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삶 ‘2021’

11월 17일

“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 (욥 27:6)

계 자원기구에 따르면 25만 종의 바이오 자원 중에 50% 이상이 제 3세계 국가에 분포되어 있는데, 선진국의 의약업체들이 채집 권 및 계발 권을 독점하므로 써, 외국 기업들이 자국 정부로부터 헐 값에 사들인 바이오 자원을 갖고서 엄청난 이윤을 남기는 현상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바이오 자원 특허권에 반대하는 여러 단체들의 주장은 단지 경제 논리 때문만은 아닙니다. 바이오 자원의 서식지에 사는 원시 부족들의 피와 머리카락, 침까지 DNA채취에 이용 당하는 현실 여건 속에서 제 3세계 국가들마다 유전자 체계 내의 손상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특정 지역에서만 재배되는 식물이나 연소의 천연 효과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그러한 ‘천연 효과’를 더 이상 누리지 못하게 될 경우, 면역체계에 심각한 손상이 오기 마련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태생지의 천연 환경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바이오 자원의 손실로 인한 피해는 그 지역 주민들의 삶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 같은 일들이 의약품을 매개로 하는 신체 생활에 있어서 만 아닙니다. 사람의 영적 생명을 유지하는 일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마다 정신 건강의 제 1요소라고 할 수 있는 의로움, 즉 ‘공의’ (righteousness)의 체계에 있어서 손상을 입게 되면 삶의 저변에 전반적인 오류가 초래됩니다. 

공의란 만물을 ‘공평’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는 원죄로 인한 마음의 타락과 부패함에 치우칠 수 밖에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의 도리인 믿음의 근거,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힘입도록 하신 사랑과 자비의 배려를 뜻합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 처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 그리스도를 대속의 주님으로 믿는 믿음의 토대 위에서 영원한 생명의 길을 택할 수 있는 의로움의 ‘근거’를 얻게 된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온갖 현실적 고난의 한복판에서, 그의 친구들로부터 인간의 삶의 불행은 그 사람의 악행과 죄 때문이며, 따라서 욥 자신이 필경 그같은 불행한 삶의 원인 제공자일 것이라는 비난과 정죄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신을 의롭게 여겨 주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소망 가운데 친구들의 고소를 참아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통하여 허락하시는 의로움의 기초를 허무는 원인이 때로는 양심의 고소일 수도 있고, 욥처럼 뜻밖의 고난과 재앙으로 인한 삶의 외부 환경과 여건의 불만족스러움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마음, 그리고 자기 스스로 자신을 책망하지 않는 마음은 우리 내면의 ‘생명 체계,’ 즉 바이오 자원과도 같습니다.  매 순간 지속되는 죄의 미혹과 그로 인한 양심의 고소를 경험하면서 성도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능력을 힘입지 않으면 삶을 더 이상 ‘생명 지향적으로’ (pro-life)유지해 가기가 어렵습니다. 삶이란 그 자체가 생성과 소멸의 이중적인 작용을 거듭하는 것으로서, 잘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잘 죽는 것이 필요하며, 아울러 잘 죽기 위해서는 또한 제대로 사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사람마다 삶을 생명지향적으로 살 것인가, 소멸과 죽음을 지향하는 식으로 살 것인지의 여부는 결코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과 결심에 속한 것입니다. 욥처럼, 참되고 의로운 삶의 유지를 위해 일시적인 소멸의 고통을 경험하면서도 그것이 더 나은 생명의 유지를 위한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분명히 간직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는 욥의 고백처럼, 사람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는데, 인류의 대속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니고는 아무도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울 수 있는 비결과 원천은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세상의 구원자, 즉 ‘구세주’ (the Savior)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개인적 구주’ (the Lord)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늘 부끄러움 없는, 하나님께서 주신 의의 사람, 공의의 사람이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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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0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욥 21:22)

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은 실제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범주를 논하기 위함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인간의 무지함, 또는 지식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함 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삶의 특성 상, 경험과 추측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의 지식은 상대적이며 주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편의 보다 더 온전한 지식의 유익과 능력을 힘입기 위해서는 항상 자기 자신이 안다고 믿는 것에 대한 겸손하고 비판적인 자기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고난이나 죽음과 같은 불행한 인간의 삶의 ‘한계상황’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주어진 삶의 상황이 주는 의미를 나타난 현실 그대로만 갖고 이해하다 보면, 뭔가 불운하고 불행한 삶의 조건들에 대해서 불가항력적인 삶의 원인들을 찾아 의존하게 됩니다.

인간의 삶 자체가 미리 정해진 초월적인 삶의 질서와 원리에 따른 것으로 간주된 나머지, 뭔가 불행하고 불운한 삶의 형편을 마치 죄 된 인간이 평생 당연히 안고 가야할 숙명적인 짐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불행의 대물림까지도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삶의 이치이며 원리인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이는 주어진 삶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욕구가 다분히 회의적이며 비관적으로 표현된 탓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된 데에는 매사에 자기 자신을 이해의 근본으로 삼는 그릇된 ‘마음의 습관’ (the bad habits of mind) 이 큰 문제입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는 말씀의 의미와 같이, 사람의 마음의 충동과 방향이 항상 일정하지가 않습니다. 살다 보면 한두가지의 불행하고 불운한 일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지극히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자신이 당사자일 경우, 그 일이 갖는 의미를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하여, 마치 자기 자신만 그러한 불행을 겪는 것으로 간주하여 스스로 지나친 피해의식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라는 욥의 반문은, 어떠한 경우라도 인간의 삶 속에서 경험되는 주관적인 방식의 자기 이해를 갖고서 그것이 마치 하나님 편의 기준인 것처럼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마다 자기 중심적인 이해의 틀 안에서 무엇이든 자신과 관련한 삶의 의미를 극대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성으로 인해 타락한 ‘마음의 습관’은 불행하고 불운한 일들에 대해서는 더욱 더 자기 중심적인 이해를 강요합니다. 아담과 이브의 타락으로 인한 인간의 원죄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이 가장 거짓되고 교만해지기 쉬운 삶의 영역이 바로 지식의 영역입니다.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매사에 삶의 의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영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간섭을 전제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나만 겪는 불행이며 고난이라고 해서 그것의 의미를 내 마음대로 규정하고 자기 자신에게 강요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일입니다 .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약 1:13). 지혜와 지식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대속의 능력을 경험하십시오. 불행과 슬픔을 가장한 자기 변명이나 자기합리화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지식의 영역에 까지 새롭게 함을 힘입으십시오 (골 3:10). 하나님은 결코 그의 자녀들이 영원한 불행이나 슬픔의 덫에 매여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인생의 모든 슬픔과 저주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 안에 속한 것이며, 정령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그가 친히 피난처가 될 것입니다 .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스스로 지혜 있는 척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자랑하는 삶을 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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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일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욥 17:9)

욥기는 구약 성서의 대표적인 지혜서입니다.  욥의 현실적 불행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보응에 따른 것이라는 친구들의 강압적인 논리에 대해, 욥은 모든 인간이 죄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운명을 단지 상벌 논리에 메이게끔 하는 것은 결코 죄인의 회개와 구원을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또한 죄인 된 인간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행동 역시 결코 원리 원칙주의와는 다를 것이라는 주장이 바로 욥의 신념이었습니다.

스스로 죄인 임을 인정하고 삶 자체의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해 하나님 편의 마땅한 보응으로 생각하고 달게 받아야 한다는 친구들의 생각과는 달리, 순전히 하나님 편의 새로움을 갈망하는 욥의 열심이 사실은 조상들의 죄로 인해 바벨론 칠십 년간의 포로기를 겪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자화상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을 크게 삼 구분할 때 율법서와 예언서, 그리고 지혜서로 나누는데, 모세오경으로 대표되는 율법서는 죄의식에 대한 현실적 책임감의 표현이며, 예언서는 현실의 한계와 무의미함을 넘어선 미래의 희망사상에 대한 표현, 그리고 욥기를 비롯한 지혜서는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 상상력과 인식 능력의 정화를 통해 내면의 삶의 자리를 바르게 하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삶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처지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이라는 유명한 책을 쓴 막스 베버는 종교의 본질을 직업을 통한 소명의식에서 찾았습니다. 지극히 세속적이며 사소한 것을 갖고서도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자 하는 제사장적 마음가짐이 개신교 윤리에 입각한 자본주의의 정신인 까닭에 유물론을 근거로 하는 공산주의의 이념이 결코 자본주의를 이길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바닥에 있으면서도 하늘을 향하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기독교적 소명의 본질입니다. 그런 뜻에서 ‘의인’ (the upright)이란 매사에 하나님을 향하여 선 자를 가리킵니다. 매사에 하나님께 호소하고자 하는 마음이 ‘손이 깨끗한 자,’ 즉 정직한 사람의 기준입니다. 욥기의 구성상 매사에 원리 원칙에 입각한 보응과 형벌을 논하는 친구들의 주장은 문학적으로 ‘평면’구조를 띤 산문체인데 비해, 욥의 대답과 간구는 거의 대부분 ‘상향’ 혹은 ‘하향’ 식의 시적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즉 위를 향하여 하나님께 말하고 그의 대답을 듣고자 하며, 또한 하나님에 의해 기어이 설복 당하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자기 자신의 속 사정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언을 해 줄 분이 언제든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매사에 그의 판단과 증거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서양 시에서 가끔 갈대가 여인의 변심을 뜻하는 소재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갈대는 남자의 절개를 상징하는 식물입니다.  물가나 습지에서 자라는 식물의 대부분이 키가 작은 군집 형 식물인데 비해, 유독 갈대는 키가 커서 무려 2미터까지 자라곤 합니다. 그렇게 클 수 있는 이유는 물가에 있으면서도 줄기의 수분 함량을 최대한 줄이고 해 있는 쪽을 향하여 꽃을 피우는 습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습지에서 자라면서도 시들어 썩는 것보다 차라리 말라 부서지기를 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식물이라도 해를 향하는 갈대는 쉽게 썩지 않는 법입니다.

성도가 매사에, 특별히 고난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필요성과 관련하려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의 의롭게 하시는 판단과 위로를 기다리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의롭고, 그 손이 가장 깨끗한 사람은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판단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 분 안에서 항상 의롭고 깨끗한 사람이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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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7일

“나는 썩은 물건의 낡아짐 같으며 좀 먹은 의복 같으니이다” (욥 13:28)

대 이스라엘의 종교 사적 발달 과정에서 하나님의 비인격적 요소에 대한 강조로 인해 인격적 종교의 특성이 훼손되는 기인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욥기에 묘사된 하나님은 욥과 그의 기도에 대해 위협을 가하는 우주적인 세력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고결한 인격과 믿음의 기초를 허문 당사자입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사탄의 계략으로 인해 욥의 무죄함에 대한 신적인 음모를 허용하는 하나님 자신의 주도적 행위에 의해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욥의 힘겨운 기도에 묘사된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간략한 언급만으로도 그가 하나님께서 사용한 우주적 힘에 의해 얼마나 공포에 짓눌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이니이다” (21절). 이처럼 우리의 삶에는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여 일정한 목적지에 도달하였다고 생각할 때 우리 자신의 삶의 기초가 파괴되고 약화되는 것 같은 생각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언가를 이루었고, 그것을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하였다고 여기는 순간 사실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삶의 처지를 겪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앙의 능력으로 매사에 삶의 가능성을 극대화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의 견해와는 달리, 실제로 우리의 자아가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마치 자칭 ‘큰 자’라 칭하던 유대 청년 ‘사울’이 지극히 ‘작은 자’를 의미하는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과 같습니다. 바울 사도 자신이 지극히 작은 자라 칭하였던 것처럼, 믿음의 여정을 포함한 인생의 여정 자체가 단지 작고 작아져 가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의 삶 속에서 정말로 하나님의 위엄을 인정하려면 우리들 스스로가 얼마나 작은 자인지를 똑바로 의식해야 함이 사실입니다. 

문제는 바로 그 불편한 진실 앞에서 우리 스스로 괴롭고, 유혹하는 자의 의도대로 정말로 약해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욥의 무고한 고통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자’ 하나님이 되어가는 과정에 속한 일이었습니다. 욥기에 기록된 욥의 고뇌와 슬픔은 출애굽기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 드러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자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고대 이집트와 그 나라 사람들을 포함하여 우주 전체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출애굽기의 이야기는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의 승리를 가리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에 소중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이스라엘 외의 나라들을 진멸하신 기적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온 우주 가운데 행하고자 하는 일의 웅장함과 완전한 범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작고 연약한 나라를 인류 역사의 중심 단계로 끌어올릴 수 있는 분입니다.  인간의 삶의 모든 궁극적인 가치는 언제든지 하나님에 의해 이 땅 위의 어떠한 삶의 처지 가운데서도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이야기는 세상의 모든 약한 것들을 돌보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건의 한 예일 뿐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 있었다면, 그들은 이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들에 불과하였다는 것입니다 –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 7:7). 그것이 바로 ‘동방의 의인’ 욥의 입에서라는 자백이 나오기까지 인내하고 괴로워 한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늙어가는 문제를 포함하여 피조물로서 ‘낡아져만’ 가는 자의식에 의한 괴로움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한낱 피조물로서 인생 자체의 연약함이 괴롭고 아쉬울 수는 있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그만큼 창조주의 강함과 위엄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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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일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 이다” (욥 10:12)

래 전 ‘죽음에 이르는 병’ 이라는 책을 쓴 덴마크의 실존 철학자인 키르 케고르는 신체적 죽음 뿐 아니라 인간 내면의 죽음, 곧 하나님과의 단절을 초래하는 병적 성향을 가리켜 ‘절망’이라고 불렀습니다.  같은 병이라도 죽음에 이르지 않는 병은 결국 희망으로 이어지는데 비해, 죽음에 이르는 병은 반드시 절망으로 흐르더라 는 것입니다. 

절망은 일종의 정신 질환으로서,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분열이 초래된 데 따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절망’이라는 뜻의 영어 식 표현 (disappointment) 그대로 뭔가 자기 나름의 고유한 가치와 목적을 위해 지명 또는 ‘임명’ (appointment) 된 자로서 정체성을 부인하거나 잃어버림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 조차 알지 못하는 처지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절망을 경험할수록 점점 더 스스로 자기 자신이기를 바라지 않는 무기력하고 의도적인 절망감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다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기를 바라는 오만하고 거짓된 절망감에 사로 잡히게 됩니다. 지속적으로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결국 자기 자신이 없습니다.  ‘자기 도피’ 와 ‘기만’ 만 있을 뿐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적 성향이 절망인 것처럼, 삶을 향한  의지에도 ‘희망’이라는 분명한 성향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욥기는 죽음에 이르는 병적 성향을 삶의 의지, 즉 희망으로 바꾼 욥이라는 사람의 인물전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통치의 섭리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욥의 믿음의 과정 속에 절망 가운데 죽음에 이르게 될  자가 아니라, 희망을 매개로 하여 반드시 살아날 자로서 성향이 엿보이는데, 첫째가 되는 것이 바로  자신이 과연 누구인지를 알고자 하는 마음 자세입니다.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 자신의 독백과 대화의 많은 부분이 하나님을 향한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별안간 불어 닥친 인생의 온갖 재난과 재앙의 상황 속에서 온갖 한계상황을 경험하면서도 욥은 질문 가능한 모든 삶의 영역들에 대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물음을 제기합니다.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욥이 ‘항변’ 을 지속하는 이유는 한가지, 즉 자신이 경험하는 삶의 모든 의문과 의혹들에 대해 반드시 하나님 편의 해답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 어떤 일도 하나님 편의 해답이 없는 경우는 결코 없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기독교를 말씀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성경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과 나 자신에 대한 주관적인 차원의 의혹과 불만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세상은 여전히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의 실체가 밝혀지는 곳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소통하는 자는 결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매개로 하여 하나님과의 소통의 대상으로서 자기 자신의 존재가 확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키르 케고르의 말처럼, 절망은 ‘자기 도피’ 이건 ‘기만’ 이건 간에 상관없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을 잃어버리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들은 결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혹 잃었다 가도 다시 찾습니다.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12절)라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만큼,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만큼 자기 자신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공감과 소통의 대상이 되는 것만으로도 자기 자신이 과연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지를 알게 됩니다. 물리적인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스스로 살아야 한다고 여기며, 살고자 하는 자는 기어이 살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본질과 우선순위에 따르면 우리의 삶, 즉 생명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선물이며 결과입니다. 창조주의 의지에 따라 주어진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죽음에 이를 자가 아니라 ‘삶에 이르는 병’을 앓는 자라고 여기는 마음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자신의 독생자의 대속의 죽음을 매개로 하면서까지 믿는 자에게 참 생명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의지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 늘 참 생명으로 거듭나고 살아나는 참된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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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3일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욥 7:1)

의 의미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어투, 즉 말의 전달 법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그 말을 전하는 과정에서 각각 다른 상상력을 갖게 되고, 그러한 상상력을 내포한 사람 자신의 뜻이 어투에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무슨 말을 하는가 보다 중요한 것은 말하는 사람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면서 말하는 지의 여부입니다.

