의 동쪽으로 갔고, 노아의 후손들은 동쪽으로 옮기다 시날평지를 만나 바벨탑을 세었습니다. 동방 사람은 종종 가나안인과 동일시되며, 타락한 사람들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유다 백성들은 동쪽 바벨론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출애굽 당시 홍해를 가르는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동풍’은 하나님의 징계의 수단이며 죽음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 성막을 포함하여 왕정 시대의 성전의 입구가 동쪽으로 향하는 이유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과 보응 이후에 주어지는 새로운 삶의 기회와 용서의 은혜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동쪽’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קֶדֶם / ‘케뎀’은 ‘앞에’ 또는 ‘이전’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방향을 잡을 때 가장 먼저 동쪽을 향하고, 그것으로 북쪽과 남쪽, 그리고 서쪽의 의미를 설정하는 기본적인 자리를 삼습니다. 한 마디로, 동쪽이 중심입니다. 성막이나 성전이 동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이러한 상징적인 의미를 암시합니다. 동방으로 향하는 야곱의 모습을 가리켜 “야곱이 길을 떠나…” (1절)라는 식의 진취적이며 희망적인 표현을 쓴 것은 형 에서의 장자권을 탈취하는 과정에 내포된 그의 죄악성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이삭에 의한 용서와 긍휼, 그리고 언약의 계승을 허락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행하는 자로서 야곱의 ‘새로워진’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창 28:1-4). 당장에 비쳐지는 그의 모습은 하란 땅 (동편)으로 향하는 도망자와 같지만, 그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의 계획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빛 아래서 새로워진 사명자, 또는 특별한 차원의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을 힘입은 자임이 분명합니다. 이는 다름아닌 인간성 자체의 죄로 인한 양심의 가책과 형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와 구원의 약속의 부르심을 따라 살아갈 성도들로서 마땅한 태도를 교훈합니다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5:17-21). 누구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 삶의 방향 설정은 물론, 때로는 놓여진 삶의 자리 자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기하여야 합니다 –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창 28:18-19). 좋은 삶의 여건을 타고나야만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삶의 자리를 어떻게, 또는 누구의 그늘 하에, 그리고 어디로 향할 것인지가 더욱 문제입니다. 동편에 뜨는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기준으로 삼으십시오. 그리스도는 항상 우리의 죄는 멸하고, 용서의 기쁨은 더욱 배가되도록 하십니다. 일단 그의 용서의 은혜를 삶의 기본 방향으로 삼고, 그것을 기준으로 다른 여러가지 삷의 방향을 정하면,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선한 섭리의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계신 삶의 ‘동쪽’으로 향하십시오. 힘들고 어려워도 일단 그곳으로 향하면 필경 모든 것이 예비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늘 ‘동편’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샬롬!

9월 21일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창 26:18)

창 26:12-13에 언급된 대로, 이삭을 하나님의 복을 받아 그랄 지역의 거부가 되었습니다 –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그러한 그의 형편을 시기한 그랄 왕과 그곳 사람들의 시기와 위협에 맞서서, 이삭은 생존권 보장을 위한 다툼 대신에 그 곳 지역의 평지를 떠나 그랄 골짜기로 이주합니다. 일찍이 아브람과 롯이 분쟁을 방지하고 서로의 장래의 번영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가축 떼를 분리한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창 13:5-9), 이삭은 그의 무리들과 함께 정치적, 현실적 이유로 새로운 목초지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이제는 그랄 사람들이 사용 가능한 자원의 한계까지 임의로 확장하여, 두번씩이나 이삭의 종들이 파 놓은 우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였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26:14, 15). 그들이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파놓은 우물들에 대하여 강제로 소유권을 주장한 이유가 아마도 다른 유목민 그룹이 그 지역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시도일 수도 있으며, 이삭의 가축 떼의 성장과 그의 농업 활동이 그 지역 내의 이용 가능한 물 공급양을 초과한 탓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러한 상황은 이삭의 무리를 그 지역에서 쫓아낸 실질적인 근거를 제공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랄의 왕 아비멜렉과 그 백성들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점은 바로 그 지역 내의 우물의 위치에 대한 이삭의 지식이었습니다. 고대 중근동 지역의 경우 한 세대의 목축업자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필수 정보 중 하나가 바로 우물로 대표되는 환경 자원의 위치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정보는 무리와 부족 집단의 생존 요인 중 하나로서 세대를 지나면서 더욱 강화되기 마련입니다.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우물의 진원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았던 것입니다. 그것도 세 곳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세 번째 우물을 파낸 후 이삭의 언급은 그의 자발적 포기에 대한 미래의 기대를 반영합니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22절). 이삭의 무리들이 우물의 위치를 선정하고 그 일을 성공하기를 무려 세번씩이나 반복하는 모습을 목도한 아비멜렉은 결국 한번 더 이삭에게 자신과 자신의 부족을 해하지 말것을 청하는 평화협정을 맥을 것을 요구합니다 –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28, 29절). 그 후 두 집단은 경제적, 정치적 필요성의 상황에 대응하여 평화롭게 헤어집니다. 아비멜렉의 백성들이 새로 파낸 우물을 압류한 것은 이전에 그 땅에 대한 소유권에 기초한 것이었지만, 이제 이삭의 집단이 아비멜렉의 영향권의 경계를 넘어 이동함으로써 중단되었습니다. 이상 편의 완전한 승리로 모든 다툼이 끝난 것입니다. 인간의 다툼의 끝은 다만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의 충만함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이삭의 경우, 그 생명의 원천이 아버지 아브라함이 부르던 이름, 즉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새로 파낸 우물들의 이름까지도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다고 했는데, 아브라함은 결국 그의 아들 이삭에게 육체의 갈증을 해결하는 우물 뿐만 아니라, 영혼의 갈증까지도 모두 해결하며, 원수의 위협까지도 ‘평화적으로’ 물리치게 하는 참 삶의 비결을 전수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모두 이방 땅의 나그네의 신분으로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문제점에 직면하였지만, 아버지가 이룩한 영적 전쟁, 즉 참 생명의 원천을 찾고 유지하는 일에 성공한 결과, 그 자녀가 배의 유익을 얻게된 것이 사실입니다.  부모는 자식의 삶의 문제점을 해결해줄 책임이 있는 존재입니다. 사라에게 두 번씩이나 욕보임을 당할 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인 아브라함은 인간의 윤리, 도덕적 책임의 한계로는 불가능하였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생수의 근원으로 여기는 믿음으로는 그 일이 가능하였습니다. 부모가 생수의 근원인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면, 정말로 자녀들을 위해 해줄 것이 없습니다 –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렘 2:13). 자녀들에게 ‘줄 것’을 생각해서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생수의 근원으로 여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풍성한 영적 ‘우물’을 소유하십시오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샬롬!

9월 14일

“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창 24:8)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동족 간의 결혼풍습(endogamy)의 취지는 단순히 순혈주의나 민족주의를 표방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 즉 가나안 땅의 실질적 소유권의 유지와 회복을 위한 목적이 우선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의 아내가 될 자를 찾기 위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종을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로 보내면서, 적합한 사람을 찾은 경우에도 이삭이 그리로 돌아가는 일만큼은 없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삭의 아내가 될 자는 아브라함의 친족이어야 한다는 조건보다, 이삭이 여자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가나안 땅을 벗어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우선순위가 먼저라는 뜻입니다. 동족 간의 결혼을 위한 취지 자체가 아브라함 가문이 가나안 땅에서 확보한 여호와의 기업, 즉 그 땅을 그의 후손들에게 줄 것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받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 맺은 언약 당사자의 처지에서 다른 모든 삶의 요구 조건들은 다만 하나님과의 ‘현재적’ 교제와 사귐의 취지를 온전케 하기위한 것이어야 함을 일깨우는 예는 성경에 수없이 많습니다. 요셉은 그의 나이 삽십세에 애굽의 온이라는 곳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고 (창 41:45), 모세는 애굽의 황태자의 신분에서 쫓겨난 후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여 그곳의 제사장 르우엘 (이드로)의 일곱 딸 중 하나인 십보라를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출 2:21; 18:2). 모세가 그의 아내 십보라를 한때 돌려보냈었다는 언급 때문에 (출 18:2), 이방인을 아내로 맞은 모세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아니하였다는 추측이 난무하며, 그것 때문에 그가 순혈주의를 표방한 것 아니냐는 견해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는 기간 동안 그들의 판결을 담당하는 자치 행정기구인 천부장과 백부장,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세우는 일과 관련하여 그의 장인의 직접적인 조언을 따라 행할 정도로 모세의 이방 여인과의 결혼생활에 별다른 문제점이 없었습니다. 십보라와의 재결합 후 그녀를 다시 돌려보낸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 “모세가 그의 장인을 보내니 그가 자기 땅으로 가니라” (출 18:27).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에서 430년 간의 애굽에서의 종살이의 시작과 끝을 담당한 두 명의 민족적 영웅들의 아내가 한결같이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들어 살아가는 삶의 동반자였다는 사실이 주는 교훈이 매우 큽니다. 부부관계라는 가장 초보적인 차원의 인간관계를 포함하여, 성도의 삶의 모든 필요 요소들의 공급과 충족이 하나님 편의 ‘현재적’ 부르심의 의미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그것이 그와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갈 땅, 즉 영토를 확보하는 사명을 위한 것이었으며, 요셉은 가난과 기근으로 인한 야곱의 열두 아들, 즉 그의 형제들의 생존을 보장하는 일이었고, 모세는 두말할 나위없이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 즉 출애굽의 위업을 달성하는 일이었습니다. 시기와 조건은 다르지만, 고대 이스라엘의 민족적 영웅들의 결혼관의 최우선순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는 ‘현재적’ 삶의 요구조건들의 완성에 있었습니다. 미래의 변화된 자기 모습을 꿈꾸면서, 그 상황과 처지에 맞는 식의 이해관계적 결혼이나 신분상승을 목적으로 삼는 식의 결혼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동기적 순수함 뿐만 아니라, 주어진 삶의 현재적 부르심에 대한 성실한 응답으로서 결혼생활을 꿈꾸며 실행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이 동족 간의 결혼의 취지를 강조하는 면이 있다면, 그것은 다분히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우선순위를 지키기 위함이 목적일 뿐, 그것 자체가 결혼조건은 결코 아닙니다. 주어진 삶의 현재적 부르심의 취지를 왜곡하거나 감소하는 식으로는 결코 참된 삶의 만족을 이룩할 방법이 없습니다. 도저히 견디기 힘든 삶의 무게인 것만 같아도,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로의 초청이며 부르심으로 여길 때,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제공받습니다. 결혼 생활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관계의 저변에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궁극적인 도움을 힘입는 유일한 방법은 결코 ‘현실도피’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맞대응’ 뿐입니다. 아무런 핑계나 거짓도 없이 드러난 그 모습 그대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에 의한 변화를 구할 때에만, 정말로 우리 각자에게 꼭 맞는 식의 하나님 편의 대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수고로운 현실을 외면하는 자들에게는 미래의 평안이 피해 가지만, 감당하는 자들에게는 미래가 찾아오는 법입니다. 힘에 부치는 것만 같아도, 자기 스스로 현재를 붙잡는 손이 바로 미래의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은 늘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 법입니다. 샬롬!