온갖 거친 말들을 쏟아내는 데도 불구하고 그 말이 하나도 거슬리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점잖은 말을 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 듣는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에게 조차 시린 아픔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언어치료학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욥의 말투는 자학적이며 폐쇄적이고, 절망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의 말에는 인생의 온갖 우여곡절을 지나면서 한결같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온전한 믿음의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욥의 말에는 무책임하고 섣부른 삶의 ‘초월’에 대한 기대가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라는 그의 독백은 말 그대로 메인 자, 즉 삶의 속박과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의 비관적인 처지를 가리킵니다.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6절) 라는 말 역시 온갖 고난과 수고로움의 처지에 직면한 인간의 삶 자체의 무의미성을 지적하는 표현임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단 한 번도 자신의 처지를 벗어난 상태에서의 초월적인 삶에 대한 꿈과 미련을 갖지 않은 이유는 삶 자체의 무의미성을 매개로 하여 오히려 삶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향하는 믿음의 ‘회귀’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욥의 말이 지나치게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원망으로 얼룩져 있다고 생각한 그의 친구 엘리바스는 다분히 초월적인 차원의 구원을 가능케 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고난의 현실 속에서 스스로 잠잠할 것을 촉구합니다 – “볼 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시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구속하실 터인즉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 아니 할 것이라” (욥 5:17-21). 엘리바스의 ‘점잖은’ 충고와 비교한다면, 스스로를 가리켜 품꾼의 날처럼 덧없는 삶을 사는 자라고 말하는 욥의 독백은 다분히 불신앙의 표현인 것만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불행과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내어 놓는 욥의 정직한 고백에는 인간 내면의 진실함을 토대로 하여 절대자 하나님께로 향하고자 하는 마음의 다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단지 살아 남고자 하는 마음으로 의지하는 것이 초월에의 욕망인데 비해, 욥의 고백에는 오히려 ‘성실한’ 죽음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대하는 마음가짐의 성실함에 의해 새로운 존재의 삶, 즉 영생이 가능케 되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사렛 예수의 성실한 죽음을 통해서 가능해진 것처럼, 모든 유형의 초월이 다만 참된 현실의 삶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욥은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인생 자체의 온갖 허무함을 경험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최대한 진실하며 성실하고자 하였습니다 –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7절). 욥의 간청 어디에도 당장의 문제해결을 위해 무리한 초월을 강행하는 식의 억지가 없습니다.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모두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 뿐 입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의 한계임이 분명하다면, 성도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기도는 ‘하나님, 이 모습 이대로 저를 생각해 주옵소서’ 입니다.

한 호흡과도 같은 인간의 삶, 그 한번의 기대감만으로 하나님을 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울까라고 말할 수 있지만, 단 한 번의 숨에 불과한 인생을 영원히 붙드시는 분이 또한 하나님입니다. 그러기에 매사에 그분께 대한 무한대의 기대와 염원을 갖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단 한 번 뿐인 삶의 기회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매사에 전력질주 하는 것이 또한 인간으로서 성실함의 기본입니다.허무한 것이 좋을 리 없지만 허무의 실체를 통하여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의 허무와 무상이 은혜의 통로일 수 있습니다. 허무함을 아는 것이 은혜이며, 허무함을 매개로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은혜의 완성입니다.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허무함을 매개로 하여 오히려 매사에 주의 은혜를 성취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인생의 매 순간마다 영생의 감사와 감격을 누리는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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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6일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욥 3:20)

‘어찌하여’라는 말로 시작하는 욥의 탄식은 현재 자기 자신이 처한 삶의 환경의 부조리와 불합리에 관한 원망이며, 그 원망은 그 모든 일의 주체인 하나님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욥의 탄식은 그의 처지를 전해 듣고 위로 차 찾아 온 친구들과 함께 칠일 동안의 침묵기간을 보낸 후에 최초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욥 2:13).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극심한 고통과 시련에 처하여 칠일 간이나 말을 잊고 지낼 수 밖에 없던 욥이 절망감으로 인한 자기포기나 체념 대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의 결국을 알고자 하는 의도로 자신의 반감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직접적인 원망으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자신이 겪는 고난과 아픔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그 일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욥의 지적이 성경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는 성도의 삶의 여정에서 경험하는 극도의 불행과 슬픔, 그리고 아픔에 대해서까지 그 이유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에서 찾고자 하는 ‘일관된’ 사고방식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성도가 세상의 모든 일의 주관자가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면, 기쁘고 감사할 만한 삶의 조건 뿐 아니라, 고난과 아픔을 강요하는 삶의 여지들까지도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기회가 됩니다.

당장에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주관하는 일의 방식이 모순되고 잔인하며, 불행을 강요하는 것만 같아도, 그의 궁극적인 선하심에 대한 믿음을 전제할 때, 우선 겪는 삶의 고난과 아픔에 의한 강요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열 자녀와 평생 모은 재산, 그리고 욥의 몸에 발한 심한 종기는 그의 친구들조차 무려 일주일 간 그의 곁에 있으면서도 그가 먼저 입을 열기 전까지는 아무도 아무런 위로의 말조차 건넬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마음의 아픔을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욥의 말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그가 세상에 태어나던 날 하나님께서 빛과 생명을 허락하신 것을 추억하면서 현재 자신의 삶의 불행과 좌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욥 자신에게 일찍이 빛과 생명을 주어서 살게 하신 것은 현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결코 삶의 포기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재확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간구를 통한 성도의 정직한 탄식은 비록 그것이 원망과 저주의 형태를 띨지라도 현상유지와 현실에 의한 강요를 거부하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불행하게만 여겨지는 현실 속에서 더 나은 과거에 대한 정직한 추억은 스스로 현실의 한계에 매몰되는 대신에, 그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창세기의 천지창조에 관한 기록이 집대성된 시기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제국에 식민 백성이 되어 칠십 년 간의 유배생활을 하던 때였습니다. 성경의 모든 약속이 성도의 삶의 ‘원 경험’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실제로 욥이 언급하는 ‘빛과 생명’은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창조의 빛입니다. 만물이 존재하기 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창 1:2)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태고의 빛, 생명 창조의 빛을 뜻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시간이 창조된 이후부터 인간이 역사 속에서 경험하는 상대적인 어둠과 고난이 아무리 심하여도, 사람은 너나할 것 없이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의 빛을 경험하고 그 속에 간직한 존재들입니다. 그 빛을 되살리기 위해 이 땅에 참 빛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 1:9).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와 탄식을 통해 인생의 가장 깊은 어둠의 날에도 그 마음 깊은 곳에 생명의 빛이 비추고 있음을 확인하는 삶의 주인공들이 되십시오. 빛의 값어치는 항상 주위가 어두울 때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주님은 빛이시며, 그를 따르는 우리들 역시 세상의 빛 가운데 거할 사람들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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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9일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딤전 6:6)

건한 마음 (godliness)의 본질은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물론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대하여 본능적으로 두려운 마음을 갖는 것이 당연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참된 사랑이 모든 두려움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요일 4:18), 하나님께 대한 참된 두려움으로 그 외 다른 모든 일들로 인한 두려움의 여지들을 제거하는 편이 훨씬 더 이롭고 유익합니다. 사람마다 죄성의 필연적인 유혹과 연약함을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자발적인 순종과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이유는 그분께  대한 참되고 ‘유익한’ 두려움으로 인해 세상의 모든 일들로 인한 해롭고 무익한 차원의 두려움의 여지들을 능히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성 자체를 거룩한 ‘이기심’의 표현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들 자신을 위해 염려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혜롭고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우리를 위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그가 정말로 우리를 위하시며 사랑하는 마음의 유익을 최대한 누리고자 하는 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한 모든 인간의 삶을 향한 하나님 편의 궁극적인 계획과 목적이 바로 그러하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입니다. 나름대로 지극히 합리적인 방식으로 과실과 손해에 대한 책임소재를 엄격히 가리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탓하거나 또는 다른 사람의 책임을 묻는 식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두려움의 표현인 경건의 유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매사에 남의 탓을 하거나, 자기 탓으로 돌리면서  스스로 문제해결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마음은 신앙의 원리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모두 포함하여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른 온전한 삶의 변화를 이룩하고자 하는 것이 믿음의 동기이며 목적입니다. 그래야만 특정한 개인이 아닌 하나님의 의와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 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 (딤전 6:4, 5)이 일어나는 이유가 모두 이 점에 있어서의 무지 때문입니다. 그와 반대로, ‘자족하는 마음’ (contentment)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의 지혜와 마음이 거룩함, 그리고 참된 경건함의 표현입니다.

시시비비를 포함하여 정말로 자기 자신에게 이롭고 유익한 것의 실체를 판단하는 문제에 있어서 까지 순전히 믿음의 원리를 따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피상적으로는 다분히 소유에 대한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과 마음의 미혹을 품지 않는 것이지만, 보다 적극적으로는 매사에 하나님께 대한 참된 두려움이 온갖 삶의 부족함의 원인을 능히 제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과 지혜를 의미합니다. ‘자족’ (self-sufficient or self-supplying)이라는 말의 문자적 의미 그대로 만물의 창조주인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외심의 표현인 믿음의 의지에 따라 스스로의 필요와 욕구를 능히 충족시키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 (wants and needs)의 차이를 아는 것은 물론, ‘필요’의 원리와 우선순위까지도 영원한 삶의 가치에 따른 재배열이 얼마든지 가능한 ‘선택적 만족’의 비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정말로 축복, 또는 행복의 비결과 원리를 논하는 방식이 성경적이지 않으면 단 한시도 이 땅 위의 삶에서 거룩함 또는 경건함의 유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믿음생활이 항상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 (딤전 6:3)을 따라야 하는 이유입니다.

매사에 하나님을 참되게 두려워 함으로 삶의 만족과 행복의 기준까지도 믿음으로 정할 수 있는 선택적 만족의 삶의 비결을 터득하십시오. 성공보다 행복보다 앞서야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 안에 있기만 하면 행복은 언제나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성도가 은혜의 선물로서 복을 누려야만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축복의 기업으로서 삶이 가능합니다. 늘 믿음 안에서 자족하는 마음의 은혜가 가득하여야 할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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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2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 도다” (딤전 1:14)

님의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하였 도다’ (exceedingly abundant)라는 표현은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서 딱 한 번 나오는 표현입니다. 물량적인 기준으로 다 측정할 수 없을 만큼의 풍성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써, ‘넘친다’는 식의 표현은 많지만 ‘넘치도록 풍성하다’는 표현은 전례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바울 사도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으로서 그의 몸 된 교회를 통하여 봉사의 ‘직분’을 맡게 된 일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의 선물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직분 자체의 특별함이나 무슨 영화로움 때문이 아니라, 그 직분을 맡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 주시는 주님의 배려와 인정 때문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 이니” (12절)라는 말씀 그대로, 주님은 바울을 충성되이 여겼습니다. 바울 스스로 고백하였듯이, 그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 자’였으나 (14절), 주님은 그를 대함에 있어서 전혀 다른 기준을 적용하여, 마치 그가 아니면 도저히 길이 없다는 식으로 온 애정과 관심, 그리고 사랑을 갖고 대해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는데 오직 주님께서 만 바울 자신을 믿어주고 사랑으로 대해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일이 너무도 고마워서 은혜라는 말 외에도, 그것이 ‘넘치도록 풍성한’ 방식으로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그 은혜의 풍성함에 비할 때, 믿음과 사랑까지도 그것의 열매 내지는 부속품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은혜로 인하여 믿음도 사랑도 가능해 졌다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말이 지닌 일반적인 ‘호의’로서의 특성과 달리, 바울의 서신에서 사용되는 은혜의 대부분은 그것의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와 결심을 부각하는 강조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냥 일반적으로 호의를 베푼 것이 아니라, 바울이 고백하는 것과 같이 개인적이며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위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신적 은혜의 특징과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자들을 끝까지 믿으시고 충성된 자로 여겨 주시는 이해와 ‘간주’ (treatment)에 있습니다. 때에 따라 우리들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식의 과오와 실수를 범한 경우에도,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아니 그 모든 견해를 잠재워 버릴 만한 믿음과 사랑의 풍성함으로 우리에게 구원과 회복의 여지가 있다고 말해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누구든 자신을 최후의 순간까지 믿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삶은 결코 외롭거나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믿음과 사랑이라는 인간의 삶에 필요한 모든 긍정적인 에너지의 원천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인간관계, 또는 인생의 여러가지 문제점들에 직면하여 믿음과 사랑의 원리에 대한 자포자기 식의 생각이 들적마다 그 원리 자체를 가능케 하는 힘과 지혜의 원천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는 가장 일반적인 차원의 하나님의 존재의 특성이며, 또한 가장 세부적인 차원의 우리를 향한 하나님 자신의 믿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본심을 아는 자입니다.

삶이 어려울수록 매사에 하나님의 본심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타개하십시오. 바울 사도처럼 우리들 각자를 향한 하나님 자신의 믿음의 선한 뜻을 알기만 하면, 정말로 우리의 삶에 능치 못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넘치도록 풍성한 기대와 염원을 갖고서 우리를 일일이 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마음을 잘 알아, 다른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믿는 마음, 또는 믿어주는 마음의 승리를 경험하십시오. 우리를 향한 주님 자신의 은혜의 원리를 가로막을 만한 죄의 세력이나 영향력은 결코 없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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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일

.“그 노인이 이르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쓸 것은 모두 내가 담당할 것이니 거리에서는 유숙하지 말라 하고 그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서 나귀에게 먹이니 그들이 발을 씻고 먹고 마시니라” (삿 19:20, 21)

브라임 산지에 위치한 산당에서 레위인의 직무를 감당하던 한 사람이 음행을 범한 후 자신의 곁을 떠나 베들레헴 친정 집으로 돌아간 자신의 첩을 찾아 데리고 돌아오는 길에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거하는 곳에서 욕보임을 당합니다.

주로 타국인이나 타향인들을 대상으로 행해진 집단 간음 행위는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동족 또는 동향인이라는 생각이 조금만 있어도 그 일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습니다. ‘나’ 또는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내세우면서 뭔가 다른 집단이나 개인의 정체성을 무시하고 박멸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치심을 극대화하기위해 성적인 학대를 감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로 카톨릭 계열에서 제어되지 않는 성적 욕구, 즉 ‘색욕’ (concupiscence)을 죄의 본성으로 이해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에 내포된 이기적인 특성 때문입니다.

타인을 자기 자신의 주관적인 욕구 충족의 대상으로 여기는 본능적인 성향에는 순전히 자기 자신만 있을 뿐,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의 성적 욕구를 오직 결혼이라는 ‘신적인’ 제도 하에서만 해소하고, 그 욕구의 취지 또한 경건한 후손, 즉 하나님의 자녀들을 생산할 목적으로 활용하도록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사시대의 문제점은 그러한 집단적 이기심의 광기가 사회적 약자인 나그네와 여인을 대상으로 행해진 데에 있습니다. 타인을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 충족의 대상으로 여긴 것 자체가 악한 행위인데, 그 일을 스스로 보호 능력이 없는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 시대 사람들의 죄악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동족인 베냐민 지파 사람들에게 욕보임을 당한 레위인 역시 피해자로서 동정의 대상이 되지를 못합니다. 자신이 받아야 할 욕을 첩에게 돌리기 위해 그녀를 불량배들의 손에 넘겨준 사실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모든 사람들이 죄의 미혹으로 말미암아 총체적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런 뜻에서 그 레위인과 같은 에브라임 산지 출신의 사람으로서 베냐민 사람들의 땅에서 임시 거주자로 살고 있던 한 노인이 레위 인 일행을 만나 양식과 쓸 것을 제공하며 숙소까지 제공한 것은 단순한 친절과 호의 이상의 행동입니다.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무시 당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 그리고 그들의 존재감에 대한 인정과 격려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친절이 바로 그 사람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생면부지의 사람과 그의 일행을 대해 ‘거리에 유숙하지 말라’고 말한 것은 곧 그들 모두 거리에 거할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나그네에게 선뜻 집을 내주는 행위는 비록 나그네의 처지에 속한 사람일지라도 얼마 든 자신들의 거처에 거할 만큼의 인간적 존엄성과 가치를 지닌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사는 동안 내내 그들이 실제로 거할 거처를 제공하셨던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의 이별을 앞둔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로 오리라” (요 15:18)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누구든지 삶 자체에 대하여 나그네와 같은 소외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 안에 있으면 누구든 왕처럼 귀한 자이며, 제사장처럼 항상 하나님과의 소통이 가득하게 됩니다. 어떤 형태로든 영원히 잃어진 자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안에서 항상 성도로서의 거룩한 기품과 존엄감을 잃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대접받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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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8일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삿 16:4)

삼손이 들릴라를 만난 ‘소렉’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서쪽 2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평원으로 ‘명품 포도,’ 또는 ‘포도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주위가 적당한 평야 지역이고 지중해 연안까지 이어지는 골짜기와 계곡이 잇닿은 곳이어서 항상 물이 풍부하고, 따라서 일년 내내 포도 농사를 가능케 하였습니다. 삼손이 그곳 출신의 들릴라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진 이유가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금한 나실 인의 규례를 어긴 체로 육체의 정욕을 좇아 방종한 상태에서 임의로 먹거리를 취한 그의 부주의한 습성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들릴라’라는 이름은 히브리 말의 ‘상하고 마르게’ 한다 (דָּלַל/weaken, languish)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명품 포도주 골짜기 출신의 미모의 여인의 이름의 뜻이 사람을 마르고 상하게 한다는 것인데, 이는 다름아닌 어긋난 사랑, 즉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을 전제로 하지 않는 빗나간 사랑의 열정이 초래하는 자기 파괴적인 특성을 교훈 합니다. 독일의 Ulrich Beck이라는 사회학자가 쓴 ‘The Normal Chaos of Love’ (적당한 양만큼의 사랑의 혼돈)’이라는 책에 보면 참된 사랑에는 반드시 모든 혼돈과 무질서를 능히 잠재울 수 있는 ‘성찰과 자정’능력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한 때의 혼돈과 무질서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참 사랑을 만나거나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 안에서 필경 서로의 삶이 바르고 깨끗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사자 모두에게 ‘존엄성’을 부여하는 사랑의 속성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그 사랑의 수고와 인내의 과정 속에서 반드시 서로의 가치와 존엄성이 더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태에서 남으로부터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 인’ (삿 13:7)으로서의 삶을 위해 부름 받은 삼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로 이러한 사랑의 대상이 되어야 할 자였습니다. 그의 머리에 평생 삭도를 대지 말도록 하신 하나님의 요구는 다름아닌 그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친근한 사랑’의 표시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사람의 머리카락은 그의 전 존재를 의미하는 상징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삼손의 ‘배내 머리’를 그대로 간직하도록 하신 것은 그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사랑과 보호의 의무를 평생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 자신의 의지의 표현인 셈입니다.  삼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토록 귀하고 소중한 사람이었으며, 삼손이 대변하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의미와 바로 그같은 것이었습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 나니” (마 10:3)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결코 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 안에서 인간을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참되고 친근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 아무나 쉽게 사랑의 대상을 삼을 수 없습니다.

참되고 온전한 사랑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며, 그 사랑의 위대한 능력, 즉 죄와 사망의 법에 매인 인간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게 하는 유익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명품 포도의 향기와 명성이 아무리 귀해 보여도, 사람을 마르고 약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줄타기를 하듯, 해롭고 위험한 사랑의 아픔과 스릴을 추구하는 것은 단지 병든 인간성의 표현일 뿐입니다. 최소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의 대속의 죽음을 매개로 하면서까지 인간에게 알리고자 하였던 신적인 사랑의 취지와 본성을 가리키며 본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며, 또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삼손과 들릴라는 사랑을 매개로 하여 서로를 ‘상하게’ 하고 피차 ‘말라져’ 버렸습니다. 삼손은 ‘육체 뿐인’ 사랑 때문에, 들릴라는 ‘실리’를 목적으로 하다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거짓 사랑에 매어 서로를 파괴한 것입니다. 성도라면 반드시 자기 자신도, 다른 사람도 항상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의 토대 위에서 사랑해야만 합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 매사에 ‘하나님 사랑’이 우선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믿음과 복종 하에서 ‘적당한 양만큼의 사랑의 혼돈’을 용납할 뿐, 그 이상의 평가와 선택은 언제든지 그의 말씀의 ‘경계’에 따라 행할 줄 아는 참 사랑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인간의 사랑은 정말로 무지하고 무능한 것이 되고 맙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에 까지 반드시 ‘거듭남’과 ‘성령충만함’의 은혜를 힘입으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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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삿 16:4)

다에 이어 이스라엘의 사사직을 계승한 입산은 다른 네 명의 사사들과 마찬가지로 사사 로서의 활동 내력이 성경의 단 몇 구절에 불과할 정도로 짧고 간단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인물에 관한 기록의 양으로만 구분할 때 모두 12명의 ‘대 사사’들에 비해 다섯 명의 ‘소 사사’들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섯 명의 ‘소 사사들’의 활동이 유난히도 기드온과 입다라는 두 명의 입지전적인 사사들에 뒤이어 등장합니다. 기드온에 이어 돌라와 야일, 그리고 입다에 이어 입산과 엘론, 압돈이 그렇습니다.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형제들에 의해 내쫓김을 당한 후 이스라엘 사회의 잡류, 혹은 부랑아처럼 떠돌던 삶을 살다가 암몬 족속과의 싸움을 앞두고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이스라엘의 전쟁용사로 큰 공을 세운 입다는 하나님 앞에서 성급한 서원을 내밀다가 그만 무남독녀 외동딸을 희생의 제물로 드리는 비통함을 겪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리더십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과 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그만 분한 마음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들과의 전쟁을 용인하게 되고 무려 42,000명에 달하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학살하는 누를 범하게 됩니다.

암몬 족속과의 일생일대의 전쟁에서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이룩한 ‘거룩한 승리’의 가치를 무효화하는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자신의 성급한 ‘입 놀림’에 의해 외동 딸이 불행한 죽음을 당하였기 때문에, 입다의 후손은 영영히 땅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가문의 몰락과 에브라임 지파와의 전쟁으로 인한 이스라엘 사회의 엄청난 피해와 손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구원자, 곧 사사 입산을 세우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내는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전임자인 입다와 달리 입산에게는 아들이 삼십 명, 그리고 딸이 삼십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과 딸들을 위해 배우자를 모두 나라 밖, 또는 최소한 그들의 사는 지역 경계 ‘밖에서’ (חוּץ/outside, abroad)구해 왔습니다. 입산이 그의 자녀들의 배우자를 모두 ‘초 문화적’ (cross-cultural)인 방식으로 채택한 것이 그의 전임자인 입다의 행적과 대조적입니다. 입다는 무남독녀 외동딸을 그 자신의 섣부른 서원의 희생양이 되도록 한 이후 동족인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의 불평불만에 대해 대규모의 극단적인 살상으로 반응할 만큼 편협하고 독선적인 지도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삿 12:6). 반면에 그를 뒤 이은 사사 입산은 출신 지역이나 나라에 상관없이 자녀들의 배우자를 선택하는 식으로 가족, 또는 동족의 경계를 넓혔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맞는 지도자를 택하신 데 따른 결과이긴 하지만, 그것과 함께 입산 자신의 넓은 세계관과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필요성과 그 효용성에 대한 믿음의 가치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인식의 한계에 메이지만 않으면, 정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효력과 범위에는 끝이 없습니다. 순전히 내 방식대로 경험하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좀처럼 확대되지 않는 이유는 매사에 자기 자신의 판단과 주관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후미진 곳에 있는 대상까지도 자신이 그리고 싶은 원 안에 포함시키기 위해서는 중심점을 이동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나’ 또는 ‘내 것’ 이라고 여기는 것 대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룩하고자 하는 믿음의 생각과 동기를 중심점으로 사고 거기서부터 원을 그리면, 나 자신은 다소 중심에서 멀어져 보여도 담고 싶은 대상이 그 안에 포함되기 마련입니다.

뭔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수록, 매번 판단의 근거를 주님의 뜻에서 찾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누구든 그 마음가짐이 주님의 것과 같아야 그가 하시고자 하는 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이 땅 위의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무제한적인 은혜의 풍성함과 구원의 감격을 주시고자 하는 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와 함께 마음만 맞으면 정말로 그가 우리를 통해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입다 보다는 입산과 같은 사람이 훨씬 더 행복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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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5일

“에벳의 아들 가알이 그의 형제와 더불어 세겜에 이르니 세겜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니 라” (삿 9:26)

루살렘 북쪽으로 약 65킬로미터 지역에 위치한 세겜은 이스라엘의 역사 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장소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첫번째 제단을 쌓은 곳이 바로 그곳이며 (창 12:6-8),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이 있는 밧단 아람에서 돌아와 맨 처음 장막을 치고 단을 쌓은 곳도 역시 세겜입니다 (창33:18-20).

야곱의 외동 딸인 디나가 세겜의 족장 하몰의 아들에 의해 욕보임을 당하고, 그 일로 인하여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의 거민들을 대항하여 집단 살육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후 요셉의 유언에 따라 그를 가나안 땅에 매장한 곳이 바로 세겜입니다 (창 50:22-26). 출애굽한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여 16년간에 걸친 정복 전쟁을 벌인 후 여호수아가 그의 임종 시에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언약을 갱신하도록 한 곳도 세겜입니다 (수8:30-35).

사사 기드온의 첩의 소생인 아비멜렉이 칠십 인에 달하는 이복형제들을 몰살하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던 곳이 세겜인데, 이는 그의 어머니의 고향이며 자신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조시대에 들어서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창시자인 솔로몬의 군대 장관이었던 여로보암은 세겜에 수도를 세웠고 (왕상 12:25), 이후로 세겜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종교,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의 구원역사의 진행과정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인간적 신뢰의 대비 상황이 빚은 온갖 우여곡절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간에, 언약을 통한 신뢰의 기반이 하나님께 대한 우선적인 의무와 충성에 있을 때에는 어려운 상황 가운에서도 반드시 구원과 해방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언약관계의 의무를 소홀히 한 체, 인간적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삶의 방안을 채택하는 경우 결과는 항상 불의와 불행의 연속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고향인 세겜 지역의 사람들을 충동하여 형제들을 몰살하고 아버지의 명성과 위엄을 차지하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던 아비멜렉의 도모는 겨우 삼 년 만에 파탄이 나고 맙니다 –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삼 년에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삿 9:22-23). 아비멜렉에 이어 가알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어리석은 자가 나서서 세겜 사람들의 왕이 되고자 하는데, 그의 이름 자체도 ‘혐오스러운’ 자라는 뜻입니다.

‘에벳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아버지의 이름은 ‘종’ 또는 ‘노예’라는 뜻입니다. 물론 가알의 등장 자체가 하나님께서 무자비한 아비멜렉의 죄를 벌하기 위한 수단이긴 하지만, 세겜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불행과 비극이 그들 자신의 무분별한 인간적 신뢰 때문이었음을 교훈 합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 모든 인간관계의 신뢰의 기반이 하나님 자신이어야 합니다. 성도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만큼 다른 사람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밑바탕이 없는 인간관계는 한계와 문제점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막 9:50)는 주님의 말씀처럼, 인간관계가 다 좋을 수는 없습니다. 소금의 방부 효과처럼, 피차에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신뢰의 기반이 없는 우정이나 인간관계는 무미건조하고, 결국 서로에게 해를 끼치게 되고 맙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 참되고 영원한 신뢰의 기반과 대상은 하나님 뿐임을 알고, 그 이상의 과도한 것을 기대하는 우매한 인간관계의 유혹을 조심하십시오. 관계의 영역에 까지 신실하신 하나님의 간섭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만 참된 친구도 얻을 수 있고, 불의하고 무익한 우정의 미혹에 빠진 친구를 구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의 사람이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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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 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 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 라” (삿 7:2)

스라엘 사회에 아직 왕정이 확립되기 전 인 사사시대는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협하는 이방 민족들과 의 싸움에서 그들을 대신하여 싸울 자, 즉 구원자를 하나님께서 직접 선출하시고 공급하시던 때였습니다. 즉 구원자를 세우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연단을 필요로 하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구원의 의지와 방법이 전적으로 그들의 신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왕정 시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질적인 주관자가 인간 왕이 아니라, 그를 세워 당신 자신의 참된 왕권을 드러내고자 하는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계획을 따르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사사시대의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 선지자 때에 백성의 일방적인 요구에 따라 하나님께서 왕정을 허락하고,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임명하였지만, 사울 왕의 의무와 책임은 다만 그 백성의 참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의 본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왕의 주된 기능이 백성을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인데, 모든 전쟁의 승리의 주원인이 바로 그 백성의 참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사 기드온 당시 미디안 연합군과의 싸움을 위해 가나안 북쪽 지역의 네 지파 중에서 자원하여 지원군이 된 병력이 삼만 이천명에 달하였습니다. 물론 이 숫자는 무려 십 삼만 오천에 달하였던 (삿 8:10) 미디안과 동방의 이방 연합군대의 병력의 수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군대 중 두려워 떠는 자들은 집으로 돌려 보내고, 남은 자들 가운데서도 삼백명을 추려, 그들을 통해 미디안 연합군을 물리치도록 합니다.