8월 17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창 9:11)

기독교 신앙을 이해함에 있어서 ‘언약’이라는 말의 중요성은 매우 큽니다.  그것은 믿음의 내용 자체가 우리들 각자의 의로운 행위나 결심에 따른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뜻과 결심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하나님과의 언약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언약에 내포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진지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진지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매사에 그의 뜻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바르게 세우고자 하는 마음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언약을 맺는다는 말의 일반적인 표현은 언약을 ‘쪼갠다’ 인데, 그보다 뜻이 더욱 강한 언약을 ‘세운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이미 체결된 언약이 한쪽 당사자의 일방적 파기나 부주의에 의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 초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두말할 나위없이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신뢰와 믿음의 여지가 사라지고 만 사실을 가리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과연 노아 한 사람의 의로움을 보시고 온 세상에 대한 심판과 보응 대신 회복과 구원의 역사를 가능케 할 것인지를 믿을 수 있는 지의 여부입니다.  노아 한 사람의 믿음, 또는 지구 상의 단 한 곳에서의 하나님과의 접촉이 이루어진 사실을 전제로 하여 과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운명과 진로를 기꺼이 바꾸실 것임을 기대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매사에 뭔가를 ‘세우고자’ 하는 긍정적인 마음의 동기가 번번이 회의와 의구심으로 바뀌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아주 사소한 일 한 가지, 혹은 단 한 사람의 올바른 행동과 마음가짐에 의해 개인의 삶 전체와 특정 집단의 흐름이 바뀌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뜻에서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그 언약이 창조주 하나님의 의지와 결심을 반영한다는 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 위의 단 한 사람의 믿음, 때로는 단 한 번의 믿음의 순종을 통해서도 능히 이 세상 전부에 해당하는 만큼의 본질적인 차원의 삶의 변화의 능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분입니다.  신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고대 중근동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건적 차원의 ‘쌍무적’ 언약이 아닌, 무조건적이며 ‘일방적인’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약속을 이행하고자 하는 측의 일방적인 의지와 선포가 내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매사에 언약관계의 주체가 자기 자신들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을 홍수로 뒤덮을 수 밖에 없는 심판과 보응의 현실 상황 속에서 노아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인하여 온 세상이 다시금 구원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 도저히 변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던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즉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필연성의 법칙이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노아 한 사람의 의로움을 통해 그 일이 가능케 된 것은 다만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와 열심의 표현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분이면서도 또한 수시로 변화하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유된 백성과의 관계를 기계적 원리나 법칙 대신에 인격적 만남과 사귐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인 까닭에, 그들의 행복과 번영을 위한 하나님 자신의 열심에 의해 스스로 끊임없이 변하고 또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단 한 사람, 혹은 단 한 가지의 의로움만 있어도 다함 없는 사랑과 은혜의 원리로 그 백성을 대하시며, 그 일을 위해 친히 온 세상의 운명이라도 능히 바꾸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입니다. 문제는 그 하나님께 대한 믿음만큼 우리들 자신의 생각과 결심이 변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삶을 세우는 일은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차이를 알고 인정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사랑도, 미움도, 원망도, 슬픔도, 삶의 기대와 희망의 이유는 물론 절망의 조건들까지도 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소신이나 주관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얼마든 자신의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 대부분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식으로 읽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은 물론 삶의 모든 여지들이 우리의 생각과 결심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와 결심에 따라 변하고 또 변화하는 삶의 주인공들이 되십시오. 성도는 어떤 경우에 처해서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삶을 세우는 자들일 뿐, 자기 임의대로 허물거나 파괴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운 그의 언약을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삶 속에서 세워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샬롬!

8월 10일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 5:3)

창 5장의 아담 가문의 정식 계보가 장자인 가인이 아니라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벨 대신에 하나님께서 허락한 “다른 씨,” 즉 셋째 아들인 셋을 통해 이루어진 데에는 각별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 4:25). 가인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이 드린 제사는 받으셨지만, 자신이 드린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는 이유 때문에 들에서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으실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회개를 통한 거듭남의 의무보다, 당장에 자신의 정성이 무시된데 비해 동생의 제사는 받아들여진 데 대한 시기심과 원한을 갖고서 종교적 차원의 의무감 대신에 현실적 보응의 원리를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사람마다 죄 된 소원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선을 행할 자로서 책임감을 다스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하나님의 간섭을 아주 배제한 체로 다분히 인간적 보응의 원리를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 4:9). 가인의 후예들 중에 등장한 각종 인류 문명의 효시가 될 만한 많은 사람들의 공헌에도 불구하고, 아담 가문의 정식 후계는 ‘살인자’ 가인의 계보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제사와 제물을 드렸던 아벨을 대신할 그의 동생 셋의 계보에 속한 자로 정해진 것입니다 –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 4:26). 가인의 후손들의 수명이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아서 그 가문에 속한 자들의 평균 수명이 얼마나 되는 지 알 수 없지만, 셋의 후손들은 최고로 단명한 자의 수명이 365세 (에녹), 가장 장수한 자의 수명은 969세 (므두셀라)에 달합니다. 에녹의 수명이 굳이 365세인 이유는 일년 365일 내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삶의 최후는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데리고 가시는 것과 같은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 입니다 –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5:24). 고대인들의 수명을 현대인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아담 가문의 10대 손인 노아가 굳이 ‘777’세를 산 것으로 보아, 셋에 가문에 속한 모든 후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장수하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창 1:28)는 창조주의 복을 잇는 삶을 살았음을 보여주는 것이 성경의 의도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적 세계관에 따른 수 개념의 완성인 ‘일곱’이라는 수가 세번이나 겹치는 세월을 산 노아는 당시 온 세상에 만연한 인간의 죄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홍수 심판’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홍수 후의 새로운 세상의 조상이 됩니다. 즉 심판의 와중에도 그 백성을 향한 구원의 약속을 결코 잊지 않는 하나님의 ‘위로’의 상징적인 존재가 됩니다 –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창 5:28-29).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허락한 ‘그의 모양과 형상’과 같은 아들 셋의 가문에 속한 자들에게 일어난 일들입니다.  신약성경과의 연관성 하에서 볼 때 인류의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와 대비되는 죄성의 상징인 ‘첫 사람’ 아담에게는 희망이 없지만, 순전히 하나님께서 허락한 ‘다른 씨’인 셋의 후손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의지의 표상입니다. 구세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한 ‘다른 씨’의 상징이며, 그 의미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셋’이라는 이름의 뜻이 하나님께서 ‘정하신다 또는 세우신다’ (set or place) 입니다. 아담 가문의 계보를 포함하여, 성경에 족보가 나열된 의도는 하나님의 백성의 올바른 정체성, 즉 삶의 뿌리가 어떠한 지에 대한 깨달음을 제공하기 위함 입니다. 성경은 살인자 가인의 족보 대신에, 하나님의 구원의 반열에 속한 셋의 후손들의 계보를 소개하면서, 누구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영원한 삶을 위하여 부름 받은 자들로서 영적 소속감과 정체성을 분명히 할 것을 촉구합니다.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에 내포된 말 그대로, 성도는 죄를 다스릴 자로서 삶을 살아야 할 자들입니다 –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7). 분노의 원리를 따라 살기는 쉬워도, 그것이 초래하는 인격의 파탄과 삶의 황폐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설혹 누군가의 분노의 희생양이 되는 경우에도, 자신의 삶이 하나님에 의해 반드시 다시 ‘세워질’ 것을 기대하고 그가 허락하는 삶의 또 다른 기회와 염원을 좇는 자들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자의 삶에는 의례히 장수와 평안, 그리고 노아처럼,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의 선물로 가득하여 집니다. 절대 가인의 후손이 되어서는 안 되며, 셋의 후손, 에녹의 후손, 그리고 노아의 후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불순종의 상징인 아담을 생물학적 부모로 둔 것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책임이 없지만, 자기 스스로 하나님께서 마련한 ‘다른 씨,’ 즉 구원의 계보에 속해야 할 자로서 선택과 의무감을 저버리게 되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를 힘입은 자로서 삶의 계보를 확실히 해야 할 것입니다. 가인이 아니라, 셋이 우리의 조상입니다, 샬롬!

8월 3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6)

진화론의 창시자인 다윈은 반 기독교적인 정서의 대변인이 되고자 하는 취지에서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기록하고, 인류공통적인  종족보전의 본능을 자극하였습니다.  한국사람들의 심성에 거의 미신처럼 작용하는 ‘단일민족’ 신화가 사실은 지정학적으로 대륙의 끝인 ‘간도’ 에 위치한 소수민족의 생존을 위한 자구책인 것과 같습니다.  ‘우리 끼리’ 혹은 ‘우리만’ 을 위한 병적인 집착이 원인입니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간에 자기 자신이 아니면 아무도 스스로를 위할 자가 없다는 식의 생각이 얼마나 삶을 어렵고 힘들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만물의 창조자인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본질에는 소위 삶의 ‘근원적인’ 것에 대한 염려가 없습니다. 종족 문제건, 의식주의 문제건 간에 인간의 삶의 근원적인 문제의 해결과 그 시작은 만물의 창조주인 하나님께 대한 기대와 염원에서 비롯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여섯째 날의 창조행위의 일환으로 땅으로 하여금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낳게 하셨습니다.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낳게 하셨다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일체의 근원적인 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염려를 떨쳐 버리게끔 하는 촉구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이유와 목적, 그리고 저마다 고유한 가치를 정하고 세우는 분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식으로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나’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자 하며,  그로 인한 불필요한 염려와 괴로움을 자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각각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목적과 기능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분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다른 무엇’이 아니라, 그것 나름대로의 가치와 보람을 일깨우시는 분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를 위해 친히 대속 물이 되어줄 것을 약속하는 분 앞에서 우리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애쓸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들 각자의 모습 그대로 얼마든지 풍성하고 유익한 삶의 가치와 능력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로서 우리들 각자의 삶의 근거는 언제든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일일이 삶의 근거와 목적, 그리고 희망의 근거가 되어 주는 분입니다. 천지 창조의 대미를 장식하는 인간 창조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것도 친절히 ‘남자와 여자’를 구분해서 말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의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존재인 이상 최소한 우리 스스로 다른 무엇, 혹은 누군가와 같아져야만 한다는 식의 비교심리 내지는 운명론적 노예근성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다만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소원과 의지적인 노력만 있으면 됩니다. 흙에서 지음 받은 인간을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자신을 대리할 자로 세우셨다는 것은 인간의 ‘신격화’가 아니라 신의 ‘인간화’ 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친히 신적인 위엄과 영광을 버리시고 ‘우리와 같이’ 된 것입니다. 그 뜻과 계획의 완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신들의 세계에 들어오도록 요구하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 세상에 찾아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부족한 처지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며, 매사에 주어진 삶의 여건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취지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없는 것’ 까지도 능히 더해주시는 분입니다.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번창하고 부유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각각 그 모양대로 창조하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소위 ‘내 식으로’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최고의 헌신과 사랑의 이유를 추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나 아닌 다른 그 무엇이 되고자 하는 헛되고 무익한 망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성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제일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주님으로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도모하는 ‘참 인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7월 27일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 11:3)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경계를 요구한 ‘다른 예수,’ ‘다른 영,’ 그리도 ‘다른 복음’ (고후 11:4)이란  거짓 신학, 즉 영광의 신학을 가르치는 자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입니다. 그러한 다른 복음, 즉 ‘거짓 복음’의 신학은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영광의 신학’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것은 강한 자를 위한 신학입니다. 자체의 모순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순전히 ‘자기 식의 구원’을 믿습니다. 즉  자기 자신의 힘이나 선함, 또는 지혜에 의해, 혹은 매사에 승리의 상징 안에서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예수님의 두 수제자인 야고보와 요한 까지도 한 때 영광 중에 예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되기를 바라면서도, 실상 예수님께서 마시려고 하는 잔이 ‘고통의 잔’이라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막 10:35). 영광의 신학에서 십자가는 걸림돌이며 스캔들과 같은 것입니다 (고전 l:18.).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라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영광의 신학은 늘 문화의 힘과 성공신화와 같은 것에 기대어 거래됩니다. 그것은 한때 유행하는 온갖 문화적 상징들을 빌려 사용하다가, 결국 그것들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덮어버립니다. 실제로 요사이 지어지는 많은 교회 건물들이 은행이나 법원처럼 보이기도 하고, 예배 센터가 마치 공연 예술 센터 같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추구하는 신앙의 내용 자체가 건강과 부와 성공에 대한 것인 탓입니다. 영광의 신학은 당신이 예수를 사랑하고 충분한 믿음을 가지고만 있다면 얼마든지 건강과 부, 그리고 성공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행해지는 문화와 종교의 혼합 및 과장된 형태에 따르면 예배는 일종의 경건한 형태의 오락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나 박수 갈채가 ‘아멘,’ ‘할렐루야’ 를 대체했습니다. 신앙인들이 마치 티브이 쇼의 게스트 스타들처럼 화려한 의상과 몸짓, 그리고 입담으로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들에게 성공을 주셨는지 말하는 자리를 갖곤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하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지지할 것이므로, 심지어는 하나님을 대해서까지 구하기보다 명령을 내리라고 가르칩니다. 집을 얻는 것은 물론 다이아몬드 반지와 병의 치유, 직장에서의 승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보장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와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최선의 것을 베푸시고자 하며, 또한 그의 자녀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하시지만, 우리에게 멋진 집이나 다이아몬드 반지를 약속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우리에게 참된 믿음의 가치를 위해서는 얻는 것보다 포기하는 것이 더 많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바울은 영광의 신학과는 반대로 ‘십자가의 신학’으로 대답합니다. 십자가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며,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충만해질 때까지 부득이 고통을 끌어안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는 말씀처럼,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선한 목적을 이루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은 결코 우리에게 삶에 수반하는 고통을 폐지하거나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온전히 구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에게 고통을 견디는 법을 가르쳐주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가운데 고통받는 세상 한 복판으로 우리를 보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계절에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무더운 여름만큼이나 차가운 겨울 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계절과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신실하십니다. 우리는 “오 신실하신 주, 내 아버지여”라는 제목의 찬양을 노래하며 그 하나님과 동행할 때 인생의 모든 계절 속에서 그를 찬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생의 순간에만 빛나는 복음이라면, 그것은 결코 복음이 아닙니다. 성공과 건강, 그리고 행복만이 복음을 믿는 신앙의 이유이며 목적이라면, 그것은 결코 복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라고 가장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복됩니다. 인간의 화려한 영광스러움도 복음이 없으면 초라하고 비참한 것이 되고말며, 인생의 쓰라림과 상처도 복음만 있으면 영광스런 찬송의 이유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복음의 약속에 아무런 영광이나 영광스러운 것을 가미할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것이므로, 거기에 세상적인 영광을 섞는 것은 오히려 복음을 천하고 추하게 만드는 행동입니다. 영광을 가장하여 스스로 추해 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복음과 함께 하는 성도는 현실의 모든 추함 속에서도 넉넉히 영광스럽습니다. 그리스도의 진리인 복음 자체의 영광스러움을 깨닫는 것이 바로 참되고 진실한 믿음, 정말로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영광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샬롬!

7월 20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고후 7:11)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다분히 세상적인 일로 인한 근심의 차이에 대해 열거하면서, 전자는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지만, 후자는 ‘사망’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인생 자체가 평생 근심의 끈을 아주 놓을 수 없는 것이어서, 믿음 안에 살면서도 근심의 필연성으로부터 아주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주님으로 믿는 믿음 안에서의 근심은 다소 후회하되 영원히 후회할 필요는 없는 회개에로 이끌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세상적인 근심에 아주 메이다 보면 다분히 후회에 후회를 거듭하게 되고, 결국 마음에 사망 선고를 받는 것과 무책임과 자기 포기의 상황에 처하게 되고 맙니다. 사람마다 근심의 끝에서 사망을 이루고 마는 후회의 원인은 본인 스스로 참된 회개의 유익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양한 근심의 상황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회개를 이루는 것이 구원을 경험하는 삶의 첩경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내면의 근심을 통하여 회개의 열매를 이루기까지 변화와 변혁의 과정에 대한 묘사가 이를 잘 반영합니다.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이 사망을 이루는 근심에 대한 승리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일체 그들 자신의 ‘깨끗함’ 을 입증하였습니다.  그 모든 근심의 과정 내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마음의 온전함과 정결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들 자신의 근심에 찬 마음가짐에 이끌리는 대신 하나님께서 매사를 온전케 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끝까지 신뢰한 것입니다. 여러가지 일로 근심되는 삶의 상황을 자주 경험하면서도 근심이 계기가 되어 매번 자기 내면의 정결함과 삶의 방식에 대한 거룩함을 이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러가지 근심으로 인한 마음의 찌듦을 이기지 못하고 정처없이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소용돌이 식의 인간 형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목적과 방법이 다분히 근심을 벗어나고자 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근심의 참된 유익을 얻고자 함에 있습니다. 근심 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근심의 위력을 능가하는 그분의 위로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함 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함에 있어서 은혜와 행복에 속한 인생의 밝은 면 뿐만 아니라, 아프고 괴로운 면들을 지적하고 해소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오롯이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과 깨달음을 통해서만 근심의 위력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후회에 후회를 거듭해봐야 결국 몸과 마음의 사망선고를 경험할 뿐이라는 인식을 기반으로 하여, 모든 근심의 요인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대한 위임과 부탁을 내세우게 될 때, 비로소 우리들 자신으로부터 참된 해방이 가능해집니다. 삶의 다른 많은 여지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근심 중에 있는 자기 자신을 더욱 근심케 하며 하나님 편의 참된 위로의 손길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은 언제든 우리들 자신입니다. 겸손하고 거짓없는 믿음으로 근심의 늪으로부터 벗어나 삶의 진정한 자유를 누리십시오.  스스로 근심에 메인 나머지 자기 자신을 한탄하면서 도대체 근심의 늪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 사람보다 무모한 사람이 없습니다. 언제든 믿음 안에서 자기 스스로 속박케 하는 근심의 미혹들을 떨어버리는 삶의 주인공들이 되십시오. 근심하되, 근심에 아주 메인 사람들은 결코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샬롬!

7월 13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후 4:6)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실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얻게 되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의 약속은 마치 창조주 하나님께서 혼돈과 공허, 그리고 캄캄한 어둠에 뒤덮여 있던 창조 이전의 세계에 빛을 비추사 만물을 살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 전까지 몇 억겁의 세월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사람의 형상과 모양은 물론, 만물의 형체가 밝히 드러난 것은 다만 창조주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창 1:3)고 말씀한 한 순간에 의해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빛은 우리가 피조세계 안에서 경험하는 물리적인 빛이 아닙니다. 우주만물이 태양 빛을 반사하는 까닭에 햇빛이 모든 것의 원천일 것이라고 말하지만, 창조주께서 정한 빛은 햇빛보다 우월하고 먼저 있던 것입니다. 태양까지도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 낮과 저녁, 그리고 하늘과 땅을 나눈 후 땅을 비칠 하늘의 ‘광명체들’ (창 1:14) 중 하나로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물리적인 세계관이 전부일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인생의 많은 문제는 물리적 법칙으로 해결할 수 없음이 사실입니다. 창조의 빛은 오직 하나님께서 만 주실 수 있는 인간내면의 충만함과 행복감입니다. 자의식이 없는 짐승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과의 일체감에 대한 경험입니다. 홀로 하나이시며, 만물의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에서 비롯되는 조화와 질서, 자기만족, 기쁨과 평화, 그리고 행복의 총화와 같습니다. 물론 시, 공간의 지배를 받는 우리들 각자의 삶의 처지에서 경험하는 상대적이며 주관적인 한계 때문에 지극히 부분적이긴 하지만, 하나님과의 일체감을 허락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한없이 평안하며 감사의 조건으로 가득해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빛의 근원에 닿을 수 있는 특권을 허락 받았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인 모세까지도 겨우 ‘장차 없어질 것’ 으로 (고후 3:13) 잠간 누릴 수 있었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영원히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일이 다만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허락하심 하에서만 가능하다는 뜻이며, 그 빛이 우리의 마음에 비추인다는 것은 누구나 그 빛의 수혜자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가 오직 하나님께서 만 주실 수 있는 생명의 빛을 누구나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일체와 일치를 구하는 모든 성도의 믿음의 동기, 즉 내면의 진실함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함 입니다. 물리적 세계관의 근본적인 한계는 의례히 자체의 이원론적 구분에 있습니다. 즉 물질계와 정신계는 다르며, 과학적 지식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자연적 또는 물질적 질서에 비해 사람의 마음은 단지 ‘이차적 질서’ (a second order)에 속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물질이 공통적인 속성을 갖지 않는 서로 독립적인 실체일 것이라는 주장과 달리, 물질적 세계관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사람의 내면의 세계에서는 아무런 이유나 조건도 없이 쉽게 무마되고 해결되곤 합니다 –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8-10). 사람의 마음 속에서는 종종 ‘이유’가 ‘원인’을 대체하고, ‘자유’가 ‘결정론’을 능가하며, ‘목적과 가치’가 맹목적인 ‘자연법칙’들을 얼마든지 극복합니다. 그 모든 일들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 (redemption/substitution)의 주님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나의 죄와 허물을 대신 담당하사 나로 하여금 온전히 하나님의 친 자녀 된 자로서 삶의 특권을 회복하고 유지할 자로 살게 하신 분이 바로 이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에 관한 모든 약속과 그 약속의 신빙성을 보장하는 모든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믿을 때, 우리는 태양 빛보다 더 밝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우리 마음에 비추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 그 빛 아래 서면, 삶의 의지는 물론, 죽음의 의미까지도 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고후 4:14). 피조물로서 인간의 한계인 죽음의 필연성이 삶을 물질계와 정신계로 나누는 법인데,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 두 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빛, 즉 창조와 생명의 빛이 우리 마음에 비추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빛을 소유하고 한껏 누리십시오. 샬롬!

5월 25일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 11:26)

성만찬이 교회 력에 따른 특별한 성례전으로 정해지기 전인 서기 1세기의 초대 교회 당시 그것은 성도들 간의 애찬을 나누는 교제의 식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매 번의 모임 때마다 성도들이 각각 자기의 식사를 준비해 와서 함께 나누어 먹는 사랑과 친교의 식사자리 였습니다. 우리 식의 표현대로, ‘네 것 내 것’이 없이 적으면 적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그저 함께 나누어 먹는 사귐 자체의 의미를 즐기는 공동 식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개중에 자기 것을 자기 마음대로 먹고자 하는 마음의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 타인에 대한 배려없이 자기 만족만을 목적으로 음식을 취하는 덕분에 교회 내 분파와 파당이 생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두를 위한 식사 자리를 단지 그들 만을 위한 잔치상과 같은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성도 간의 애찬의 의미는 사라졌으며, 먹고 마시는 문제로 인하여 서로의 경제적 형편에 대한 차별적 이해가 생겨난 나머지, 끼리끼리 어울리는 식의 고립과 단절이 초래되었습니다.