그러한 일련의 정예 군사 선별 과정의 첫번째 기준이 바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 즉”이라는 말의 주는 교훈은 이중적 입니다. 기드온과 같은 용맹한 장수라 할지라도,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서 주관하는 그 백성의 영적 전쟁의 주인공이 될 수 없으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믿음의 결심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의지와 방법대로 치르는 ‘거룩한 전쟁’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온전히 그들의 신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일진대, 그들이 싸워야 하는 전쟁의 취지와 방법 역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존귀와 영광을 나타내는 수단으로서 의 전쟁을 자체의 기술이나 화력, 또는 무기의 성능만 갖고서 싸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대대로 전쟁을 알지못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산지에 거하면서 고대 중근동 지역의 여러 부족들 간의 생존을 위한 싸움으로 잔 뼈가 굳은 미디안의 대군들을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을 따르는 일을 금한다는 것은 사람으로 인한 낙심과 불평의 이유까지도 스스로 삼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며, 그의 은혜의 선물로 인한 삶 자체의 이유와 목적을 유지해 감에 있어서 ‘인간적인 것’에 의한 침입을 스스로 용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시 118:6)라는 식의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피조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 본연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인간적인 것의 한계를 벗어버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매사에 하나님께 대한 소망과 의지를 앞세우면서 사람을 따르고, 사람에게 메이는 식의 삶을 떨쳐버리는 믿음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어진 우리들 각자의 삶 속에서 은혜의 열매를 맺을 목적으로 치러야만 하는 ‘삶의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비결은 한가지 뿐입니다. 실패도 성공도 모두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다만 그의 뜻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간에 사람으로 인한 것은 부가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 영원합니다. 끝까지 사람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을 따르십시오. 그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곧 성공이고 행복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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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1일

“바락이 시스라를 추격할 때에 야엘이 나가서 그를 맞아 그에게 이르되 오라 네가 찾는 그 사람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바락이 그에게 들어가 보니 시스라가 엎드러져 죽었고 말뚝이 그의 관자놀이에 박혔더라” (삿 4:22)


병거 900대를 보유하고 무려 20년 동안 이스라엘을 학대하였던 가나안의 하솔 지역의 왕 야빈은 시스라 라는 이름의 군대장관을 내세워 이스라엘 땅의 점령을 계획하였습니다. 이에 맞서 싸울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으로, 그는 납달리 지파와 스불론 지파의 지도자였습니다. ‘번갯불’ 이라는 그의 이름의 뜻과 달리 바락은 일만명에 달하는 군사를 거느리고도 도무지 가나안 군대에 맞서 싸울 의지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여선지자로서 사사 역할을 감당하였던 드보라의 지시에 대해서 굳이 그녀가 전쟁터에까지 함께 하여야만 자신이 군대를 이끌 수 있을 것 같다는 식의 조건부의 승리의 의지를 표명할 뿐이었습니다.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삿 4:9)라는 드보라의 말대로 바락은 비록 시스라가 이끄는 가나안의 철 병거 부대를 물리치는 데에 성공하지만, 적장인 시스라를 사로잡는 일에는 실패하고 맙니다. 오히려 당시 가나안 부족들과 화친관계를 맺고 있던 겐 족속의 한 여인이 기지를 발휘하여 가나안의 군대장관 시스라의 목숨을 거두는 일에 성공합니다. 이스라엘의 군대장관 바락의 영광이 이방 여인의 손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 여인의 이름이 바로 야엘이며, 그녀는 겐 사람 헤벨의 아내였습니다. 부상당한 가나안의 장군 시스라가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을 찾아간 것으로 보아, 야엘의 행동은 필경 죽음의 위협을 무릅쓴 대단한 용기와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부하를 모두 잃은 홀연 단신의 처지라 할지라도 시스라는 여전히 가나안 철 병거 부대를 이끄는 군대장관으로서 그의 용맹스러움과 포학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야엘이 자신의 처소를 찾아 온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한 말이 바로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18절) 입니다. 이는 다분히 여인의 처지에서 사나운 남성의 폭력을 물리치기 위한 임기응변 식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모성애를 발휘한 것일 수도 있으며, 성적인 유혹을 가장한 위기 타개책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인의 처지에서 발휘된 야엘의 기지 앞에서 전쟁과 군대의 폭력성이 지극히 무력하고 나약한 것이 되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야엘에 의해 살해된 시스라 만큼이나 이스라엘의 군대장관 바락의 명성 또한 수치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직 그만이 상대할 수 있는 라이벌과 같았던 적장 시스라의 목을 벤 자가 이방 여인이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믿음의 싸움은 결코 인간적인 힘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과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그것을 믿지 못하면 백전노장과 같은 장수라도 부끄러움을 당할 수 밖에 없고, 전쟁을 모르고 아예 할 수도 없는 여인이라도 능히 적의 목을 베는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 로다” (시 20:7)라는 시편의 고백의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온갖 원인 모를 두려움과 실패의 염려에 사로잡히는 대신,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를 참으로 두려워 하는 삶을 살면 반드시 구원의 길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십시오. 성경에 소개된 모든 유형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의 핵심은 그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그의 구원의 방법을 따라 행한 믿음의 사람들의 존재에 있습니다.

성도가 전쟁과 같은 인생살이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단 한가지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것과 같은 방식의 승리와 구원의 꿈을 꿀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것은 그의 구원의 방법이 전적으로 그에게 속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스스로가 위주가 되는 허튼 생각 대신, 하나님의 방법대로 그가 끝까지 계획하신 구원의 승리를 이룩하실 것을 믿고 절대 패배 의식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항상 생각과 꿈이 하나님 편에서 견실하고 일관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산양’이라는 뜻의 야엘의 이름처럼, 약한 여인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용기와 기지를 발휘하게끔 하면 ‘번갯불’이라는 뜻의 이스라엘의 군대장관 바락이 차지할 수 없는 승리의 공헌을 가능케 합니다. 믿음으로 인생의 전쟁터에서 야엘과 같은 진짜 영웅이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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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4일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삿 1:15)


 사사시대의 초대 사사인 옷니엘의 아내가 된 악사는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정복 전쟁을 이끌었던 ‘노병’ 갈렙의 딸입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출애굽 일 세대 중 광야 40년 간의 여정이 지난 후까지 생존한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니스 족속의 사람으로서 정통 이스라엘 백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함께 모세의 총애를 힘입어 일찍이 가나안 산지를 정탐하고 돌아오는 정탐꾼의 사명을 감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모세의 사후 여호수아에 의한 가나안 땅에 대한 지파 별 분배와 정복 전쟁의 책임이 부과될 때 갈렙은 팔십 오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점령하기 수월한 평지가 아닌 가나안 산지에 위치한 헤브론을 기업으로 택하였습니다 –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수 14:12). 훗날 그곳이 같은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태어난 다윗 왕의 첫번째 도읍지가 됩니다. 다윗이 그곳을 자신의 왕국 건설을 위한 일차 도읍지로 정한 것은 필경 전쟁의 영웅인 그의 조상 갈렙의 용맹과 위용을 본받기 위함 이었을 것입니다. 갈렙의 딸로서 아버지의 서원에 따라 헤브론 근처의 또 다른 가나안 산지인 기럇세벨을 점령한 용맹한 군인 옷니엘의 아내가 된 악사 역시 아버지 못지않은 용맹과 기지를 발휘한 인물이었습니다.

가나안 산지에 위치한 기럇세벨이라는 지역이 물이 흔치 않은 곳임을 알아채고서 아버지의 기업에 속한 헤브론 땅과의 경계 지역을 흐르는 두 곳의 샘에 대한 소유권을 청한 것입니다. 부계사회 체제 하에서 순전히 아버지의 뜻에 따라 배우자를 정할 수 밖에 없는 딸의 처지에서 최대한의 권리와 호의를 주장한 것입니다. 악사의 조치가 없었다면, 남편인 옷니엘의 점령지와 아버지 갈렙의 소유지 간의 후대에 걸친 지속적인 분쟁과 싸움을 피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가문과 부족 간의 이해의 충돌을 예방하고, 자신의 가문의 영토를 확보하려는 다분히 이기적인 마음의 동기인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남성중심의 생활여건 속에서 여인의 사려 깊고 분별력 있는 선택이 기지를 발휘하였다는 점에서 사사시대 나름의 하나님의 ‘판단’을 좇아 행하는 믿음의 능력과 가치에 대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결코 남성적이며 폭력적인 전쟁의 힘과 무기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능가하는 하나님 편의 기지와 용기, 그리고 총명함 이야말로 더욱 강력한 승리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갈렙과 옷니엘로 대표되는 강한 ‘남성’의 이미지를 능가하는 탁월한 여성성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는 결국 두 부족 간의 갈등의 여지들을 미리 예방하는 섭리적 요소들을 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악사의 활동 외에도 사사시대 내내 여인들의 활동에 의해 강한 남성들의 ‘취약함’이 극복되고 보완된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는 구원역사의 진행과정에는 모든 차이점들이 서로에게 유익하고 보탬이 되는 상호보완적 기능을 합니다. 다른 점 만을 내세우며 이것 아니면 저것 식의 선택과 차별을 강요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 몸의 약한 것들이 더욱 긴요한 역할을 감당하듯이,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판단을 따라 행하는 삶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룩할 뿐입니다. 인간의 삶의 일체의 차이와 갈등이 보다 더 큰 차원의 유익과 보탬이 되도록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십시오. 피차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섬김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서로의 다른 점이 그만큼의 가능성이며 축복의 이유일 뿐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삶을 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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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8일

“또 주께서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 이다” (시 18:35)


움의 전략 중 흔히 공격이 최선의 방어책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적절한 방어 능력이야 말로 무모한 공격의 위험을 방지하는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상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광활한 영토를 확보하였던 다윗 왕은 자신의 믿음의 여정을 가리켜 주님께서 그에게 ‘구원하는 방패’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다윗의 말은 하나님을 구원자로 삼는 믿음 자체가 그의 삶에 최고의 방어책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도 막상 삶의 다양한 위협이나 위험 요소 앞에서 우리 스스로 구원의 방법을 찾지 못하는 현실의 처지에 그만 매이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의지가 강하고 책임감이 더한 사람일수록 매사를 자기 자신의 능력 위주로 살핀 나머지 스스로 자기 삶의 ‘구원자’가 되기로 자처하곤 합니다.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이 하나님은 물론 다른 사람들 모두에 대한 원망의 이유로 바뀌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자기 자신에 대해 경험하는 온갖 유형의 한계상황에 대한 초월과 극복의 여지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본질입니다. ‘자력 구원’이 아닌 ‘타력 구원,’ 즉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매개로 하는 구원의 은혜와 능력을 믿는 것은 항상 자기 자신의 한계를 전제로 하기 마련입니다.

‘인간적인 것의 끝이 곧 하나님 편의 시작’이라는 말이 주는 의미와 도 같습니다.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 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은 그처럼 한계상황에 매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잠재력을 순전히 하나님 자신에 대한 믿음을 매개로 극대화 해 주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움과 겸손한 성품을 가리킵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한 신적인 구원의 능력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뭔가 뚜렷한 삶의 목적의식을 갖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경우에도 역시 그 같은 마음의 감동과 동기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는 삶입니다.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로 인한 마음의 불만과 불평의 여지를 조심하십시오.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의 경험을 통해 자기 자신을 되돌아 보고 더 좋은 기회를 위해 스스로를 보완하고 연마하는 것은 좋지만, 지나치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실패에 대한 자기 동일시로 인해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긍정성을 부인하는 것은 최소한 피조물로서 마땅한 도리가 아닙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스스로 얼마 든 더 ‘커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과대망상 같은 것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죄로 인한 양심의 고소나 죄성의 지배를 받는 세상의 온갖 편견이 인간성 자체에 대해 항상 파열과 축소주의를 강요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매사에 하나님께서 ‘크게’ 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야 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본질적 의미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의 삶 속에 다른 많은 현실적 대안이 없어도 끝까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만 있으면 충분히 온갖 원수의 비난을 참아 이겨내는 강력한 대비책이 됩니다. 삶의 위기상황마다 항상 ‘믿음의 방패’를 구비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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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1일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 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 이다” (시 13:5)


13편은 다양한 유형의 삶의 ‘미완의 실재’ 들에 대한 신앙적 태도가 어떠해야 할 지에 관한 교훈 시입니다.  1-2절에 무려 4번이나 반복된 “어느 때 까지니이까” 라는 말의 의미와 관련하여 시의 저자인 다윗의 삶에 수없이 반복된 오랜 기다림과 인고의 세월 동안 결코 쉽게 해결되지 않은 ‘미완성의’ 삶의 여지들을 헤치고 나온 그 자신의 경험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의 시점을 알지 못하는 인생 자체의 한계로 인하여 순전히 우리들 각자의 현실적인 상황 판단에 사로잡힌 나머지, 스스로 조급한 마음의 피해를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 안에서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쫓아 행하고자 하는 성도의 열심이 다분히 현실적인 상황 파악과 이해를 전제로 하는 경험적 실재에 관한 이해에 상충될 때, 신실한 성도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대안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 사오니”라는 시인의 고백은 결코 맹목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은 삶의 경험적 실재의 가치를 능가하는 믿음의 실재의 우월성과 진실함에 대한 변호입니다. ‘주’ 또는 ‘주님’이라는 하나님의 명칭과 함께 성도가 삶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들에 대한 궁극적 소유권과 주권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일이 기본 전제입니다. 즉 만물의 참 주인이 하나님 자신인 이상, 땅 위의 모든 소유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이해와 태도가 항상 사랑과 자비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일방적이거나 무조건적이지 않습니다. 매사를 올바르게 분변 하며, 합리적인 토대 위에서 뭔가 미흡함을 발견하면서도, 그 모든 것의 근본 가치를 사랑스럽고 자비로운 것으로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사랑입니다. 그의 백성의 삶의 처지를 대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의도적입니다.

친히 창조하신 모든 사람을 결코 저버릴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기본 속성으로서 사랑과 자비의 원칙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도무지 일이 해결된 만한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 백성의 삶의 모든 처지들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의도적인 사랑의 원칙을 믿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을 믿어주고 알아주는 사람들의 견해에 의해 더욱 더 나아지고 감춰진 모든 기량을 다 발휘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마다 자기 자신을 향한 하나님 편의 변함없는 사랑의 원칙을 믿는 것이 그 삶의 시점을 올바르게 정하는 길입니다.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행 1:7)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도의 삶의 모든 기한과 일정을 관리하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힘든 인생의 고비를 지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우리들 각자의 삶에 시간과 경계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 마음가짐의 회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일하실 여지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사랑을 항상 신뢰하십시오. 그 마음이 있고 없고의 여부에 따라 우리가 경험하는 온갖 삶의 실재들에 대한 이해가 전혀 달라집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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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성소에서 섬길 때 입을 정교한 옷을 만들고 또 아론을 위해 거룩한 옷을 만들었더라” (출 39:1)

사장들이 성소에서 주님을 섬길 때 입은 정교한 옷이란 다분히 제사의 직분을 감당하는 데에 필요한 ‘기능복’을 뜻합니다.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수를 놓은 옷이라는 점에서 다소 미학적인 관심이 포함되기도 하지만, 주기능은 다만 성소에서 주님을 섬기는 목적에 부합하기 위함 입니다. 대제사장인 아론이 입는 거룩한 옷이란 앞치마 형태로 된 것으로서 겉옷 밭침을 뜻합니다.

호마노를 깎아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을 새겨 놓고 이를 어깨 받이, 즉 견장 형태로 붙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또한 열  두 가지의 다양한 보석을 흉패에 달아 붙임으로써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의 가슴에서 열두가지의 영롱한 빛이 비치도록 하였습니다. 보석의 색깔 별로 다른 이스라엘 각 지파의 특성과 사명을 주님께서 아시고 영원히 기억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염원을 반영합니다. 옷이 되었건 보석이 되었건 간에, 제사장의 의복은 다만 주 여호와께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염원과 희망, 그리고 믿음의 다짐의 표현입니다.

물론 그러한 신앙적 동기와 목적을 정한 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옷이 의미하는 신분과 기능의 상징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존재의 이유와 목적은 다만 그들의 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며 사는 데에 있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창세기의 천지창조의 기록에 따르면, 인간의 옷을 온전한 형태로 지어 입히신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벌거벗은 체로도 전혀 부끄러움을 몰랐던 인생이 죄의 미혹에 빠지면서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고, 그것을 가리고자 겨우 선택한 것이 무화과 나무 잎이어서 곧 시들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영원히 수치스러울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인간의 필연적인 부끄러움의 여지를 가려주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비록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는 쫓겨나게 되었지만, 그 후로 동물의 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지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물론 아담과 이브의 ‘가죽 옷’을 제작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취하신 희생물로 취한 짐승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의 공로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의복이건 무엇이건 간에 사람이 자신의 몸에 걸치는 모든 것의 취지를 하나님께 대한 봉사와 섬김을 위한 것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 ‘의의 옷’을 덧입고, 매사에 하나님께서 옳다고 여겨 주시는 것을 삶의 기본 전제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명품 옷을 몸에 걸치고도 마음이 떳떳하지 않으면, 옷의 가치는 물론 맵시도 전혀 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값싼 평상복만 걸치는 데도 그 사람의 고매한 인격과 명성 때문에 마치 비싼 옷을 입은 것처럼 좋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의 맵시가 갖춰져야 그 사람의 옷의 매력과 아름다움이 더해집니다.

제사장의 옷을 가리켜 ‘정교한 옷,’ 혹은 ‘거룩한 옷’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매사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전제로, 외관상의 아름다움을 늘 확보하는 삶을 사십시오. 믿음의 옷을 제대로 입어야만 그 외 다른 많은 유형의 옷을 또한 제대로 입을 수 있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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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7일

“마음이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손수 실을 빼고 그 뺀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을 가져왔으며” (출 35:25)


막에 필요한 물품들을 짓고 만드는 일은 철저한 분업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금, 은, 놋과 같은 금속의 귀한 것을 예물로 드린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성막 안의 각종 기구들의 원자재가 되는 조각목을 드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제사장의 에봇과 흉 패에 물릴 호마노와 같은 값진 보석, 그리고 등불과 관유와 분향할 향에 소용되는 기름과 향품은 백성의 족장들이 가져왔지만, 성소 안의 휘장과 속 덮개, 그리고 제사장들의 겉옷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 그리고 중간 덮개와 외부 덮개 용인 염소 털과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을 드린 사람들은 또 따로 있었습니다. 성막의 가장 안쪽 내부 덮개는 청색, 자색, 그리고 홍색실과 가늘게 짠 베 실로 짜여 있고, 아름다운 천사들의 형상이 그 덮개에 수놓아져 있습니다.