‘식사’라는 공동체적 행위가 오히려 개인주의와 차별주의를 조장하는 민폐의 원인과 같은 것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행동 자체가 그들의 식사교제를 더 이상 ‘주의 만찬’이 아니게끔 만드는 요인이라고 말합니다 – “그런 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고전 11:20). 그리고 ‘주의 만찬’이 아닌 바 에야, 그러한 식사 자체를 더 이상 교회에서 즐기지 말라고 까지 충고합니다 –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22절).

단지 육신의 배부름을 위할 목적으로 하는 식사라면 마땅히 교회 밖에서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의 식사와 교제는 반드시 ‘주의 만찬’이어야 합니다. 즉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임을 알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의 필요와 만족을 채워 주기 위함 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먹는 것보다 믿는 것이 우선이며, 배부름은 오직 주님의 뜻을 이행하고자 하는 노력의 대가로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 주입되는 음식물 자체가 일단 입으로 들어간 후에는 그것이 어떤 경로를 통해 잘 소화되고, 몸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각종 에너지로 충분히 활성화 되는 일이 중요합니다. 먹는 것보다 먹은만큼 충분히 소화하고 소모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먹고 마시는 것보다 더 중요시해야 할 것이 바로 무슨 목적으로 먹고 마시는 가의 여부입니다. 굶주림이 되었건 과식이 되었건 간에 먹는 일로 인한 마음의 불편함을 해소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삶의 우선순위가 육체적 굶주림이 아니라 영적인 굶주림의 해소에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고려해야 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단지 음식물을 입 안에 넣는 일 이상의 것입니다.  잘 먹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를 위한 굶주림과 목마름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배부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  인간은 기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물에 부여해 놓은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함께 ‘축하’ 하고 즐거워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몸의 영양 공급은 물론, 영혼의 만족을 위해 창조주께서 제공해 놓은 음식물로 인한 참된 기쁨의 이유와 목적을 거절하는 것이 오히려 ‘절제’ 의 계명을 위반하는 ‘무감각의 죄’ 입니다. 개신교적 관점에서 ‘공동체적’ 식사의 가치와 즐거움을 무시하는 것은 ‘과욕과 탐욕’의 죄이기도 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한 집착은 아무래도 방탕과 과욕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매번 성찬식을 하는 심정으로 일일이 식사를 나눌 수는 없어도, 음식물 자체가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과 방법에 속한 것이라고 여기게 되면, 그 외 다른 삶의 영역에서도 온 세상을 구원할 목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취지를 이룩하는 마음가짐과 행동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이 바로 사람이 각각 자기 배로 신을 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몸을 하나님께서 거하는 성전처럼 여기는 행동입니다(고전 6:19). 우리의 몸과 음식에 대한 주님의 계율을 잘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음식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입니다. 샬롬!

5월 18일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고전 9:12)

주로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였던 예수님의 열한 제자 (가룟 유다를 제외한)의 경우와는 달리, 사도 바울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기본 상식이 없는 이방인 개종자들을 위한 사도적 부르심을 이행하였습니다. 제사 제도에 대한 경험의 토대 위에서 제사장과 레위인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현실적 배려를 당연시하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와는 달리,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도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근본적 경외심과 같은 것이 결여되었습니다. 바울 자신에 대한 배려를 포함하여, 그의 사역에 대한 무상의 지원과 같은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독신으로 이방 지역 곳곳을 다니면서 장막제조업자로서 이중직을 수행하여야 했던 이유입니다.

사도적 부르심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생활비를 포함하여 여행 경비에 대한 자급자족에 힘써야 했으며, 부양 가족을 둘 만한 현실적인 여유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는 창세기적 축복관에 비추어 볼 때 사도 바울의 ‘독신 사역’은 인간적인 공감은 물론, 신적인 권위나 축복의 의미와는 다분히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이 고린도 교회와 같은 이방 교회 내에서 그의 ‘사도 직’ 자체에 대한 의구심과 불만의 여지가 생겼습니다.

‘그와 같이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말하는 것이 과연 믿어도 될 것인가,’ 또는 ‘그가 말한 것이 과연 복음의 내용에 합당한가’ 하는 점과 관련되어서 입니다. ‘사도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는 사람을 과연 계속적으로 사도로서 대우를 해야 할 것인가’ 라는 점과 관련하여 고린도 교회 교인들 사이에서 내부적인 논쟁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사도로서 마땅한 권위와 권리를 나름 누리지 못한 처지에 대하여 변명하거나 합리화 하는 대신, 그렇게 된 이유가 오히려 그들에 대한 복음전파의 기회를 확립하는 데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즉 복음을 위해서라면, 마땅한 권위와 권리를 얼마든지 포기하거나 양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의 한계에 관하여 논하면서, 진정한 자유는 오히려 자유를 포기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복음과 함께 삶의 필요를 구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이라도 그의 자랑이 헛된 것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 권리를 포기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권리포기로 인해 다른 누군가가 얻게 될 유익이 바로 참된 권위와 권세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바울 자신이 누리게 될 권리와 권세가 바로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치 욕구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생리 상, 권리 또는 권위에 대한 욕구가 복음적일 때에만 믿음의 성숙이 완성됩니다. 성도는 모든 인간 속에 있는 타인에 대한 지배 욕구에서 비롯된 당연한 권리와 권위에 대한 보상심리가 주님의 것과 일치할 때에 비로서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자기 삶에 주어진 당연한 권리와 권위 마저도 복음의 유익, 즉 복음의 의를 드러내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바울이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달리 율법에 대한 상식이 전혀 없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의 사도적 권위와 권리를 앞세우면서 복음전파자에 해당한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였더라면, ‘고린도 교회’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적 권위와 권리를 포기하면서 까지 고린도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힘쓴 결과, 그나마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가르침에 대한 교회적 차원의 반응이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의 ‘사도’라는 말 자체의 의미가 그러하듯이, 우리 각자가 정말로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 되도록 이 땅 위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임을 믿는다면, 매사에 권위와 권리를 추구하는 방식과 마음의 동기에 있어서 까지 그의 뜻을 따라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권위와 권리를 자기 위주로 행세하지 않아야만, 그것들의 참된 가치를 드러내는 법입니다. 주님을  본받는 마음으로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는 식의 권위와 권리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가 진정으로 복음을 믿고 위하면, 끝내 그 복음이 성도의 권리와 권위를 지켜줄 것입니다. 진정으로 복음의 일꾼이 되십시오. 샬롬!

5월 11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고전 5:8)

피조물로서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일치와 연합을 갈구하는 종교적 욕구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친근함’에 대한 갈망입니다. 생물학적으로도 인간의 존재 방식 자체가 타인과의 전인격적인 결합을 통해 스스로 안정감을 얻는 관계지향적 속성을 지닌 탓에, 어떤 식으로 든 자기 존재의 불안감을 타인에 대한 친근함의 여지를 통해 해소하고자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신을 향한 종교적 갈망과 인간에 대한 관계적, 혹은 밀착형 욕구가 모두 친근함을 지향하는 공통적인 특성을 내포한다는 점입니다. 신적인 거룩함과 경건함을 향한 소위 성스러운 욕구와, 인간의 가장 초보적인 욕구인 성욕은 전혀 다른 것이면서도, 그 두가지 욕구의 만족과 해소 방안은 공통적으로 친근함의 회복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과 인간을 가까이 하는 것 사이에 아무런 구별이나 구분이 없는 것 같지만, 조심하지 않으면 인간적 친근함을 신적 친근함, 즉 경건함의 대용물인 것처럼 착각할 수 있습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막 9:50)는 예수님의 말씀은 신적인 친근함의 여지가 무분별한 인간적 접촉이나 친밀감에 의해 무마되거나 변질되지 않도록 하라는 충고입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먼저이며, 인간 편의 만족과 기쁨은 다만 은혜의 부산물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의 연합을 인간적 친밀감으로 대신하려는 마음의 미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그의 제자들의 내면세계에 적용될 때, 그 말씀은 믿음의 동기와 목적이 철저히 인간 중심적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경험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식의 신적인 친밀감을 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외심으로서 믿음의 도리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 자체에 대한 경험적이며 정서적인 차원의 만족의 기준과 함량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여부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증거가 아닌 비 성경적인 것을 갖고서 순전히 자기 위주의 증거나 표적을 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한 일의 위험성을 가리켜 성경은 우상숭배를 금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친근함을 경험하며 확신하는 일의 방법과 우선순위까지 우리 위주의 대안을 찾는 식의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다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식으로 하란 땅을 떠나 가나안에 이른 것처럼, 믿음의 증거와 만족을 순전히 하나님 편에서, 즉 그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복종의 차원에서 감당해야만 합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서 성도 간의 온갖 추하고 불의한 음행 죄를 범하면서도, 그것을 마치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같은 것으로 오해한 이유는 친근함에 대한 그릇되고 왜곡된 갈망 때문이었습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고전 2:15)는 식의 말씀에 대한 왜곡이 빚어낸 죄의식의 결여가 성도 간에 무슨 일을 해도 괜찮다는 식의 무분별한 관용주의와 심판과 경계가 없는 긍휼일변도의 무책임과 무능함을 일삼게 된 것입니다.

경계와 구분을 필요로 하지 않는 관계는 없습니다. 질서와 순종은 하나님께 대해서일 뿐, 인간관계에는 그와 같은 인위적 구별과 구분이 필요 없다는 식의 생각은 결국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자체의 거짓과 위선을 나타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전하고 정직한 두려움의 가치를 왜곡하는 불신앙적 마음가짐을 경계하십시오. 순수하지 않은 믿음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순수함을 미숙함이나 모자람으로 여기는 마음 자체가 불신앙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누룩의 효과가 밀가루 전체를 발효시키는 것처럼, 순수함의 반대는 불신앙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 모두에 있어서 진실함과 순수함의 여지를 빼고 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친하다는 이유로 서로의 경계와 질서를 허물며, 서로에게 해악과 불행을 강요하면서도 여전히 친근함을 내세우는 것은 피조물의 도리를 벗어나 창조주께 욕을 끼치는 것입니다. 믿음은 친근함이 아닙니다. 복종과 헌신, 그리고 희생입니다. 스스로 느끼기에 하나님께서 친근한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친하게 여겨야 합니다. 순수하고 깨끗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 “하나님께서 친근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시 24:3-4). 하나님께 대한 친근함의 의무까지도 자기중심적으로 왜곡하는 마음의 ‘누룩’을 항상 경계하십시오.

4월 27일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말 3:2)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모두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같이 뜨겁고 매서운 하나님의 진노와 무명 천의 표백을 위해 사용하는 독한 ‘양잿물’과 같이 쓰리고 아픈 인생의 시련과 연단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를 가까이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아무도 그를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결코 구원과 회복의 날이 없었을 것이며, 세상이 강요하는 온갖 불의하고 불안한 인생의 판단과 결정이 전부인줄로 여기면서, 보인 것 또는 느끼는 것만으로 삶이 전부인줄 알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진행방식이 나름대로 좋을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영원히 참되고 보람 있는 삶의 가치에 대해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며, 인간성의 타락이 빚어낸 온갖 상대적이며 주관적인 것을 진리로 여기면서 불안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조차도 미처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내뱉는 온갖 미신과 주의 주장들을 좇아가며 방황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말라기 선지자의 탄식과 같이, 주님의 대속의 공로가 아니었으면, 우리 중 아무도 하나님의 임하심을 감당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죄성의 한계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이 하나님을 대하여 마주 선다는 것이 그처럼 어렵고 힘든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힘든 삶의 여정을 편케 하고,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처럼, 표백하는 자의 잿물처럼 두렵고 공포스러운 하나님에 관한 생각을 벗어버릴 수 있게 만든 분이 바로 주님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누구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전 것은 모두 지나가고 새로운 것이 출현하여, 우리들 자신의 인생의 온갖 아픔과 시련까지도 순금의 연단을 위한 필연적인 제련과정으로 여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감사의 능력을 제공받습니다.

어린 시절 온갖 더러운 것을 몸에 묻히고도 몸뚱어리 전체를 깨끗이 씻으려는 어머니의 손길을 벗어나려고만 하던 철없는 행동 대신, 자원하여 온갖 더러운 떼를 씻는 자발적인 청결함과 거룩함의 열정이 생겨납니다.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삶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 인생 자체에 대하여 근본적인 의미와 목적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범죄한 인생이 거룩한 하나님을 대하여 서기 위해서는 매사에 금을 연단하는 것과 같은 고통과 시련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며, 양잿물로 희게 하는 것과 같은 양심의 청결함의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불이 삶의 ‘외부적인’ 조건을 위한 것이라면, 잿물은 우리의 양심, 즉 ‘내부적인’ 것의 정결을 가져오기 위한 것입니다.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이 자식을 반듯하게 키워내려는 ‘아버지’의 부성적인 사랑이라면, 잿물로 인한 희석과 표백은 자식에게 겉옷은 물론 늘 깨끗한 속옷을 입혀 주고자 하는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우리 각자가 온전한 사람이 되는 데에 그 두가지 모두 꼭 필요한 삶의 배려이며 은총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우리 인생의 온갖 쓰라린 것들을 대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그러한 마음자세와 깨달음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그가 바로 우리의 ‘대속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대함에 있어서 주저하거나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환경이나 삶의 외부적인 조건 때문에 겪는 아픔과 시련은 우리 모두가 순금처럼 귀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여러가지 마음의 아픔과 괴로움, 또는 생각의 혼돈스러움은 우리 내면이 눈처럼 깨끗하여 하나님의 생각을 알고 받아들이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청결한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믿음은 결코 아픔이 없는 삶이 아니며, 아픈데도 아프지만 않는, 도리어 아픔을 즐기고 감사하는 삶입니다. 그러한 방식의 마음의 깨달음과 거룩함이 성도의 영광이며 능력인데,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시기까지 하면서 그 일이 언제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가능하게끔 해준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매사에 순금처럼 귀하고, 흰 옷처럼 맑은 양심의 소유자가 되십시오. 그가 우리에게 그럴 만한 지식과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사 53:11). 샬롬!

4월 20일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시 동안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가 종노릇 하는 중에서 조금 소생하게 하셨나이다” (스 9:8)

신앙생활은 물론 우리의 삶 자체가 ‘은혜와 특권’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해결하는 과정의 연속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종종 한 편으로는 삶 자체가 모두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풀어 주신 은혜의 선물인 것 같아서 온통 감사하고 감격하다 가도, 다른 한 편으로 보면 사람들의 기준치에 전혀 못 미치는 것만 같아서 이내 곧 불만족과 불평에 빠지곤 합니다. 어디 까지를 은혜로 여기며, 얼마만큼 불평하며 살아야 하는 지 스스로 혼돈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마치 색안경을 끼는 것 같아서, 낮과 같이 환하 날에도 우울하고 비관적인 생각의 지배를 받다 보면 빛조차도 어둡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은혜는 피조물인 인생을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배려의 영역을 설명하는 것이고, 특권을 추구하는 것은 매사에 이기적이기만 한 자아의 활동의 산물입니다. 매사에 하나님을 대하는 마음가짐으로 살면, 삶 자체가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진 무상의 은혜의 선물처럼 여겨집니다.

반면에,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보면, 매사에 자기 몫의 특권을 타의에 의해 빼앗긴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당연한 ‘자의식’의 선언처럼 말씀하신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마 16:24)는 명령의 취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을 매개로 하여 얻어지는 영원한 생명의 가치가 온갖 현실적 판단 근거를 기준으로 하여 뭔가 초라하고 불평의 여지가 될 때마다 억울함이 아닌 황송함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의 본질적 특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 한 가지 만으로 인간은 다만 은혜의 황송함에 취할 자들입니다. 천분의 일 만큼이라도 특권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죄와 죄성이 강요하는 인간 존재 자체의 초라함과 부족함을 너머서는 자기 확신의 근거를 위해서일 뿐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로서 특권의식 마저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절실한 깨달음과 오직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황송한 마음가짐으로만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라는 에스라의 기도문은 유다 백성과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참된 특성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비유와 같습니다. 못 한개의 무게나 가치가 그 자체로는 하잘것없지만, 유능한 목수의 손에 의해 적재적소에 잘 박히고 나면, 건물의 골격이나 이음부를 지탱하는 엄청난 무게를 감당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못 하나의 용도와 관련하여, 대체 누구의 손에 붙들려서 어느 곳에 박히는지 여부가 중요하듯, 매사에 영구한 차원에서 우리 각자의 삶의 ‘고정 가치’를 정할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숙련된 목수가 건물의 지탱을 위해 필요한 못의 크기나 수량까지 모두 재어서 최대의 한도 내의 설정작업을 감행하듯,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각자의 궁극적 가치와 여력까지도 모두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바벨론 포로기 칠십 년의 세월을 지나 온 유다의 귀환객들의 입장에서 모진 망각의 세월을 뒤로 하고 예루살렘 고토로 돌아와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고 신앙생활의 부흥을 도모하게 된 처지를 생각할 때, 자신들을 성전의 못처럼 귀하게 여겨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삶의 전부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렇게 된 것을 특권처럼 여기면서, 유다 신정사회 내의 지도층에 속한 무리들 가운데 하나님의 계명보다 인간적 권리와 선택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순전히 은혜로 주어진 삶 자체의 기회를 마땅한 권리처럼 여기면서 매사를 자신들의 소원대로 하고자 한 것입니다.

에스라의 기도는 바벨론에서 종살이하던 자신들을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에 잘 박힌 못과 같은 존재들로 만들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며, 따라서 만일 그들에게 무엇 하나 자랑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백하고자 한 것입니다. 못의 가치와 용도는 다만 목수에 의해 적재적소에 잘 박히는 일 뿐입니다. 못의 모양을 포함하여 그 자체의 가치에 대하여 논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정해진 용도에 따라 주인의 의도대로 꼭 필요한 곳에 박혀 있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자신을 써주는 것만이 고마울 뿐이지요. 인생의 모든 처지마다 성도의 삶이 억울함이 아니라 황송함 이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평생 황송함을 추구하면서 사는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억울함에는 눈물과 슬픔이, 황송함에는 감사와 감격이 있을 뿐입니다. 샬롬!

4월 13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요 19:11)

권한 또는 권세란 명령이나 결정을 내리는 힘과 권리를 의미합니다. 아울러 자신이 내린 명령과 결정에 수반하는 모든 현실적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는 마음가짐과 능력까지 포함합니다. 매사에 뭔가를 명령하고 결심만 할 뿐, 그것에 수반하는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명령과 결심은 아무런 권한도 권세도 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말 장난 같지만, 힘과 권세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실체입니다. 겉으로 볼 때에는 꽤 ‘힘’ (power)이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권세’ (authority) 를 갖지 못하는 대상이나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과 권리를 내세울 뿐, 그것에 수반하는 현실적 책임을 다 하지 못할 경우, 그 힘과 권리의 무책임성과 무지함이 사람을 더욱 무능하고 무가치하게 만듭니다. 올바른 권세의 토대 위에서만 힘의 가치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세주로서 사명 이행을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강조하는 요한복음의 권위에 대한 특별한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내에 예수님의 권위가 철저히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구절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이 세상에 알리기 위해 오신 그의 ‘대리자’ 입니다 (1:18; 3:17, 32-34; 4:34; 5:24; 17:3-6).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보내어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도록’ 한 자이며 (3:34-35),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님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는 다만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토 듣고 배운 바를 ‘증거’할 뿐이라고 말하였습니다 (5:19-20; 8:26, 28, 38; 12:49-50; 14:24; 15:15; 17:7-8).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영생과 심판’을 제공할 수 있는 권한을 맡겼으며 (5:21-27), 친히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이끌었습니다 (6:37, 44, 65; 10:29; 17:2, 6, 24).

예수님 자신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근함’이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세와 힘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권세와 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뿌리를 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권세와 힘이 가장 잘 발휘된 예가 바로 인류를 위한 대속의 제물이 되기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기로 한 그의 결심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살기를 바라고, 끝까지 살아남기를 바라는 인간으로서 당연한 욕구와 충동을 무력화시키는 대속의 주님으로서 그의 결심이 바로 이 세상에서 가장 권세 있는 힘의 표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참된 생명, 즉 영생의 가치와 유익을 위해 죽음의 한계상황이 초래하는 인간적 두려움의 원천을 온전히 제압하였기 때문입니다. 로마인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한 말 –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요 19:10) – 이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참된 권세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스스로 살 수도 있고,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살인죄를 범한 사람들 대부분이 그 일을 실행에 옮기는 데에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확신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사람을 죽이고 해하는 일을 위해 그 정도의 확신을 필요로 한다면, 자신의 죽음을 통해 다른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결심에는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한 확신을 필요로 하기 마련입니다. 생명의 의지는 죽음과 파괴의 본능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 8:6);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 (호 13:14);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6-57).

예수님의 힘과 권세가 강한 이유는 그 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 모두를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하고 구원하사 살려 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권세와 힘의 정체는 단지 죽음을 전제하고 유발할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야만 구원과 용서, 사랑과 자비를 통하여 생명의 능력을 일으키고 주입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주님으로 믿는 믿음 안에서 참 생명의 능력, 즉 살리는 힘과 권세를 발휘하는 성도의 삶을 사십시오. 우선은 우리들 자신이 참으로 살아야만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정말로 그가 베푸시는 참 생명, 즉 영생의 약속 안에서 늘 ‘살아있는 자’가 되십시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듯이, 우리가 예수님의 것이 되어 그의 보내심을 받으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살려내는 힘과 권세를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매사에 권세 있고 힘있는 주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샬롬!

4월 6일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 (스 5:5)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호의에 힘입어 바벨론에서 칠십 년 간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귀환객들은 오자마자 성전건축의 대업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귀환 자체를 못마땅히 여겨온 ‘그 땅의 사람들,’ 즉 포로기 이전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거점으로 한 옛 이스라엘 사람들의 방해 공작에 놓이게 됩니다. 칠십 년 만에 다시 찾은 고국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고, 그에게 드리는 각종  제사예식의 회복을 통해 유다 민족의 진정한 영적 회복을 추구하였던 귀환객들은 자신들의 ‘순수한’ 종교적 열심이 다분히 정치적 저의를 내포한 불순한 모반과 같은 것으로 취급을 당하는 현실을 견뎌야 했습니다. 순수한 믿음의 동기로 시작한 성전 건축의 과업이 유대민족의 정치적 기반을 확립하기 위한 정략적 시도인 것처럼 왜곡되고 폄하되는 상황을 견뎌내야 했으며, 반대자들의 거짓 밀고에 설득된 페르시아의 후대 왕 아닥사스다는  조서를 내려 별도의 명이 있을 때까지 귀환객들의 건축 공사를 중단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후로 약 16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당시 유다의 선지자였던 학개와 스가랴를 통하여 이왕에 개시한 성전 건축의 괴업을 재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학 1:4);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슥 1:16). 성전 건축을 방해하고 그들의 선한 동기를 음해하여 공사가 진행되지 못하게끔 하는 현실적 여건은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전을 황폐한 가운데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선지자들의 강한 질책을 받아들인 백성의 지도자들에 의해 공사가 재개되고, 아울러 그 일을 방해하는 세력들의 물리적 저지가 뒤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전과 다른 것은 백성의 장로들, 즉 지도자들의 마음가짐이 강화되어, 공사를 중단하라는 위협을 받으면서도, 페르시아 왕의 중지 명령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과정 내내 계속 공사를 감행하는 투지와 집념을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그러한 유다 장로들의 마음가짐의 이면에는 선지자들의 강한 메시지와 함께 현실적 도움이 수반되었습니다 –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스 5:1).