이는 주로 여인들의 수작업을 통해 만들어지는데, 1개의 길이가 28규빗 (12.6m), 그리고 폭이 4 규빗 (1.8m)의 휘장 5개씩을 연결하여 두 쪽의 큰 폭, 즉 10개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출 24:1-6). 지금처럼 봉제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때임을 감안 할 때, 이는 많은 여인들이 며칠 동안 조를 짜는 식으로 협력하여 일정한 크기 만큼의 별도의 제작 과정을 걸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손수 실을 뺀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은 세마 포 천에 수놓아 새긴 그룹들, 즉 천사들의 문양만큼이나 귀하고 정교한 여인들의 정성을 대변해 줍니다. 그러한 실을 아예 염소 털로 뽑아낸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은 그 기술의 정교함과 세밀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짐작케 합니다 – “마음에 감동을 받아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염소 털로 실을 뽑았으며” (출 35:26). 성소와 지성소를 덮는 덮개의 가장 안쪽의 내부 덮개가 여인들의 오랜 가사노동의 결실인 베 실로 짠 것이었다는 사실이 주는 교훈이 매우 큽니다.

이는 성막 자체의 구조적인 특징을 고려한 배열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처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흔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노고일 뿐으로 치중하기 쉬운 여인들의 가사노동의 결실로 채우고자 한 것입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대하는데 있어서 그 어떤 인간적 노고와 노력의 대가도 헛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처는 금과 은, 놋과 보석과 같은 진귀한 재료들로 만 채워지는 곳이 아닙니다. 그처럼 귀한 것들의 가치가 올바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사소한 영역에 있어서의 정직하고 정교한 수고가 꼭 필요합니다.

믿음의 가치와 능력이 꼭 뭔가 남다른 특별한 규모의 일을 감당해야만 입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한 것을 매우 특별한 마음가짐으로 할 수 있어야 정말로 그 사람의 됨됨이와 성품의 위대함이 입증되는 법입니다. 성막의 제작 과정에 내포된 여인들의 일상적인 헌신의 중요성과 같이,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영역에서 참되고 거룩한 믿음의 가치를 내보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고전 12:23)하시는 분입니다. 흔하고 천한 것을 더욱 귀하고 특별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일상의 사소한 영역에서 믿음의 위대함을 경험하는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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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0일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 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출 32:32)


이킬 수 없는 금송아지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모세의 ‘대리형벌’적 취지의 기도는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있는 자신의 이름이 대신 지워지더라도 백성들 만큼은 죄의 형별에서 벗어나기를 바랬던 모세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단호히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33절)고 말씀합니다. 

이는 죄에 대한 인간의 개별적 책임의 한계를 지적한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범한 죄의 형벌에 대한 책임만큼은 다른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이 피조물로서 인간의 한계이며, 동시에 하나님 편의 사죄의 은총으로 인한 삶의 회복과 온전함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범죄한 자에 대한 신적 형벌과,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지극히 개별적이라는 것이 오히려 참된 신앙의 능력과 하나님의 거룩함을 변호합니다. 아무리 큰 죄를 범하였다 할지라도 진실하게 뉘우치고 회개하는 영혼에 대해서 하나님은 한결같이 개별적인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비교적 우열을 논하는 식의 상대적 가치를 배제하고 유일무이의 절대적인 용서의 은혜를 제공합니다. 한 마디로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개별적으로 뵙고 그의 은혜를 구할 때 정말로 사함 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그 은밀하고 정직한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만남이 가능하도록 하기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독생자의 대속의 죽음을 통한 용서와 화해의 길을 마련한 것입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모세의 대리형벌적 취지의 기도가 무산되었다는 것은 모세라 할지라도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게 하였음을 의미합니다.

홀로 하나님을 대하여 ‘은혜의 사건’이 가능하도록 하는 일에 조금도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어렵게 하거나 그 의미의 소중함을 무시하도록 만드는 무책임한 생활습관을 경계해야 합니다. 분위기에 취하듯 들뜬 마음이나, 또는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인식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착각하는 오류를 범치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중한 죄책감에 시달려도, 성도가 하나님을 대하여 그의 은혜의 간섭을 요구하는 일만큼은 있는 모습 그대로, 자기 자신의 전심을 다하는 식으로 해야만 합니다.

기도가 되었건 봉사와 헌신이 되었건 간에, 매사에 하나님을 대하는 마음의 동기와 삶의 방식에 있어서 진정성의 회복을 추구하십시오. 수려한 문체의 온갖 수식어를 동반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향한 외마디의 비명이나 외침만으로도 그의 자녀들의 궁극적인 삶의 필요를 능히 채우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 이다” (시 139:2-4)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전부를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개별적으로’ 만나지 않고는 추호의 삶의 변화의 여지조차 기대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원치 않는 불행이나 절망스러운 계기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을 개별적으로 만날 수 있고, 또한 그의 도우심과 은혜를 간구하는 처지를 경험케 되는 것에 대해 오히려 감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우리들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개별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때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하여 가르치면서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6)고 말씀한 이유입니다. 골방에 가서 굳이 문을 닫으면서까지 하나님과의 ‘개별적인’ 만남의 의미를 추구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온 마음과 정성을 다 하기만 하면 하나님 편의 문제 해결의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개별적 만남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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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3일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출 29:46)


 약성경에 언급된 모든 유형의 제사의 궁극적 목적은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회복에 있습니다. ‘여호와’ (the Lord)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일찍이 모세가 출애굽의 구원자로서 사명을 감당하기를 주저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그 일의 ‘주관자’가 될 것을 약속하면서 모세와 백성이 안심하도록 하기위해 허락한 하나님 자신의 이름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 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과 구원을 방해하는 어떤 세력도 다 막아낼 것을 약속한 ‘언약의 하나님’의 명칭입니다.

일찍이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맹세한 대로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약속을 순전히 하나님 자신의 방법과 의지대로 이룩하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한정된 지혜와 깨달음의 영역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방법과 규모를 모두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누구든 그와 더불어 맺은 구원의 언약 가운데 살아가는 자의 삶은 반드시 출애굽의 구원과도 같은 하나님의 ‘필연적인’ 구원의 능력을 힘입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동식 성전인 성막의 제조법에 이어 제사장을 거룩케 할 것과 제사를 드리는 ‘제단’을 거룩케 할 것을 명령합니다. ‘거룩한’ 제단에 드려진 제물이라 야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열납하시고 그에 상응하는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텐데,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제사장을 비롯한 온 백성의 믿음, 즉 출애굽의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언약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제단이 거룩해 진다는 것은 다름아닌 성도의 내면, 즉 믿음의 동기와 목적이 거룩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믿음이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모든 삶의 상황 속에서 구원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구원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 삶 속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여지에 대해 의심하면서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온갖 인간적 주의 주장의 극단화와 폭력화, 또는 억지와 추측이 난무하는 이유가 모두 구원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부족 때문입니다. 성도는 자기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 편의 궁극적인 구원의 의지와 약속을 믿는 믿음만큼 거룩해 집니다.

매사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구원의 특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그의 삶이 거룩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으로 하여금 성소의 제단을 거룩케 할 목적으로 드리는 제사를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 (출 29:42)로 정한 것 자체가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예외 없는’ 믿음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함 입니다.

제단 위의 제물이 통째로 다 타고난 후 그 ‘향기로운 냄새’ (41절)만 위로 올라가 하나님께서 흠향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정말로 성도의 삶 속에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만 남아 있어야 합니다.  다 타버린 번제 제물의 향기와 같은 것이 바로 참되고 거룩한 믿음의 향기입니다. 변화무쌍하고 때로는 위험천만한 삶의 상황 속에서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거룩한 향기와 같이 발현되는 삶을 사십시오. 어린아이처럼 순전하고 진실한 믿음은 정말로 성도의 삶의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삶 자체가 향기로운 성도들이 꼭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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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6일

“너는 성막을 위하여 널 판을 만들되 남쪽을 위하여 널 판 스무 개를 만들고 스무 널 판 아래에 은 받침 마흔 개를 만들 지니 이쪽 널 판 아래에도 그 두 촉을 위하여 두 받침을 만들고 저쪽 널 판 아래에도 그 두 촉을 위하여 두 받침을 만들 지며” (출 26:18, 19)


야의 이동식 성전인 성막의 본체를 구성하는 주요 재료는 조각목으로 만든 널 판이었고, 그것을 서로 잇는 은 받침이 40개입니다. 나무의 판자의 밑부분을 은받침으로 지탱하는 것은 비용의 효율성을 고려할 때 다분히 낭비를 일삼는 행위인 것만 같지만, 실상은 조각목으로 만든 성소의 본체를 강화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나무로 제작된 담장의 대부분이 바닥부분부터 부식이 시작되는 점을 고려할 때 바닥의 은받침은 다분히 조각 목 널 판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받침’으로서 기능만 생각한다면 은보다는 놋이 더 나은 것이 사실이지만, 굳이 은을 재료로 사용한 것은 나무를 부식케 하는 일체의 독소를 제거하고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활용되는 은의  대표적 기능으로 강력한 살균력과 음이온 및 원적외선 방출, 항균, 항 곰팡이 방출, 대기오염 물질 제거, 그리고 인체의 성장발육과 세포 재생 효과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조각 목 널 판의 ‘은’ 밑 밭침은 세상의 모든 죄 된 요소들이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를 침투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안전장치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더욱 적극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그것은 성소가 의미하는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로부터 발현되는 인간의 죄성에 대한 박멸 효과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땅과 닿은 밑바닥으로부터 생성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는 언제나 삶의 ‘밑 바닥’으로부터 우러나는 참 생명의 기운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거룩함의 능력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단 한가지, 우리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누구든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의 삶에 온갖 신적인 권세와 존귀함의 능력을 덧입혀 주셨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이 낮고 천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여기는 순간, 인생의 모든 ‘독’과 위험 요소를 친히 그 몸으로 대신 하사 우리를 자유롭고 존귀케 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는 삶을 사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로 인한 마음의 상처와 괴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모든 인생을 위한 가장 위대한 해독제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 3:13, 14).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의 능력을 삶의 ‘밑받침’으로 여기면서 위험한 인생의 모든 독소로부터 자유로운 건강한 삶을 사십시오. 주님 안에 있으면 우리의 영혼이 결코 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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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 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시 9:8)


 “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 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시 9편은 온 세상의 주관자인 하나님의 판단이 성도 개개인의 삶에 미치는 능력과 유익을 찬양하는 찬송 시입니다. 원래는 시 10편과 함께 답관 체 (Acrostic) 형태의 하나의 시로 구성되었습니다.  ‘답관 체 시’ 란 히브리어 알파벳 22글자를 각각 문장의 처음소리로 정하여 운율을 맞추면서 따라 부르기 쉽게 구성한 찬송시의 한 유형입니다. 

시편 9편과 10편과 같이 하나님의 ‘판단’ 을 주제로 하는 시를 그런 형태로 구성한다는 것은 그만큼 성도의 삶 속에서 매사에 하나님의 판단, 즉 그의 결정을 따라 행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 말 성경의 시 9편에는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뭇랍벤에 맞춘 노래” 라는 제목이 붙어있는데, 뭇랍벤 이란 히브리 말로 ‘아들의 죽음’ 이라는 뜻입니다.

시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말의 의미만으로도 인생의 모든 상황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판단을 좇는 신앙생활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 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는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심판의 원리와 그것이 적용되는 구체적인 사례로서 판결에 결코 불일치와 모순이 없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심판의 원리와 주체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세계의 한계와 모순은 판단의 원리와 주체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라는 말처럼, 법의 내용은 좋은데, 그 법의 집행자의 해석이 다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큰 유익은 바로 그 점에 있어서 우리가 믿는 믿음의 내용의 정당성과 그 가치에 대해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세상 만물을 참 사랑,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원리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법칙과, 그것을 우리 각자의 일상의 삶 속에서 실현해가는 그의 판결의 내용이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당장에 그 결과를 모두 파악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아서 항상 속 시원한 해답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과 ‘판결’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그의 본성을 거스르는 모든 인간적 시도들은 결국 무익하고 해로울 뿐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공의와 정직’ 의 삶을 택하십시오. ‘정직’이란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삶이 바르고 곧은 것을 가리킵니다.  영어 식으로 ‘up-rightness,’ 즉 ‘위를 향하여 바른 마음가짐’ 을 뜻합니다. 시편 9편의 제목과도 같이 아들의 죽음이라는 기막힌 삶의 상황을 경험하면서도 그 마음이 ‘위를 향하여’ 하나님의 판결을 구할 때, 여전히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고백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믿음의 비결이며 하나님의 판단의 위력입니다.

허무한 세상의 풍조나 유행, 또는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는 식의 ‘굽은’ 판결 대신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향하는 곧고 바른 마음을 품고 사십시오.  정말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판결을 따라 야만 끝까지 바르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무엇에 있어서 건 간에 참 행복과 번영을 위한 걸림돌이 항상 자기 자신의 임의를 따라 행하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한 번 더 그의 판단과 판결을 좇는 믿음생활의 유익과 능력을 경험하십시오. 성도로서 우리의 삶이 매사에 하나님의 판단이 우월하고 훨씬 더 유익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라야만 그 분이 정말로 홀로 한 분 이신 하나님, 즉 유일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길입니다. 유일신 신앙의 유익을 꼭 누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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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시 2:9)

‘철장’ (iron sceptor)이란 고대 사회의 왕들의 손에 들린 홀, 또는 인장을 가리킵니다. 왕의 절대 권력이 신권을 대신하던 상황에서 나라의 통치를 위한 제도나 규칙을 정하고, 그것을 왕의 홀 또는 인장으로 인을 치고 나면, 그 왕이 다스리는 날 동안은 아무도 그것을 바꾸거나 폐지할 수 없는 절대 명령이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왕의 절대 권력의 상징입니다. 그 홀을 대개는 단단한 나무나 귀한 돌을 사용하여 만들곤 하는데, 본문의 철장, 즉 쇠로 만든 인장은 더더욱 고대 중근동 사회에서 신의 대리자로서 왕의 권세와 위엄을 상징합니다. 

시편 2편의 배경이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왕의 대관식을 위한 찬양 시인 점을 감안할 때, 다윗과 같은 이스라엘의 왕에게 그 백성의 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철장’으로 이방나라의 공격을 물리치되, 그들을 ‘질그릇’ 같이 부수게 되리라는 것은 그야말로 신적 권세와 능력을 통한 완전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즉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신적 권세 앞에서 온갖 변화무쌍한 세상의 권력자들의 처사가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라는 뜻입니다. 신약성경과의 연관성의 측면에서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죽음으로 대표되는 인생의 온갖 한계상황을 능히 이기고 매사에 하나님 편의 최종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의 승리를 가능케 하는 구체적 수단으로서 ‘철장’의 의미는 당연히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말씀이 반영하는 진리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무력 충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삶의 견고함의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인생을 향한 하나님 편의 영원한 구원의 약속,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복된 소식입니다. 복음은 정말로 인간의 삶을 견고하게 하는 특성과 능력이 있습니다. 존귀한 왕의 손에 들린 홀과 인장과도 같이, 성도의 삶은 존귀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장이라고 할 수 있는 구원의 복음, 그 영원한 진리체계 입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24:35)는 진리의 특성 그대로 성도의 삶이 영원한 진리의 간섭과 통제 하에 놓일 때에 비로소 온갖 덧없는 세상적인 것들의 미혹과 욕심을 질그릇 같이 부수고 거룩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 위에 삶의 터전을 세우는 일이 가능합니다.

왕의 대관식에 불리던 찬양시라는 점에서 시편 2편은 거듭난 성도가 마땅히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복된 소식 위에 자신의 삶을 건설하고, 그 토대 위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왕처럼 존귀한 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주는 거룩한 자존감의 근거를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몸 값으로 대속함을 받은 거룩한 성도의 삶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

인간 본연의 온갖 감정적인 욕구와 충동을 포함하여 하찮은 것에 메이는 삶 대신에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의 이치에 충실함으로써 그가 친히 우리의 원수를 질그릇 같이 부서뜨리는 삶의 유익을 누리십시오. 우리 보기에는 대단해 보여도,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세와 능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성도라면 마땅히 구원의 복음의 약속으로 ‘철장’을 삼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철장 권세’를 누리십시오 –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계 2:26-27).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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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6일

“두 사람 사이에 맡은 자가 이웃의 것에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고 여호와께 맹세할 것이요 그 임자는 그대로 믿을 것이며 그 사람은 배상하지 아니하려니와” (출 22:11)

애굽 이후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비단 종교생활 뿐만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영역에 있어서 까지 하나님의 소유가 된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 (출 19:6)의 의무를 감당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거룩함 이란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거나 예물을 드리는 행위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의와 덕을 세우는 마음의 동기와 실천으로 나타나야 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본성상 온전히 거룩한 사람은 있을 수 없지만, 죄와 허물의 와중에서도 그것을 처리하고 용서를 구하는 방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소유된 언약 백성으로서 본분과 사명을 다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삶의 실천적인 면에서 하나님께 대한 거룩함의 의무를 다하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웃에게 손해를 끼친 후 변상과 배상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 내에서 손해배상의 제일 원칙은 하나님을 그 당사자로 여기는 마음자세를 갖는 것 입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 소유권에 대한 인식과 함께, 그의 구원의 은혜를 힘입은 자들로서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고자 하는 ‘대속’의 의무감을 뜻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다른 누군가에게 원치 않는 손해나 피해를 끼친 경우,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의무감으로 여기면서 최선을 다해 원상복구를 도모하면서 피차 관계의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피해자만 있을 뿐 가해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경우, 혹이라도 보상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억울한 사람을 가해자로 지목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습니다. 가해자로 지목을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여호와께 맹세하기를 ‘아니라’ 하면 피해 당사자는 그의 말을 그대로 믿어주어야 했습니다.  

피해자 스스로 다른 누군가 에 대한 의심과 정죄의 마음가짐을 벗어버리는 것이 바로 거룩함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서로에 대한 의심을 배제하고 신뢰를 회복한다는 점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손해배상법의 취지는 가해자보다는 오히려 피해자의 처지를 고려하는 측면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적 피해를 너머서 심정적인 피해까지 강요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위한 하나님 편의 배려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과 원망만큼 인간성을 황폐화 하는 것도 없습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이런저런 일로 인해 크고 작은 손실을 경험하며 사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스스로가 가해자가 되는 일만큼은 없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삶의 필요를 채울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갖고, 때로는 뻔한 의심의 여지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맡기고, 그가 갚아줄 것이라는 사실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의심이 초래하는 염려 로부터 벗어날 때 ‘출애굽’이 의미하는 진정한 자유와 해방이 뒤따릅니다.  성도가 정말로 하나님을 구원자로 믿는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의심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듯, 평생 다른 사람을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이 너무 짧습니다. 의심보다는 믿어주는 마음이 훨씬 더 유익하고 능력이 있습니다. 의심 없는 참 믿음의 소유자가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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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 19:5)


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삶의 특징을 하나님의 ‘범주’에 들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인생 자체의 유한성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삶의 특성과 목적에 있어서 거룩하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매사에 더욱 더 온전해 지기를 바라는 마음의 지배와 동기를 경험하는 것이 바로 삶을 하나님과의 언약의 토대 위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때부터 그러한 삶의 취지와 특성을 간직하도록 하셨지만, 인간 스스로 죄의 미혹에 사로잡힌 나머지 하나님의 범주에 속한 자로서 자의식과 삶의 목적 의식을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인생 자체가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은 타락한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뜻에서 언약은 죄로 인해 사망의 법에 메인 처지가 되어버린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 이며, 그 부르심에 대해 적절히 반응하는 자들은 누구나 하나님 자신의 ‘소유’가 되는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은 곧 그의 특별한 차원의 관심과 애정, 그리고 감독과 보호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에 내포된 모든 신적인 요소들의 지배를 받는 처지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의 중심무대인 고대 중근동 사회에서 왕의 ‘소유’란 그의 지배자로서 권위와 품위를 반영하는 왕의 ‘분신’과 같은 가치의 중요성을 지닙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들의 신 여호와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의 이행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소유’가 되는 삶을 살라는 것은 그처럼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삶의 목적의식과 자화상을 간직한 사람들이 되라는 뜻이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 나니”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자신들보다 훨씬 더 나아 보이는 당시의 애굽과 같은 거대 제국의 실체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매일반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차원의 개인이나 국가의 정체성과는 전혀 다른 창조주 하나님 편에서의 ‘절대 가치’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준수하고, 그 언약의 의미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430년 간이나 ‘종살이’를 하였지만, 그 애굽이라는 나라의 가치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도록 부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치를 결코 뛰어넘지 못합니다.  애굽과 같은 나라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들지 않고는 그의 소유물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된 하나님과의 언약의 성취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교훈하는 대로 그리스도의 공로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맺은 구원의 언약관계를 지키며 살다 보면 우리의 삶의 수준이 과연 하나님의 범주 하에 들게 되었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과연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는 기쁨과 보람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루의 내용물이 그 자루의 특성과 이름을 결정하는 것처럼, 인간의 삶의 특징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누구와 더불어 맺은 언약의 대상인지에 달려 있습니다. 성도는 삶의 전 과정 내내 하나님을 상대할 자들입니다. 진실한 성도에게는 그만큼 거룩하고 복된 삶의 여지들이 많은 법입니다.  매사에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의 준수를 통해 항상 하나님의 소유물이 되는 즐거움과 유익을 누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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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 라 하시니 라” (출 13:2)


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농사를 위주로 하는 정착민의 삶을 살기 전, 그들은 조상적부터 대대로 이어온 유목민의 생활양식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막에서 가축을 기르기 위해서는 목초가 우거진 장소를 찾아 헤매며 지내야 했으며, 주로 물이 있는 곳으로의 잦은 이동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경작하는 삶은 아무래도 농부의 수고와 인내, 그리고 기술과 재량을 우선시하는데 비해, 가축을 기르는 일은 생식력과 번식력 자체에 대한 우연적 믿음이 주를 이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짐승의 어미가 새끼를 낳는 일과 관련해서만큼은 사람이 임의로 할 수 있는 것이 아예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뭔가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에 의한 개입을 중시해야 했고, 따라서 가축의 생식력을 증가케 하는 이른 바 복의 ‘원천’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우상숭배적 믿음을 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처음 난 모든 것’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돌리라는 말씀은 바로 그 일과 관련하여 우리들 각자의 온갖 믿음의 동기와 기대감의 원천을 하나님께 두라는 충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축들의 생식력 자체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보장할 수 없는 상태에서 태의 첫 것, 즉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그 외의 것들을 반드시 더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걱정과 기대감 속에서 정말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믿음의 고백과 결단을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믿음의 각오와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하나님 편의 복되고 풍성한 내면적 동기를 이해하는 일이 없이는 불가능하였습니다. 왜 꼭 ‘첫 것,’ 즉 어미의 태에서 ‘처음 난’ 것이어야 하는 지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 필요했습니다.  그에 대한 해답은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애굽 왕 바로에게 이른 말, 즉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출 4:22, 23)는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부모의 모든 권한과 지위가 맏아들을 통해 전수되듯이, 이스라엘은 그들의 신 여호와 하나님의 온갖 신적 권세와 능력의 전달자가 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배타적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땅 위의 모든 나라와 민족들에게 동일한 부르심의 혜택과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 입니다.  이스라엘은 단지 하나님의 부르심의 의미와 목적을 다른 사람들에게 일깨우기 위한 취지의 사명과 책임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견지에서 볼 때,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라는 말씀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러한 부르심을 받드는 사람들의 ‘하나님의 장자’로서 거룩한 자화상의 표현과도 같습니다. 그러한 심령의 ‘거룩함’이 회복되고 깨 달아질 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처음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은혜이며 특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견고하고 친밀한 하나님과의 일체감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소득의 첫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오직 그의 ‘장자’들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부모의 것이 다 내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하거나 임의로 취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생각 때문에, ‘내 것’을 갖고서 오히려 ‘그의 것’을 돌보고 더욱 풍성케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바로 거룩한 헌신이며, 사랑의 표현입니다. 매사에 하나님께 속한 것이 성도의 삶에 차지하는 우선순위만큼 하나님의 간섭과 감독을 받아들이며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처음 난 것’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첫 것,’즉 장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내어주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성도는 그리스도만큼 귀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장자로서 특권을 누리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아무에게나 아무런 요구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의 장자들에게만 그에 걸맞은 태도와 권리의 표현을 촉구하시는 분입니다. 장자의 특권을 꼭 누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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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8일

“여호와께서 돌이켜 강렬한 서풍을 불게 하사 메뚜기를 홍해에 몰아넣으시니 애굽 온 땅에 메뚜기가 하나도 남지 아니하니 라” (출 10:19)


덟째 재앙인 메뚜기 재앙을 초래한 것은 홍해로부터 불어온 동쪽 바람이었지만, 주님은 그 바람의 방향을 바꾸어 이제는 지중해의 서풍, 즉 애굽의 서쪽인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매우 강렬한 바람을 일으켜서 메뚜기 떼를 모두 홍해로 몰아넣었습니다.  동쪽 바람이 메뚜기 떼의 본능적 이동을 가능케 하는 ‘자연적’ 현상에 속한 것인 반면에, 서쪽 바람, 즉 지중해 연안의 강렬한 바람은 순전히 주님께서 이적을 베푸실 목적으로 일으킨 ‘초자연적’ 바람인 까닭에 그 위력이 훨씬 더 강하고 바람의 크기 또한 상상을 초월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동쪽 바람에 몰려온 메뚜기 떼가 애굽 온 땅을 뒤덮고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이 아예 남지 않을 정도로 모두 먹어 치운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 몸집 또한 한없이 부풀어졌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15절).

자연현상으로서 바람의 세력 자체를 ‘역류’할 만큼의 힘이 없이는 부풀어진 메뚜기 떼의 방향을 바꾸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고대 애굽 사람들은 광야에서 사나운 메뚜기 떼를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바람의 정체가 바로 왕의 신적 어머니인 아이 시스 (Isis)라는 여신의 권능에 속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주로 죽은 자의 영혼이 사후세계로 돌아가는 길의 안내를 맡은 신으로 여기면서 그 파괴적인 본성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최대한 그 권능에 순응하는 식의 삶을 살면서 그녀에게 복을 빌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소위 자연 친화적이고, 운명 결정론적 세계관을 따라는 중근동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아이 시스 여신에 대한 믿음과 두려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해진 운명의 흐름에 따라 그 지배를 받는 식의 삶을 당연시하는 것 자체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보다 심각한 문제는 소위 ‘운명’에 대한 인위적인 해석에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제국주의를 표방하는 군주국가들이 주종관계의 대상인 약소국가들에 대해서 마치 운명처럼 정해진 지배체제를 강요하는 일이 허다하였습니다.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이 절대자에 의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인간의 지배욕구 내지는 피지배 욕구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애굽 왕 바로의 강퍅한 마음을 깨뜨리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과 보응의 수단으로 행해진 것이지만, 메뚜기 떼 재앙은 애굽 사람과 히브리 사람 모두에게 인간의 운명의 열쇠를 쥐고 계신 분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의 교훈합니다. 

재앙을 가져오는 동쪽 바람과 그 재앙의 근원을 없이하는 서쪽 바람이 모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생성되고 소멸되었습니다.  인간의 삶의 재앙도, 그 재앙을 물리치는 능력의 근원도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분께 대한 믿음과 순종의 의지만 있으면, 재앙과 같은 현실이 실상 복의 원동력으로 변화되는 여지는 수없이 많습니다.  바람과 같은 인생의 시련이나 고통의 크기 또는 그 원인에 대해 너무 착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바람의 방향만 바꾸어도 능히 재앙이 변하여 축복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고통과 시련 가운데서도 여전히 그가 내 삶의 진정한 주인이시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거친 항해와 같은 인생의 여정에 풍랑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넌 센스에 불과합니다.  그 풍랑 한 복판에서 ‘내니 두려워 말라’는 말씀과 함께 우리 곁에 다가오셔서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구세주와 동행하는 삶의 위력을 꿈꾸어야 합니다. 번번이 거세고 ‘강렬한’ 인생의 ‘바람’ 가운데서 구원자인 주님을 만나십시오.  우리로 써는 도저히 안되는 바람의 방향을 바꾸셔서 우리의 인생의 항해를 안전케 하실 분이 바로 주님입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그분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어야만 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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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1일

“개구리가 왕과 왕궁과 왕의 신하와 왕의 백성을 떠나서 나일 강에만 있으리 이다 하고” (출 8:11)


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애굽 땅 전역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은 당시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각종 신들의 영역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보이기 위함 이었습니다. 거대한 제국의 이름으로 온갖 약소 민족들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일삼으면서 자신들의 행위를 일종의 신들의 지배 영역에 속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도의적 책임을 면하고자 한 제국의 우상숭배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 편의 심판과도 같습니다.  열 가지 재앙 중 두번째인 개구리 재앙은 당시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풍요와 다산의 신인 여신 ‘헤트’(Hekhet)에 대한 하나님 편의 공격을 의미합니다.  헤트는 인간의 몸에 개구리의 머리를 가진 신으로 해마다 나일 강에 장마를 가져다 주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으며, 여인들의 출산의 마지막 과정을 책임지는 생명의 제공자처럼 숭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바로에게 고한 개구리 재앙의 예고 – “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가 개구리로 너의 온 땅을 치리라” (출 8:2) – 는 애굽 사람들의 헤트 신이 주관한다고 믿어온 풍요와 다산의 복의 원천이 사실은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해마다 농번기에 맞춰 나일 강을 범람케 하는 것과 같은 자연만물에 대한 ‘시의적절한’ 창조주 하나님의 다스림의 능력을 보이고자 한 것입니다.  개구리가 아무리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애굽 전역에 가득하여 사람 살 곳이 없을 정도로 많아지게 되면, 복이 아니라 저주와 형벌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물의 경계와 질서를 정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다스림이 없이는 인간의 삶에 그 어떤 것도 참되고 유익한 것이 있을 수 없음을 일깨워 줍니다. 모세의 지시에 따라 아론이 애굽의 물들 위에 그의 지팡이를 내밀자 개구리가 애굽 온 땅에 덮였는데, 이에 질 세라 바로의 요술사들도 요술을 부려 개구리 떼가 올라오도록 하였습니다 (7절).  그런데 그 개구리 떼의 재앙을 물리치고 그것들은 원래의 자리, 즉 나일강 하류에만 있도록 하는 능력은 모세와 아론만 할 수 있었습니다.  만물의 창조주인 여호와 하나님만 인간의 삶의 참된 유익과 질서를 제공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바라고 소원하는 것이 많고, 얻거나 가질 수 있는 것이 많다고 해서 복이 아닙니다. 꼭 필요한 것을 필요한만큼 갖고 누릴 수 있는 절제된 마음의 행복이 참된 복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눅 12:20)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시기와 한계를 알지 못하는 풍요함에 대한 욕심은 인간의 어리석음의 소치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덜 먹고 덜 가져도 스스로 가진 것의 족함을 알고, 물질적 가치의 유한성에 대한 깨달음 위에서 보다 영원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마음이 참된 풍요의 비결이며 원천입니다. 다함 없는 풍부함에 대한 갈망보다 매사에 삶의 경계와 한계 안에서의 만족을 구하는 삶을 사십시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보다 허락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이 피조물로서 인생의 의미를 풍요롭고 복되게 하는 비결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어떤 것도 자기 삶의 경계가 없는 것이 없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무한대의 풍요와 만족을 꿈꾸지만, 하나님은 모든 상황 속에서 부족함과 아쉬움을 갖지 않는 마음의 여유를 제공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삶 자체의 ‘경계’를 제공받는 삶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마음의 경계가 정해지지 않으면, 인간은 항상 자신이 가진만큼, 혹은 가질 수 있다고 믿는 만큼 더욱 가난해지는 이유때문에 인해 불평 불만하며 지낼 수밖에 없는 욕심의 노예에 불과합니다. 마음의 경계를 정하시는 하나님의 복을 반드시 누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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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4일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출 4:25, 26)