귀환객들이 처음 공사를 시작하던 당시만 하더라도 페르시아의 초대 왕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제국의 관할 하에 있던 모든 영토들에 대한 종교융화 정책에 힘입어,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물품까지도 황궁에서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제 질서의 변화와 함께 페르시아 왕조 내의 지배체제가 변하고, 더 이상 유다의 귀환객들에 대한 페르시아 정부의 조직적인 차원의 협력의 여지들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롯이 그들 자신의 의지와 역량으로 성전 건축의 대업을 이어가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황실의 비호가 없는 상황에서, 귀환객들은 다만 그들 가운데 활동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들’ (스 5:2)의 메시지를 의지하게 되었고, 그 결과 페르시아 황제의 도움이 아닌 그들의 신 여호와 하나님의 돌보심을 힘입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의지를 보일 때에 비로소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동일한 성경말씀이라도, 성도가 그 말씀의 교훈 앞에서 스스로 간직한 내면의 진실함과 간절함에 따라서 그 말씀의 감동과 감화의 위력이 다르기 마련입니다. 귀환객들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성전을 짓기 위해서 그가 주시는 생생한 믿음의 감동과 삶의 원동력을 경험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단 성전을 건축하는 경우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사실성과 능력을 경험하는 일 없이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한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유다의 귀환객들의 경우, 하나님의 거처를 마련하는 일은 다만 그의 말씀의 감동과 감화, 혹은 거룩한 흥분을 경험하는 토대 위에서 비로소 가능하였습니다 –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 (학 1:14). 매일매일 성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져다 주는 ‘거룩한 흥분’을 경험하십시오. 진리에 의한 마음의 움직임만이 인간의 죄성이 지배하는 세상의 온갖 풍조를 이길 수 있습니다. 반대와 박해를 경험하면서도, 성도의 몫이라고 여겨지는 일들을 여전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이 되는 것이 바로 진리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항상 진리대로 살며 실천하는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샬롬!

3월 30일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 24:39)

나님은 정말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실제 몸을 가진 형태로 나타난 사건은 예수님 당시 유행하였던 모든 유형의 영지주의적 주장과 가현설의 근본을 허무는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결코 ‘해체된 영’ (a disembodied spirit), 즉 ‘귀신’ (a ghost)이 아니며, ‘좀비’처럼 시체가 소생하거나 (a resuscitated corpse), 유령과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진짜 사람 (a real man)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몸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몸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그의 부활에 관하여 믿고 증거할 때, 그가 다분히 영적인 존재이거나 신화속의 인물과 같은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위한 그의 고통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몸이 부활 후에도 여전히 우리를 위한 대속의 수단이며 증거라는 뜻입니다.

그는 여전히 우리 모두를 위한 사랑의 화신입니다. 부활의 영광을 덧입은 ‘영원하신 그리스도’가 고난의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나사렛 예수’와 동일한 분이라는 사실은 교리적은 근거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에 대속의 죽음을 담당하신 나사렛 예수는 과거에 속한 분이며, 지금 그의 제자들이 따르는 부활의 영광을 덧입은 영원하신 그리스도는 별도의 존재라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일관성은 없어지고 맙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분과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신 그분이 다른 분이라면,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고통 없이, 십자가 없이, 또는 이 세상의 삶의 모든 문제에 상관없이, 그저 영적인 그리스도만을 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십자가에 달린 나사렛 예수의 죽음에 대해 부정적이며 비관적이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가리켜 불필요한 고난의 연속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면서, 그 때의 ‘아픈 기억’에 대해서 아주 잊어버리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몸과 마음의 아픔을 참아 견디지 못하는 ‘추상적인’ 제자도에 대한 ‘경고’입니다. 모든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가치와 이상을 구현하는 데 수반되는 현실적 고난과 아픔을 결코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는 지극히 정당한 이유입니다. 부활이 의미하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지위는 반드시 ‘나사렛 예수’의 고난의 십자가를 통한 대속의 죽음을 매개로 하여 얻어진 것입니다. 그 둘 사이의 철저한 일관성과 지속성이 바로 참된 믿음의 능력이며 가치입니다. 그 반대로, 그 둘 사이의 이질감과 분열 또는 분리는 모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탄의 계략이며, 성도의 넘어짐과 실패의 원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의 삶과 죽으심에 대한 기억이 없이는 그의 부활에 관한 성경의 증언에 대하여 이해할 수도, 증거할 수도 없습니다. 신, 구약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일관된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심지어 모세오경의 주된 내용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기준이 되는 분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입니다 –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1). 정말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것을 제외하고 구약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성경말씀에 대한 건강한 기독교적 해석학은 반드시 그리스도 중심의 관점을 유지하기 마련입니다. 누가복음을 비롯한 신약의 복음서 대부분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의 재림의 약속을 기다리는 ‘중간 기’ 동안의 성도의 삶의 바른 태도와 믿음의 원리를 교훈 할 목적으로 쓰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이교도들에 의한 현실적 박해를 몸소 겪으면서, 과연 자신들이 겪는 고통과 고난의 현실성이 충분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 많은 회의와 갈등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이 남긴 그의 말씀 –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은 십자가의 고난이 필경 영광의 수단이며 증거라는 믿음을 갖게 하였을 것입니다. 고난의 죽음을 당하신 나사렛 예수가 그 모습 그대로 영광의 그리스도가 된 사실로 인해, 무엇이든 주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현실적 고난과 고통이 결국 자신들의 영광을 보장한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결코 부활이 없는 것처럼, 믿음을 매개로 하는 모든 현실적 고난에는 반드시 하나님 편의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고난과 영광, 또는 현실과 영원 사이의 마음이 일관성이 있어야만 진정한 그리스도인 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사실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일관성을 시험하는 것이 바로 죽음과 같은 고난이며, 그 일관성을 참아내는 사람들이 차지하게 될 영광이 곧 부활이며 내세의 영광입니다. 부활의 영광을 도모하는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보이는 것은 잠간이지만, 보이지 않는 그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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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3일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눅 23:9)


수님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나사렛 예수의 죄목을 로마 황제의 영을 거역한 것으로 매도하여 그에게 살인죄에 해당하는 정치적 반역 죄를 씌우기 위해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그가 민란을 부추기고 로마 정부에 대한 납세 의무를 폐지하도록 선동한 인물이라고 고소합니다. 빌라도의 판결에 따라서 나사렛 예수를 로마 황제의 권력을 위협하는 정치적 위험인물로 간주하여, 유대 종교지도자들 스스로 자신들의 손에 직접 피를 묻히는 일 없이 로마법에 의해 처형을 당하게끔 꾀한 것입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선동을 따르는 무리들 만큼이나, 나사렛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로마의 지배 하에 있던 지방 부족들 간의 세력 다툼이나 종교적인 문제에 개입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황제의 훈시를 따라, 나사렛 예수의 죄목을 사형 죄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최종 판결의 책임을 오히려 당시 예루살렘에 와있던 유대 지방의 수령인 분봉 왕 헤롯에게 떠넘기고자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다분히 형식적인 심문 절차를 이행하는 차원에서 나사렛 예수에게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고, 예수님은 그 물음에 대해 “네 말이 옳도다” 라고 분명한 어조로 대답합니다.

자신의 왕권이 결코 로마 황제의 세속 권력을 탐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종교적인 차원의 유대민족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밝힌 것입니다. 황제의 권한을 넘보기 위한 것이 아닌 이상, 나사렛 예수에 대한 고소 건을 자신이 책임지지 않을 생각으로 그를 당시 유대 지역의 분봉 왕인 헤롯에게 보내어 제차 심문을 받게끔 하였습니다. 헤롯 역시 나사렛 예수의 궁극적 관심이 정치적인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로 대표되는 참된 종교성의 회복에 있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단지 나사렛 예수에게서 희한한 이적을 행하는 모습을 보고싶었던 터라 여러 말로 그를 희롱하고 자극하여 뭔가 굉장한 볼거리를 제공하도록 하였습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갖 희롱을 묵묵히 감당하였습니다.

빌라도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단호한 대답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결코 세상적인 권력과 지위를 탐하는 데에 있지 않음을 보여 주는데 비해, 헤롯의 물음에 대한 그의 ‘이유 있는’ 침묵은 그 목적의 왜곡과 혼돈을 방지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구원의 진리 대신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온갖 이적을 구하는 것은 결국 그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선지자가 아닌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일시적인 위로와 위안의 제공자로 여기려는 처사입니다. 눈에 잘 띄지도 않으며, 메시지의 내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조차 쉽지 않은 까다롭고 피상적인 진리에 관한 논의보다, 당장에 호기심을 채우고 감각적으로 즐길 수 있는 가시적인 증거만을 구한 것입니다.  헤롯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침묵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며, 분명한 이유와 목적을 띤 행위였습니다. ‘성도’라면 믿음의 내용인 진리를 구하는 방법과 과정이 또한 참되고 거룩해야 합니다. ‘성육신’의 구원의 진리가 반영하듯, 기독교의 진리는 믿음의 ‘실천’을 전제로 하는 통전적이며, 전인격적인 것입니다. 단지 논리적 일치가 문제가 아니라, 전인격적 실천과 그로인한 삶의 변화가 진리의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진리에 합당한 삶의 내용이 없이는 진리의 명제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뭔가 그릇된 방식을 통해 얻어지는 것은 결코 진리가 아닙니다. 올바른 믿음의 동기를 통하여 참된 믿음의 열매를 얻고자 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몸소 행하심으로써 보인 진리의 내용이며 특성입니다. 단지 호기심을 충족할 목적으로 이적을 청하는 헤롯에 대한 침묵은 주님 자신만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삶의 원리와 같습니다. 사람의 말은 결코 내뱉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한번 뱉은 말을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말은 무겁고 효력이 큽니다. 그러기에 가벼운 입 놀림 대신에 의도적인 침묵으로 표현하는 말 역시 그 무게와 파장이 큰 법입니다. 말을 많이 해야만 자신의 뜻이 전달될 것이라는 착각 대신에, 피차 하나님의 다스림과 개입의 필연성을 전제로 침묵을 통하여 더 무겁고 영향력 있는 의사전달의 방법을 택하십시오. 겉으로 내뱉은 말보다 먼저 다가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며, 그 속에 담긴 참되고 진실한 믿음의 능력입니다.