애굽의 지도자 모세의 활동은 거대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히브리 민족을 땅 위의 모든 민족들 가운데 ‘장자’로 여기면서 그들을 통하여 열방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하나님 편의 선교적 취지를 달성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단순히 애굽이라는 대 제국의 그늘 하에서 학대와 멸시를 당하는 히브리 민족의 원한이나 복수를 감당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러한 약소민족을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한 구원의 일을 감당하시는 지를 보여줌으로써 온 세상이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의 법칙이 통용되는 역사의 진행과정을 보여주기 위함 이었습니다.  따라서 모세처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의 대행자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성품을 잘 반영하는 태도를 지녀야 했습니다.  사명을 감당하기로 결심하고 애굽에 있는 동족 히브리인들을 만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을 고하러 가는 길에 모세가 마주한 첫번째 시험 또한 그러한 취지의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충성과 헌신의 표시인 할례예식에 내포된 ‘언약’백성의 정체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할례는 사내 아이의 생식기를 거룩케 하는 표시로서, ‘피’가 의미하는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삼고자 하는 거룩한 삶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례 예식을 행함으로써 자기 자신은 물론 후손까지도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 것에 대한 평생의  결단입니다. 지금까지도 할례는 유대인들의 자기 정체성의 표현으로 간주됩니다. 이방 땅에 거하는 동안 자신의 자녀들에 대하여 미처 할례를 행할 기회를 갖지못하였던 모세는 그 일과 관련하여 일차적으로 애굽으로 향하는 길에서 하나님에 의해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그 순간 위기를 모면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늦게 라도 아들에게 할례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이 순전히 이방 여인인 아내 십보라의 공로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인으로서 모세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데에 오히려 이방인이었던 그의 아내가 큰 공헌을 한 것입니다. 누구든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에 있어서, 인간적 자격 기준에 따른 차별이나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일관되고 충성된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길 뿐입니다. 미디안 광야 40년 간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맏아들에 대한 할례의 의무감 마저 잊어버리고 살았던 모세에게 하나님과 맺은 언약백성의 후손이라는 점을 일깨워준 이방여인 아내 십보라의 행동은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참된 믿음을 토대로 하는 삶의 실천적 용기에 따른 것임을 보여줍니다.  소위 ‘천국 백성’이 되는 비결은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 믿음에 합당한 최선의 응답을 보이는 길 뿐입니다. 그 같은 거룩한 자기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일에 있어서 만큼은 십보라의 경우처럼,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우월할 수 있으며, 유대인들 편에서는 ‘이방인들’이 훨씬 더 의롭고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히브리인으로서 애굽의 황태자의 신분을 얻기까지 하였던 모세였지만, 그가 진정한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는 데에는 그의 이방인 아내 십보라의 총명과 용기 있는 행동이 절대적이었습니다.

‘남성’의 강한 면이 약해 보이는 ‘여성성’에 의해 구조되고 보완되는 경우가 수없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바른 ‘정체성’을 확립하는 길만이 구원의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서 자기 자신의 특성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사람의 성품과 행동거지 전반에 걸쳐서 태도와 색깔이 분명해야만 그만한 구원의 ‘확고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매사에 정체성이 분명한 성도의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매사에 그를 닮고자 하는 마음을 간직한 성도들을 가장 기뻐하는 분입니다. 샬롬!

4월 7일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출 2:6)

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 모세를 통하여 430년 간의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이라는 단일민족을 형성하기에 이른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께서 그를 의지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원형’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에 의한’ 구원 사건의 원래의 경험의 핵심 요소가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들으심’에 대한 경험입니다.  레위 족속 중 한 남녀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용모가 준수하여 사내 아이를 낳으면 나일 강 하수에 내다 버려 죽게 하라는 바로 왕의 명을 어기고 석 달 동안이나 아이를 집안에 숨기고 살았습니다.  더 이상 아이를 숨길 수 없는 처지가 되자 모세의 어머니는 마침내 그를 갈 상자에 넣어 나일 강 하수 가에 떠내려 보냈습니다. 

아기 모세를 넣은 갈 상자에 역청과 나무 진을 바름으로써 마치 노아 시대의 구원의 방주와 같이, 그들의 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기 모세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에게 구원을 베풀 자를 보내시리라는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히브리인 사내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듣고 금시라도 달려와 그를 해할 애굽 사람들도 있을 것이지만, 그 아이의 울음소리에서 히브리 민족 전체의 울부짖음과 탄식을 들으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자’를 예비할 것이라는 믿음이 앞선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 한복판에서 믿음을 따라 살아갈 때 마치 두 종류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만 같을 때가 많습니다.  인간의 폭력과 저주, 그리고 살인과 무자비함이 난무하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이 있는가 하면, 그 모든 일들을 여전히 구원의 은혜와 섭리로 주관하시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세계’가 또한 존재합니다.  마치 그 두 세계 가운데 끼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때가 많은데, 그럴수록 우리들 각자가 믿음의 눈을 뜨고 자신이 여전히 하나님과의 언약의 세계에 속한 자임을 알고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믿음은 인생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에 속한 자로서 삶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내 손으로 쌓는 것만큼만 내 것이라고 여기는 식의 생각을 갖고는 결코 믿음의 세계에 속할 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는 식으로는 곤란합니다.  세상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할 때에만 비로소 ‘믿음의 삶’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출애굽의 ‘구원’ 역사는 창세기의 ‘천지창조’의 연속입니다.  구원은 오직 창조적 세계관 즉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그가 시작하고 그가 마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 식’의 구원의 방법에 관한 이해를 갖고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죽음의 바다에 던져진 모세가 그 바다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았고, 히브리인들을 죽게 하는 애굽 왕 바로의 공주에 의해 그들의 구원자 모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부질없는 인간적 체면이나 자존심, 문화적 우월감이나 민족적 편견 등 모든 현실적 가치 기준을 초월하여 다만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을 돌보듯이, 우리 각자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 주실 것을 간청하고, 그러한 믿음의 세계관을 끝까지 유지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출애굽의 구원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세계관’의 승리에 관한 것입니다.  아기 모세의 울음소리처럼, 인생의 모든 상황을 초월하여 우리들 각자의 염원에 대해 끝까지 ‘들어 주실 자’가 있으리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곧 삶의 궁극적인 승리의 열쇠입니다.  믿음은 끝까지 나의 간구와 소원을 ‘들으시는’ 하나님과, 또한 그분의 소리를 듣고자 하는 우리들 자신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소리를 들으시고, 또한 내가 그의 뜻을 따라 행하는 과정 속에서 모든 불가능한 일들이 실행가능한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곧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와 소원을 들으시는 구원의 세계 속에서 사십시오.  성도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이 가능한 사람들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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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1일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마 27:22)

믿음의 책임 영역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오해 때문에 믿음생활 자체에 혼돈과 미숙함이 초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생활의 취지를 단순히 내면적 경건함이나 고요함의 유지, 혹은 조화와 질서와 같은 일상생활의 평정심을 위한 도구와 같이 생각한다면 믿음의 행위의 주체가 자기 자신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조절 가능한 범주 내의 감동과 교훈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근본 취지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삶의 유지와 그 기회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믿음생활의 주체가 결코 자기 자신일 수 없습니다.  

현재 자기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하거나 유익하다고 여겨지는 교훈과 가르침만을 좋는 식으로는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의 성취를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동기와 주체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 속에 내주하는 성령, 즉 하나님의 생각과 뜻의 대리자 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 하시는 성령의 내적인 깨달음과 감동이 우리들 자신을 지배하고 가르침으로써 다만 그분의 역할과 감동 감화에 따라 변화되는 우리들 자신의 삶이 있을 뿐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지배구조 속에서의 삶을 희망하는 내세지향적 삶의 소유자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 아니며 하나님의 뜻의 대리자이며 실천자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빌라도와 유대 군중들처럼 ‘그리스도라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에 의한 우리들 각자의 삶의 변화와 성숙의 열매를 지향할 뿐입니다.

빌라도와 백성을 선동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강요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처럼 믿음의 주체가 인간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한, 그러한 유형의 믿음은 단지 ‘종교적’ 차원에 속한 것으로써 상황과 처지에 맞는 형태의 처세술과 매너, 즉 ‘방법론’에 그치고 맙니다.  자기 자신이 주가 되어 스스로에게 유익한 한도 내에서의 하나님께 대한 명상이나 상상력만을 추구하는 것은 믿음을 단지 신적인 경건함이나 종교성의 차원에 머물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 자가 되셔서 우리들 각자의 생각과 이해의 범주를 초월하는 식의 판단과 감동을 줄 수 있어야만 비로서 참 생명의 범주에 드는 믿음생활이 가능합니다.  

경건한 유대인 아내를 두기까지 했던 빌라도가 그러한 믿음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며, 유다 백성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판결 자체의 불의와 부당성에 대해 모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에게 십자가의 죽음을 강요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 모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관련된 부인할 수 없는 책임 주체가 되고 만 것은 인간은 결코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다만 그 분으로 말미암은 삶의 변화를 추구해야 할 자라는 사실에 대한 의도적인 거절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로 말미암은 진정한 삶의 변화를 추구하십시오. 그가 아니면 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해줘야만 우리가 비로서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라고 묻는 대신에, ‘그리스도 예수여, 어서 친히 저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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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4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마 26:13)


수님 자신에게는 물론,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의 죽으심이 의미하는 인생의 한계상황에 대한 이해와 그것에 대한 반응이 참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가 됩니다.  신정사회 내에서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 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만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열 두 제자 가운데 수제자로 칭할 가룟 유다 마저도 예수님을 은 삼십 양에 팔아 넘길 계획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나사렛 예수의 죽음을 무가치하며 무능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반면에 베다니 지역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 중인 예수님을 찾아 간 한 이름모를 여인은 ‘매우 귀한’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으면서 그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류를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건져낼 메시아임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적 행동을 하였습니다. 

주님에게는 그녀의 행동이 마치 자신의 장례를 위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죽음’의 상징과도 같은 천형을 앓고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는 한 여인이 평생에 걸쳐 마련한 귀한 향유 한 옥합의 향기가 가득한데 비해, 대제사장의 ‘관정’에서는 도리어 그리스도를 해하려는 ‘살인’ 모의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가룟 유다의 마음은 배신과 거래의 욕심에 메어 있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나병환자’의 집에 거하는 예수님에게서 인류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한 결과이며, 따라서 당시 여인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헌신과 사랑, 그리고 존경을 표하였습니다.  그녀가 부은 향유 한 옥합이 건장한 남자의 1일 노동임금의 삼백배에 해당할 정도로  값비싼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녀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평생의 후견인 또는 반려자와 같은 마음으로 의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10절)는 말씀으로 그녀가 주님 자신의 대속의 죽으심의 의미와 가치를 바로 알고 있었음을 칭찬하였습니다.  그 여인이 한 행동을 ‘기념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행위에 내포된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대한 그녀의 인정과 경외심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가치기준으로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귀하고 값진 것이 바로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입니다.  삶과 죽음의 과정에 포함된 인생의 모든 요소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에 의해서 속량되고 회복됩니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는 믿음의 본질이며 특권입니다.  우리를 위해 친히 대신 죽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가능케 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 자신에게도 그 일이 최고의 기적이며 능력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의 공로에 힘입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죽음이 의미하는 한계상황이나 절망감에 메이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주님은 그러한 마음의 ‘메임’까지도 대신해 주십니다.  

대속의 죽음을 담당하실 그리스도에게서 지상 최대의 가치와 능력을 깨닫는 것이 참된 믿음의 표현이며 비결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믿음의 삶의 여정에 수반하는 모든 인간적 어려움이나 연약함을 오히려 하나님께서 베푸실 대속의 은혜와 능력을 확인하고 감사하며 축하하는 삶의 계기가 되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친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대속의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분에 의해 영원토록 기억되는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그분께서 기억해주시기만 하면 우리의 삶은 반드시 영원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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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7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


태복음 24장과 25 장에 기록된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의 가장 중요한 강조점은 종말이 하나님 편의 분명한 목적과 계획을 지닌 것이라는 사실 입니다. 별안간에 닥쳐오는 피할 수 없는 현실과 같은 종말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오래도록 계획되고 준비된 시점으로서 종말에 관한 이해를 촉구합니다.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으리이까” (3절)라는 제자들의 질문에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이 세상의 종말이 일종의 연속과정이라는 암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시작될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을 위한 ‘새로운 시작’으로서 종말을 가리킬 뿐, 그냥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마는 식의 혼돈과 무질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매사에 하나님 편에서 미리 그리고 철저히 준비된 과정의 완성과 같은 것이 바로 종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다 백성들의 경우처럼 예루살렘 성전의 몰락과 거짓 그리스도의 출연, 또한 그로 인한 온갖 영적인 차원의 혼란, 기근과 재난, 또는 난리의 연속,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의 확대 및 그로인한 성도들의 핍박, 수많은 사람들 간의 분쟁과 불화, 그리고 온갖 불법의 난무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삶의 위험 요소들이 다분히 하나님 편에서 정해진 시점 까지 해당할 뿐입니다. 주님의 재림과 함께 다가올 세상의 끝을 잘 맞이 하는 일과 관련하여 유난히 마태복음 내에서 ‘주의하라,’ ‘아직,’ 또는 ‘그제야’ 라는 식의 정한 시점을 가리키는 문구가 자주 사용되는 이유입니다.  종말을 맞이하되, 그것을 계획하고 준비한 주님 자신의 의도 대로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의 구원자요 회복자인 그리스도 자신의 계획 상 세상의 끝은 다분히 모든 것이 끝나는 때가 아니라, 이미 도래한 새로운 시대의 완성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하는 때 입니다. 그러기에 ‘끝까지 견디는 자’ (13절) 라는 표현 역시 단지 그 때가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출현을 위한 계획적인 인내와 연단, 그리고 소망의 충실함을 의미합니다.

이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가 바로 천국 복음의 전파를 통한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상의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교훈에 있어서 두 가지의 필수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종말의 보편성과 신앙공동체의 전도의 의무에 관한 것입니다. 성도는 개 교회공동체에 속한 자들로서 지역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 모든 민족을 향한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의 사명과 책임감을 지닌 존재 입니다. 현재의 세상의 소멸과 새로운 세상의 출현을 위한 가장 확실하고 의미 있는 삶의 방식이 바로 구원의 복된 소식을 증거하는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편에서 계획된 종말을 맞는 책임 있는 성도의 삶의 방식입니다. 마태복음 내에서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이 23장까지 이어진 타락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이후에 등장하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운명의 끝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까지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염원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종말을 대비하는 성도의 삶의 핵심이라는 뜻에서 입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종말을 위한 노력과 투자를 아끼지 않는 마음가짐으로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의 의무를 감당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천국 복음 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는 말씀은 이 세상 종말의 때까지 지속되어야 할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와 능력, 그리고 성도들의 복음에 대한 열심의 필요성을 강조 합니다. 종말이 의미하는 삶의 혼돈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내포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의 속성을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의 진정한 능력이며 지혜의 원천입니다. 복음이 의미하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일관성을 신뢰하는 마음이 특별히 종말의 한계상황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으로 삶의 온갖 종말론적 혼돈과 어지러움을 이겨내는 성숙하고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복음의 약속을 믿는 믿음 안에서의 삶의 가치와 능력만이 영원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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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 22:14)


수님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혼인잔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출연을 의미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임금과 같다고 말씀 하신 것은 그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 하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나 자신의 삶의 내용이나 특성과 관련 없이 동 떨어진 미래의 일과 같은 것이 아니며, 과거의 우리들 자신의 잘, 잘못을 기준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더불어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순전히 ‘현재적인’ 우리들 각자의 결심과 책임 여부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임금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청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생활 습관을 고려할 때, 그들에 대한 최고의 예우가 베풀어 졌음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의 초청은 처음 것보다 훨씬 더한 차원에서 예의와 존경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청함 받은 자들은 임금의 초청의 ‘우선순위’를 배제하였으며, 그 초청 자체의 자비와 은총의 의미를 순전히 이기적이며 폭력적인 욕구에 의해 무시하고 거역하였습니다.  청함을 위해 보내어진 종들을 죽이기까지 하였다는 것은 임금의 의도에 대한 완전한 반역을 일삼은 것입니다.  그 무리들에 대한 필연적인 심판 후에도 여전히 또 다른 하객들을 찾기 위해 종들을 네거리로 보낸 것은 그 잔치에 합당한 하객들, 즉 ‘택함 받은’ 자들을 찾기 위한 임금의 끈질긴 노력의 표현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그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을 찾기 위한 신적 자비와 긍휼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거리 초청객들로 가득 찬 혼인 자리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다는 지적은 즉석에서 수락한 초청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복을 갖춰 입었음을 의미합니다.  