말이 달라서 마음이 통하지 않는 경우보다, 애초에 마음이 먼 탓에 생각이 다르고, 말이 달라지는 법입니다. 피차 하나님과 소통함이 먼저입니다 –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 139:2-4). 침묵은 내 말 대신,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한 의사소통의 매개물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말보다 침묵에 익숙하여, 우리의 말 대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하는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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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6일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눅 21:28)


약 성경에 자주 언급된 세상의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약속은 그로 말미암은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진행 과정의 완성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시작된 온 세상에 대한 선악 간, 또는 의와 불의함 간의 심판까지 포함하여 세상의 원 주인이신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 즉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라는 구원계획이 성취되는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그의 구원의 초청을 끝까지 거절한 사람들에게는 공의의 심판이 있을 것이지만 믿고, 일단 회개한 자들에게는 그토록 원했던 구원의 소망과 염원의 성취를 경험하는 순간이 바로 종말에 있을 새로운 일들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완성이 원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 나라에 속한 자들의 삶 속에서는 더욱 절실할 것입니다. 예수님 생전 까지만 해도 구세주인 예수님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으로 와야 할 정도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스라엘 민족 중심으로 펼쳐진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재림의 약속 이후로는 더이상 이스라엘 중심이 아닌 순전히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시로 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열방을 하나님께로 이끌기 위한 계획의 실현을 위해 이스라엘 민족의 위주의 진행과정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이후에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삶과 증언을 통해 구원의 약속과 그것의 진행과정이 가능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약속을 통하여 모든 시대와 여건의 차이를 넘어서 참되고 진실하게 믿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차별 없는 구원의 약속을 제공하는 분입니다. 어떤 이유에서 건 간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구원의 능력과 은혜를 힘 입는 데 있어서 모자람과 연약함을 느꼈던 여지들이 전부 해소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 믿는 자의 삶 속에서 역사의 종말은 믿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이루어질 것인데, 그리스도의 재림의 궁극적 목적이 바로 이스라엘과 비 이스라엘 간의 분리와 분열의 취지를 모두 떨쳐 버리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의 의지를 간직하면서 사는 자들에게는 개인적으로나 우주적으로 할 것 없이 인생의 종말이 그만큼 희망적이며 건설적입니다.

모든 현실적 장애 요인이나 한계를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선한 의지를 갖는 것에 대한 가장 완성된 형태로의 보상이 주어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 마지막 날의 징조가 보이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온 세상에 대한 공의의 형벌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불안하거나 외로운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날은 단지 참으로 믿는 자들을 위한 구원의 날, ‘속량 의 날’일 뿐입니다. 그 날은 도리어 하나님 편의 전혀 뜻밖의 형태의 구원의 역사가 펼쳐지는 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더욱 가까워지는 날입니다. 성도라면 말세지말을 당할수록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열기가 더해지고, 전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그의 구원의 의지와 열심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시간적으로 만 아니라 심정적으로도 뭔가 끝이라고 여겨지는 상황이 닥쳐 올수록 더욱 ‘위로 하늘을 향해 머리를 쳐들고’ 그의 구원의 약속을 기리며, 그 구원의 긴박성을 인해 감사하며 감격하는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의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유형의 삶의 종말은 다만 그의 구원의 능력과 기회를 간구하는 순간입니다. 유한한 피조물로서 삶의 조건은 같지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삶의 질적인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종말 또는 삶의 한계 상황을 맞는 마음 자세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 이건 간에 종말은 성도가 하나님을 향하여 머리를 쳐든 순간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 121:1-2). 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매사에 믿음 안에서 참된 유종의 미를 간직하는 삶의 주인공들이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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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눅 20:2)


전과 자기 육체를 동일시하신 예수님께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한 주간 동안에 하신 대표적인 일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성전을 청결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눅 19:45, 46). 성전을 가리켜 ‘내 집’이라고 칭하면서 그곳을 청결케 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그렇게 까지 하는 이유와 그 일의 정당성의 근거가 되는 권위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직접적인 대답 대신에, 세례 요한이 하나님 편의 죄사함의 약속을 목적으로 베푼 세례의 기원이 하늘로부터 온 것인지, 사람에게서 주어진 것인지에 관하여 되물었습니다. 당연히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전제로 하여, 유대 종교 지도자들 스스로 세례 요한의 세례의 의미를 축소하고 부인한 결과 결국 그를 죽게 만든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 있음을 떠올리도록 한 것입니다.

유대 신정사회에서 로마의 정치권력을 배후로 삼고 온갖 현실적 기득권을 누리던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당시 유대 백성 대부분이 세례 요한에게서 발견한 것과 같은 ‘하늘로부터’ 의 참된 권위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현실적 기대와 염원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참된 신망과 경외심을 제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인정하라는 의도 하의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그들이 겨우 할 수 있는 대답은 “…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7절) 였습니다. 참되고 거룩한 신적 권위의 기원에 관한한 대제사장과 유대 종교지도자들 대부분이 문외한이었던 것입니다. ‘권위’라는 말의 원어의 의미는 ‘위임 받은 힘’ (delegated power)을 가리킵니다.

지음 받은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게는 결코 ‘원천적인’ 차원의 힘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인생은 너나할 것 없이 참된 힘의 원천을 하나님께 두고 사는 존재임을 알라는 뜻에서 입니다. 모든 유형의 인간의 힘과 권위는 상대적이며 한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일관된 힘의 원천은 다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의 능력을 의지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권위를 누릴 수 있는 대상이 지극히 제한적일 것이라는 우리 자신의 착각에 있습니다. 은사, 또는 ‘카리스마’로 불리는 타고난 재능이나 소질이 특별한 몇몇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비범한 차원의 것이라는 착각을 뜻합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권위의 특성에 대하여 질문한 의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을 특별한 사람으로 간주하여, 그에게만 예외적인 힘의 원천이 작용할 것이라는 식의 편견에 그들 자신을 가두고자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자신의 권위의 기원에 관한 대답 대신에 요한의 세례에 관하여 그들에게 물은 것은 모든 권위의 원천이 하나님 자신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함 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약속과 영원한 생명의 증거를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인격적인 믿음을 매개로 하여 누구나 얻고 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적인 권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조차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위해 ‘보내심 받은 자’로서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순종과 결심을 통하여 죽음의 한계상황을 능가하는 권위를 부여 받았습니다. 한 마디로 주님 자신의 권위가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나 하나님께 대한 참되고 신실한 믿음을 매개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위로부터’의 권위의 특성입니다. 그같은 권위 자체의 ‘보편성’을 배제하고, 마치 특별한 몇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천부적인 은사나 자질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는 불신앙과 무책임한 마음의 동기를 반영할 뿐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영적 신분 상의 변화와 관련하여,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12, 13)고 말합니다.

누구든 제약없이,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 됨의 권세를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은사와 권위를 제한적인 것으로 간주하려는 마음의 미혹을 경계하십시오. 특별한 지식과 경륜과 같은 것을 내세우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위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비겁 자’의 선택과도 같습니다. 아무리 힘겨운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주님의 뜻이면 감당하여, 마침내 가능케 할 것이라는 순종적이며 진취적인 자세야 말로 참으로 권위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소아시아 지역의 일곱 교회 중 가난 규모가 적고 환경이 열악하였던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권고의 말씀처럼 –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계 3:8) – 능력과 권위는 의지와 결심에 따라 더해지고 강하여 지기 마련입니다. 믿는 누구에게나 주님께서 직접 더하여 주는 것이 성도로서 권위의 원천 임을 알아서 매사에 권위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누리십시오. 알고, 믿고, 누리는 만큼 더해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권위입니다. 매사에 권위있는 성도가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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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8:14)


교생활을 신적인 호의를 힘입기 위한 인간적 공로와 의를 쌓는 행위로 이해하는 태도를 가리켜 ‘자력종교’ 라고 부르며, 인간적 공로와 의가 아닌 하나님의 뜻과 성품에 대한 믿음 또는 깨달음을 종교행위로 이해하는 태도를 ‘타력종교’ 라고 부릅니다. 자력 종교라 함은 결국 자기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종교생활의 궁극적 목표인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며, 타력종교란 내 힘이 아닌 절대자, 즉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자력 종교이건 타력 종교이건 간에, 신적인 호의를 힘입기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기도의 필연성을 전제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인간의 의지와 공로를 앞세우는 자력종교의 경우 기도는 인간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얼마나 많이, 그리고 온전히 행하였는가에 대한 관심의 표현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며, 잘 하고 넘치는 면들에 대한 감사와 인정, 또는 그렇지 못하 다른 사람들의 종교행위에 대한 비판, 내지는 자기 자신의 우월감에 대한 만족과 성취감이 주를 이루기 마련입니다. 자기 자신의 절실한 필요를 채우고자 하는 갈망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적 차원의 만족감과, 기념, 또는 축하가 대부분입니다. 이에 비해, 종교생활의 근본을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서 찾고자 하는 사람의 경우, 기도는 매번 자기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의 과정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자체가 무조건적 은혜를 매개로 하는 까닭에, 적당한 선에서의 만족과 안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종교생활 자체의 비교와 비판의 대상이 하나님인 까닭에, 나름대로 큰 공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경우에도, 늘 자기 스스로를 향하여 부족감과 미완성으로 인한 아쉬움과 열심을 지닐 뿐입니다. 자기 스스로 의롭거나 완전하다고 여기는 대신, 완전 그 자체인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채근과 부인이 있을 뿐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빌 3:12)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면서, 기도를 가장한 자기만족과 우월감을 뽐내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달리,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13절) 라고 고하는 세리의 기도에는 하나님 편의 의로움, 즉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인정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리의 기도를 들어 주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인정하는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며, 기도응답의 여부가 말이나 공로보다, 기도하는 사람 자신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정상화에 달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기도생활과 관련하여 항상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의로운 마음가짐과 생활방식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단지 ‘말’ 로서 하나님을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기도하는 사람의 중심을 살펴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먼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 전까지는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적 인 마음의 동기에서 비롯된 헛되고 무익한 생각의 미혹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의 기본기는 기도이며, 기도의 근본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하나님과의 교재의 기쁨에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난 것이 아니면 기도가 아닙니다.  불의하거나 불성실한 기도, 혹은 참되지 않은 기도와 같은 것은 아예 없습니다.  모든 기도는 성도의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에 관심이 있지 않고, 우리의 마음가짐, 즉 진심으로 그를 경외하고 그에게 자신의 전부를 드리고자 하는 정직한 마음의 교제를 기뻐합니다.  기도하는 행위 자체에 무슨 신비한 마력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기도가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진심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기도의 참된 능력은 우리들 각자의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연결에서 비롯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된 그의 삶이 능력을 발휘합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만큼만 기도할 수 있으며, 꼭 그만큼의 기도응답이 허용될 뿐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의 세리라 할지라도, 각자의 속내의 진실함을 토대로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의 진실한 속 사정에 대해 일일이 가장 귀한 것으로 응답을 허락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진실하고 의로운 기도로 하나님 편의 의롭게 하시는 변화의 능력을 체험하는 삶의 주인공들이 되십시오. 설혹 불의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참되고 진실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의롭게 만들어 주시는 기도의 참된 능력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된 기도로 능히 불의한 삶의 처지를 바꾸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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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3일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눅 15:4)


마리의 양 중에 잃은 양, 한 마리의 가치는 물량적인 대비효과를 초월한 것입니다.  ‘백’ 이라는 수자의 많음과 ‘하나’ 라는 숫자의 적음이 서로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 관계성을 의미합니다.  많고 적은 것의 차이는 매사에 한계상황을 전제로 하는 인간적 판단기준에 따른 것인데 비해, 전부와 하나, 혹은 ‘전체로서 하나’ 식의 구분은 무한대의 영역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속성이며 판단 기준입니다.  하나의 개체를 통해 전체를 파악하며, 전체를 보면서도 여전히 하나의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라는 말에는 아흔아홉도, 또는 하나도 모두 ‘전체’ 로서 가치를 지닐 뿐이라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마리 잃은 양의 가치가 특별해서만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백 마리 양이 모두 하나의 전체로서 보호받고 유지 되어야 하기에, 겨우 한 마리를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가치가 아흔 아홉 마리와 똑같이 여겨졌을 뿐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입장에서 보면 주인이 자신들 중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헤매는 동안 막상 자신들은 목자 없는 양 떼의 처지에 속하는 현실이 괴로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흔 아홉’ 에 해당한 자신들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가치를 동일하게 여기는 주인의 의도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것은 변화 받은 자가 사랑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이 강조하는 회개의 가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이미 종교인의 반열에 속한 자들, 즉 ‘의인의 회개’의 필요성을 교훈하기 위한 것입니다.  죄인의 회개를 가능케 하는 열쇠가 바로 의인의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만큼은 이 땅위에서 사람들이 임의로 구분해 놓는 식의 의인과 죄인의 배열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고백할 때 죄인의 회개가 가능한 삶의 자리가 마련됩니다.  바로 그 때가 하나님 스스로 그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며, 그러한 삶의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법입니다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 15:10). 양 백 마리 중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경우도 그렇고, 열 드라크마 중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주인이 끝까지 ‘찾는다’는 말이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그만큼 전체성 혹은 공동체성이 포기할 수 없는 가치라는 뜻입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사용하는 말 중에 상대 정치 집단을 매도하기 위한 ‘적폐’ (abstraction) 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사물의 속성 자체를 없이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상대편을 적폐시하고 나면 결국 자기 스스로 비교의 대상이 없어지면서, 결국 자멸하고 맙니다.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를 찾고 난 이후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함께 즐기기를 청하는 주인의 즐거움은 공동체적 차원의 기쁨, 즉 처음 그대로 전체의 모습이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렸던 하나를 위한 수고가 곧 나머지 모두를 위한 것이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로 인한 즐거움이 전체를 위한 것과 같은 식으로 여겨질 때, 비로소 자신이 가진 어느 것 하나도 잃어서는 안 되는, 저마다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회개 란  내 보기에 ‘죄인과 세리’ 같은 사람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때, 모두가 더불어 함께 즐거워 하는 식의 종말론적 삶의 회복과 즐거움이 가능합니다.  우리들 각자의 회개를 통해 서로를 위한 천국의 문, 즉 구원의 문을 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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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6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눅 12:51)


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 주기까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 상호 간의 일치와 화해를 이룰 목적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친히 이 땅에 오신 이유가 평화가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기 위함이라고 말씀하는 이유는 그만큼 믿는 우리들 자신에 대한 이해가 정직해야 한다는 뜻에서 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올바른 믿음의 가치 구현을 위해서는 부모 자녀 간에, 혹은 형제 자매 간에 얼마든지 싸워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분쟁을 각오할 정도로 내면의 아픔과 수고의 대가를 지불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필수적이라는 뜻입니다. ‘분쟁’이라는 말 자체가 폭력적 수단을 동반하는 표면적 싸움보다는 내면의 불일치와 관계의 단절로 인한 심정적 ‘아픔과 괴로움’의 요소들을 지적합니다 (breaking up, discord). 서로 완전히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 무력과 폭력을 정당 시 하는 싸움은 오히려 쉬울 수 있습니다. 원래의 좋았던 관계의 회복을 위한 의무감이나 안타까움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는 사이임을 전제할 때,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마음에서 비롯된 관계의 회복과 개선을 위한 의지와 열심이 더할수록, 그만큼 마음의 아픔과 분쟁을 겪기 마련입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49절)라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얼른 이해하기 어렵지만, 주님은 결코 ‘불’이 초래하는 파괴와 소멸을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부모 자녀 간의 불화와 분쟁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자신의 역할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경고가 오히려 주님 자신의 의도와 목적의 선함을 드러내 줍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는 일 자체만으로 인간의 삶의 ‘현실적’ 평화와 번영을 보장하지 못하며,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이 벌어질 것임에도 불구하고, 복음 자체의 선함과 유익함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매사에 스스로가 타지 않으면 도저히 불을 일으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주님 자신이 그 불의 촉매제가 되어 발화하고자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불’의 유익을 끝까지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불의 소멸성이 갖는 의미는 이중적입니다. 태워 없애 버리는 것은 파괴적이지만, 소멸을 통해 얻는 새로운 에너지와 정열은 또 다른 형태의 건설적 창조, 즉 재창조의 원천이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싸워야 할 믿음의 선한 싸움은 결코 폭력적 싸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자기 내면의 ‘분쟁’과 불화를 이겨 내기 위함 입니다. 소멸과 파괴를 목적으로 불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불을 잘 다스려 서로에게 유익한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함 입니다.

불을 적절히 잘 다루는 기술이 없어서 때로는 여기저기 크게 화상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숙해도, 그 불을 다루는 자의 마음가짐이 선한 이상, 그것이 결코 모두를 불행하게 하거나, 완전한 파멸을 초래하는 도구가 되지는 않습니다. 애당초 그 불을 제공한 하나님의 의도 자체가 선하고,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와 자비, 그리고 능력을 제공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불과 같은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되, 그 불이 결코 자기 자신만을 이롭게 하거나, 그 불로 인한 소멸의  과정이 스스로가 원하는 방식대로만 되어질 것이라는 착각을 버리십시오. 때로는 우리 자신이 다 타야만 그 불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 자신의 경우처럼, 우리들 자신이 불의 촉매, 즉 불쏘시개와 땔감이 되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왜 타지 않느냐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9:29)는 말씀의 대상이 언제든 우리들 자신입니다. 그러면, 모세처럼,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서 없어지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로의 부르심과 그 소명에 따른 삶의 능력을 나타내는 신적인 정렬과 에너지의 원천을 내포하는 참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마음의 불로 스스로 온갖 분쟁과 불화를 이기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매사에 자기 자신을 이긴 사람이 정말로 강한 사람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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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9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눅 11:28)

수님께서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다시 말하게 한 일은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모든 유형의 억눌 림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베푸는 메시아, 즉 구세주로서 당연한 활동이었습니다.  말은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실체에 대한 ‘대상화’를 가능케 해 줍니다. 귀신의 정체를 가리켜 성경이 “말 못하게 하는 귀신” (눅 11:14) 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이 활동 자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대상화를 어렵게 함으로써 불필요한 고통과 두려움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의사소통을 어렵게 함으로써 자기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점점 더 빠져들도록 하는 것이 귀신, 즉 ‘악한 영’ (a demon, an evil spirit)의 특성입니다. 반면에,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그의 말씀을 매개로 하여 피조물인 인간과 끊임없이 친근한 대화를 갖게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 더 잘 알아서 그가 인생에게 베푸시는 온갖 자비와 긍휼의 역사를 힘입게 만듭니다. 그에 비해 악한 영들은 스스로의 정체를 숨기면서, 자신들이 마치 정상적인 언어의 영역을 초월하여 있는 존재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사람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신기한 영역에 속한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여 괜한 두려움과 공포를 갖게 만듭니다.  말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또한 믿음을 수반한 성도의 진실한 신앙고백의 말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사람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구원의 여지를 삼을 수 있습니다.  말못하는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어서 다시금 말하게 한 주님의 행동을 귀신의 장난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예수님은 말의 회복을 경험한 자의 삶 속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 말씀합니다 –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0절).

그것은 말이 갖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같은 의미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피조물인 인간을 자신과의 대화의 상대로 여겨 주신 것은 그만큼 인생의 가치를 존중히 여기신 까닭입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말을 들으시고 그에 대해 일일이 반응하실 정도로 인간의 지위를 높여준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말을 내뱉는 순간, 그의 삶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영역에 속한 것이 됩니다.  사람마다 말을 통해 그 말이 내포하는 의미체계와 세계관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하나님의 말씀,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그 말씀에 합당한 방식의 삶의 실천이 수반될 때 우리는 우리의 말이 회복되며,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경험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킴으로써 말의 회복을 경험하십시오. 성도 된 우리들 각자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여 우리의 말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반영할 때, 뭔가 알 수 없고, 또한 알지도 못하는 삶의 실재들로 인한 불안한 마음이나 걱정으로부터 우리들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불의한 말, 거짓 말, 근거 없는 소문이나 온갖 인신공격적 비평과 비난 등, 죄성의 지배를 받는 인간 상호 간의 말로 인한 피해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비결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그 거룩한 약속의 말씀에 붙들리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아예 말을 못하게끔 하는 기막힌 현실에 처해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의 말씀을 통하여 참된 자유와 해방에 이르는 길을 찾게 됩니다. 성도는 인생 자체의 불안함과 불편함을 다만 거룩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를 내포한 그의 말씀으로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말씀의 유익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 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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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5일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히매” (눅 1:60)


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의 역사관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전 역사가 율법과 예언의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그리고 교회의 시대로 삼구분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해서 율법과 예언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온전히 성취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복음의 약속을 갖고서 실패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교회’가 온 세상을 구원하는 전도의 사명을 감당케 된 것입니다. 그러한 삼중의 구원 역사의 진행과정 속에서 세례 요한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의 시대에 속한 최후의 인물로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를 연 자이며, 장차 교회의 시대의 사명과 책임을 보여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구자’로 와서 그를 당시 유대 사람들에게 직접 소개하는 방식으로 구약과 신약의 가교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마 11:13). 세례 요한의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역할과 사명은 구약의 여러 군데에 예언되었으며 (사 40:3; 말 3:1), 그 사명을 다하다가 순교를 당함으로써 죽기까지 충성하는 교회와 성도의 본을 보였습니다 (마 14:3-12;계 2:10).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여인이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라고 칭하면서 (마 11:11),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진행과정 속에서 요한의 지위와 역할이 얼마나 큰 것인 지를 지적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성도의 성도다움과 교회의 교회다움에 대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어머니가 그의 이름을 ‘주께서 긍휼히 여기신다’는 뜻의 ‘요한’이라고 정한 것은, 자신이 늙어 임신하지 못하는 처지에서 벗어나도록 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찬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눅 1:36).

이는 결국 세례 요한이 그 길을 예비할 자로 보내심을 받은 주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긍휼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세례 요한의 삶과 죽음은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긍휼의 표현이라는 말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제사장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대 신정사회에서 추구할 수 있는 일체의 기득권을 내어버리고, 헤롯왕의 농간에 의한 순교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그의 삶은 죄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주제로 한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삶을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성도의 삶의 최고의 능력과 특권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힘입는 것입니다.

율법과 예언이 복음으로 성취되는 과정의 필수 요소가 바로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에 대한 믿음이며 실천입니다. 구원자 ‘예수’의 이름이 전파되기 전에 반드시 세례자 ‘요한’의 이름이 먼저 거명되도록 한 것이 어쩌면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의 진행과정의 필연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출생 과정에 내포된 하나님의 기적적인 일들에 대하여 들은 사람들이 모두 그에 관하여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한다고 여긴 것처럼,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의 삶에는 언제든 하나님의 ‘손’이 작용하기 마련입니다 (눅 1:66). 주님의 의를 이룩하기 위해 순교의 각오를 무릅쓰는 일까지도, 그분의 손이 우리에게 닿는 한 얼마든지 가능한 삶의 실재일 수 있습니다. 새해 벽두에 여러가지 구할 것이 많은 중에, 다른 무엇보다도 세례 요한의 이름의 뜻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따라, 어디든지 그의 손길이 함께 하여,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한 큰 일을 감당하는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남자들의 경우 지난 백년 간에 걸쳐 영어식 이름 중에 가장 흔한 이름 세 가지가 바로 James, Robert, 그리고 John 일 정도로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인간적 소원이 절실합니다. 남녀 모두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고 광야와 같은 세상 한 복판에서 주님의 길을 예비할 자로서 참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