즉석에서 이루어지긴 하였지만,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하객으로서 최소한의 외형적인 조건을 갖춘 것입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12절) 라는 말에는 최소한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악한 자나 선한 자에게 모두 임금이 친히 초대한 아들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자격이 주어지지만, 그 자리에 합당한 예복을 갖춰 입는 일만큼은 청함 받은 자의 현재적 의무이며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예복이란 두말할 나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 즉 그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힘입는 삶을 가리킵니다.  하늘나라가 의미하는 인생의 ‘종말론적’ 기쁨의 자리에 들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제공하는 대속의 의의 옷을 덧입는 것입니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대함에 있어서 예수그리스도는 핑계 할 수 없는 하나님 편의 자격 기준과 같습니다.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의 모든 성도가 입을 최종적인 예복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옷입니다. 

만 왕의 왕 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를 택한 이상, 과거의 불행이나 실수, 심각한 잘못까지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이미 우리를 다 아시고 성도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아직 오지않은 미래의 불안감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지금, 온갖 몸과 마음의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혼인 잔치에 대한 왕의 초청과도 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어떻게, 누구의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 준비하고 응답할 것인지의 여부입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인생의 모든 문제의 돌파구를 찾으십시오.  정말로 우리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공로 뿐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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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 19:30)


 자 청년을 비롯한 유대 사회의 주류 층에 속한 사람들 대부분이 천국과 영생을 인간의 의지적 노력의 산물인 것처럼 이해하는 데 비해서, 예수님은 그 나라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의해 움직여지는 곳이라고 말씀합니다.  은혜란 말 그대로, 전혀 자격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다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긍휼히 여기심에 의해 모든 것이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곳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의해 모든 것이 주도되는 까닭에, 무엇보다 그분의 성품과 의지를 잘 아는 것만이 천국에서의 보상과 기쁨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매사에 그분의 은혜의 원리를 믿고 따르지 않으면 삶의 모든 면에 걸쳐서 뒤쳐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일꾼’의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자신들의 노력과 수고에 대한 보상은 순전히 주인 되신 하나님의 너그러움과 충분한 자비의 영역에 속한 것인 줄 알고, 그의 보상의 원리나 방법에 대한 추호의 염려나 불신 없이, 그저 일할 수 있는 기회와 특권이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 하는 것만이 능사입니다. 

믿음의 여정에 있어서 잦은 불평과 불만은 항상 하나님 편의 보상의 원리를 우리들 자신의 상대적이며 주관적인 방식에 따라 이해하고 비판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비단 물질의 영역에서만 아니라, 인간 내면의 온갖 상호작용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의 우월성을 앞세울 때에 일체의 갈등이나 번민이 사라집니다.  지극히 공평 타당한 하나님의 은혜의 속성을 알지못한 체, 인간 스스로 은혜의 원리에 버금가는 자격이나 공로, 그리고 의로움의 여지들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결국 스스로 은혜의 자리에서 멀어지고, 결국 나중 된 자, 즉 뒤쳐지는 삶을 살도록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들 자신이 오직 주인 되신 하나님의 자비와 성실함을 매개로 삼고 다만 그의 뜻에 따라 최선을 다 해 일하는 책임만이 주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의 한계나 능력에 대한 우리 위주의 평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인생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다만 주인 되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기쁨과 감사와 믿음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기회이며 선물이라는 생각을 간직할 때 오히려 온갖 자기 한계에 대한 이해를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마음가짐의 소유자들에게 설혹 ‘나중 된 자’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먼저 된 자’가 될 수 있는 기회와 기쁨을 제공합니다.  인간의 공로위주의 보편적 상벌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의 법칙을 초월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매사에 자기 처지에 대한 실망이나 자포자기 대신에 희망과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온갖 유형의 인생의 한계를 하나님의 신실성을 근거로 희망과 감사의 이유로 삼고, 매사에 더욱 최선을 다해 기어이 ‘먼저 된 자’가 되게끔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사십시오.  성도는 이 땅 위에서는 나중 되었을 지라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항상 ‘먼저 될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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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4일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마 17:8)


수님께서 12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임을 자인하는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 자신의 영광 중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은 그들이 메시아의 참된 영광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변형된 예수님과 함께 모세와 엘리야가 더불어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고 했는데 (3절), 모세는 율법의 권위를 대변하고, 엘리야는 예언의 화신과도 같은 상징적 인물입니다. 그들을 위하여 각각 초막을 짓고 그 영광을 기리고자 했던 베드로의 의사와는 반대로 산 위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5절) 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두말할 나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의 은혜를 가치와 능력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가 상징하는 율법과 예언으로 다 이룰 수 없는 인간의 완전한 구원의 능력과 영광을 이룩한 분입니다. 비록 그의 죽음이  모세나 엘리야의 최후와 달리 표면적인 영광스러움이 전혀 없는 것이었지만 그 내용과 실체에 있어서 만큼은 모세와 엘리야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계획의 완성을 가져왔습니다. 모세와 엘리와의 영광이 사라진 후 주님의 영광만이 제자들의 눈에 비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성도라 할

지라도 믿음 생활의 문제점과 혼돈의 이유 대부분은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 편의 대속의 원리와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판단과 정죄의 기능을 통한 현재적 비판의식이나, 예언의 취지에 따른 미래의 구상과 희망에도 불구하고 삶의 모든 불의와 불안전함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용서와 긍휼의 원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진정한 믿음의 초월을 이루지 못합니다. 율법의 의로도 예언의 투철함으로도 인간의 죄와 허물, 그리고 불의한 본성에 대한 대속의 씻음과새로움울 이룩할 수 없으며, 혹 그리 한다 해도 그들의 죽음이 우리를 대속 할 만큼 의롭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그만한 능력과 사랑의 충만함을 간직한 분입니다. 오직 그분만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영광을대리할 자입니다. 천하의 어느 누구도 그의 가치와 능력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이 오히려 그분만 누릴 수 있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능력과 영광의 실체인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 추구하는 복된 미래의 영광은 그 어떤 현재적 불안함과 불의함에 의해 결코 소멸되거나 위축되지 않습니다. 이점에 있어서 아무런 혼돈이 없어야만 예수를 바르게 믿고 바라 볼 줄 아는 성도입니다. 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일이 매개가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속량받은 그의 자녀로써의 영광과 가치를 상실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줄 알아야만 성도의 보는 눈이 타락하지 않습니다. 매사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말씀을 토대로 올바른 영광의 실체를 바라 볼 줄 아는 마음가짐을 간직하십시오. 사람마다 임종의 순간에 마지막까지 활동하는 기능이 청력 입니다. 참된 것을 바르게 들을 줄 알아야만 또한 참된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늘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는 복된 눈의 소유자가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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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7일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마 14:19)

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에 대해 신적인 의미를 배제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굶주린 무리를 먹이시고자 하는 그의 정성에 감복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몫으로 간수해 온 것을 하나 둘씩 내어 놓기 시작하였는데 결국 그것이 모두가 함께 먹고도 12 광주리에 차고 넘칠 정도의 양이었다고 말합니다. 메시아의 기적이라기보다, 사람들 속에 잠재한 사랑과 너그러움의 발로였다는 것입니다. 매사에 인간사의 문제점을 인간 스스로가 해결할 마음가짐을 가져야지, 기적이나 계시와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추구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전세계의 빈곤과 기아의 문제가 대부분 ‘분배’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데서 기인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언가를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사람들끼리 서로의 마음을 움직이는 식으로 삶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하고 현실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단지 사람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러한 식의 이해와 해결방식이 타당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하늘을 향하여 축사하시면서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주신 양식은 결코 육신의 배부름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무려 40일 간이나 굶주리면서도 돌덩이가 떡 덩어리가 되게끔 하라는 사탄의 유혹을 금하셨던 분입니다. 그러한 그가 수많은 무리들의 눈과 귀가 온통 자신에게 향하고 있던 그 순간 자신의 손에서 기꺼이 떡을 떼어 먹게 하신 것은 광야 ‘빈들’ (13절)이 의미하는 삶의 한계상황에서 인간의 근본 필요를 채우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식탁은 광야 빈들에서의 양식, 즉 하늘의 생명 양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13절의 “예수께서 들으시고”라는 말씀은 주님의 길을 예비할 자로 보내심을 받은 그의 친족 세례 요한의 억울한 죽음에 관한 소식을 의미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로 가신 이유는 아마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의 모순과 갈등으로 인한 주님 자신의 마음의 황량함을 달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거주 지역과 비거주지역의 ‘경계’와도 같은 광야 빈들의 지형적 특징과도 같이, 우리가 살다보면 이상과 현실이 도저히 마주할 수 없는 것만 같은 특별한 삶의 처지에 속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육신의 양식으로는  도저히 채울 길이 없는 심정적 가난과 빈곤함 때문에 허덕이는 일들도 많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물질세계에 속한 나 자신의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삶의 필요성에 대해 눈을 뜨게 됩니다.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이 바로 주님의 ‘긍휼하심’입니다 –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14절).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갖 인생의 목마름으로 인해 굶주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사실이 바로 삶의 새로운 차원의 만족과 배부름의 근원입니다. ‘사람이 먹는 음식이 곧 그 사람 자신’ (You are what you ea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존재의 근원을 밝혀주는 말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과연 어떤 식으로 발생했는 지에  관한 성경의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하늘을 향하여 ‘축사’ (bless)하셨다고 말합니다. 주님과 함께 광야 빈들에 선 그들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호의를 입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우신 것입니다. 광야 빈들이 하나님의 호의를 입는 백성으로 거듭나기 위해 꼭 필요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광야와 같이 힘들고 괴로운 삶의 여정이 오히려 우리들 각자의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 자들로의 변화를 위한 곳일 수 있습니다. 주님 계신 그곳까지 따라 나선 무리들처럼, 광야 한 복판이라도 그를 모시기만 하면, 적막한 빈들에서 모두가 함께 먹을 것을 나누는 삶의 여유와 기쁨이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광야 빈들과 같은 세상살이 한 복판에서 주님을 모심으로 인해 항상 그가 베푸시는 생명의 양식으로 배부른 삶을 사십시오. 육신으로 많이 먹어서 배부른 인생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의해서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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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 12:37)


람이 하는 말의 중요성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대상의 실체를 구성하는 능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하기 위해 선택한 언어나 단어를 통하여 자신이 생각하고 이해하는 대상의 속성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말에 대하여 책임을 갖는 다는 것은 자신이 말한 바대로 이행할 뿐만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판단을 간직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순전히 자기 자신의 편의대로가 아니라 상대방의 가치와 기능을 제대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말의 지혜를 뜻합니다. 그런 점에서 말처럼 하기 쉬운 것이 없는가 하면, 또한 말처럼 제대로 하기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 신앙의 표현 중에서 인간 창조와 관련한 하나님의 위대성을 표현하는 가운데 ‘말씀만으로’의 창조 대신에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신 사실을 들곤 합니다.

말씀 자체가 창조주의 유일한 권한인데 비해 하나님께서 몸소 사람의 형체를 빚는 수고를 감당하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만큼 특별한 방식으로 인간을 대하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말이 항상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책임을 다 하는 것이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눈멀고 벙어리 된 자들로 하여금 바로 보고 바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시는 분입니다. 이는 육신적으로만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인류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이브의 원죄에 대하여 자신들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사탄의 유혹에 이끌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체 영적으로 소경과 벙어리 된 처지에 들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메시아는 죄로 인한 상한 마음 때문에 창조주는 물론 이 세상 그 무엇도 올바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말할 수 없는 인간의 말의 기능을 회복하시는 분입니다. 눈멀고 말 못하는 것이 귀신이 들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유대주의적 관점 역시 이러한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사람이 매사에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마음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온갖 혼돈스럽고 사악한 이 세상의 영들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신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라고 칭하는 무리들의 소리를 듣고 바리새인들은 도리어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힘입어 기적을 행하는 자라고 모욕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그같은 행동은 다름아닌 그들의 마음의 질병 즉 병적인 심령상태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리켜 악하다 (35절)라고 표현한 말 역시 행위의 부적절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타락한 마음상태를 지적합니다.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인한 인간의 삶의 종말론적 차원의 변화, 즉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대한 거부 심리가 작용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참된 긍휼과 대속의 사랑에 대하여 온통 눈멀고 벙어리 되게 만드는 귀신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인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반역과 도전 심리가 바로 인간을 눈멀고 벙어리 되게 만드는 귀신의 속성과도 같은 마음의 부패성의 요인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유일한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지배원리만 작용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주장처럼 불신과 반역으로 일관하는 사탄의 왕국의 사악성과 부패성은 하나님 나라의 지배원리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대안이 될 수도 없습니다. 때로는 좌우 형편이나 앞뒤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전적이며 즉각적인 순종과 헌신이 요구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의 삶입니다. 절반 뿐인 헌신이나 이후를 기대하는 식의 태도는 결코 용납되지 않습니다. 어리석음은 허용되지만 소극적인 것은 허용되지 않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들 자신을 포함하여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과 사람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 말하는 의무와 책임을 결코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도록 보내심 받은 자신을 말로 거절하는 죄는 사함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일자체의 특성과 기능을 나타내는 성령을 거역하는 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사물의 실체를 구성하는 사람의 말의 중요성이 그만큼 크다는 뜻입니다. 많은 이해와 생각이 교차하는 중에 먼저 하나님의 영의 감동이 자신의 말을 지켜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사람의 생각을 담는 그릇인 말이 건전하고 진실해야만 삶이  바른 방향,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말입니다. 항상 성령 안에서 말의 의로움을 경험하고, 의로운 말로 의로운 삶을 건져내는 삶을 사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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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마 9:36)


태복음 8, 9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병 고침 사역의 마지막 부분이 소경과 벙어리 된 자를 낫게 한 사건에 관한 것입니다. 인간의 감각 기능의 두 가지 대표 영역인 눈과 입이 가리키는 가장 기본적인 차원의 이해와 판단 그리고 의사표현의 기능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간섭, 그리고 변화의 능력을 경험해야함을 일깨워 줍니다. 보고 듣고 말하는 기본적인 감각 기능이 창조주 하나님에 의한 변화의 역사에 힘입어야만 하나님의 백성답게 바로 보고, 바로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말할 수만 있어도 성도의 삶의 가치와 존엄성이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보는 것과 말하는 것은 서로 책임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써, 이는 주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만을 보고 말해야 하는 성도로서 당연한 책임을 의미합니다. 참 성도라면 매사에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해서도 안 되며, 또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거나 말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항상 주께서 보이신 것을 그의 뜻대로 보고, 또한 그의 마음을 대신하여 말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필수적입니다. 공생애 삼 년간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배우고 익힌 내용의 전부가 바로 올바로 보고 올바로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보이신 것을 그의 뜻대로 바로 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을 그를 대신하여 말한다는 것은 다름아닌 ‘예수님 처럼’ 말하고 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처럼 보고 말하는 것의 대표적인 의미가 바로 이 땅위의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즉 동정과 자비의 마음입니다. 마태복음 상의 예수님 자신의 메시아로서 ‘삼 중의 사역,’ 즉 가르치며 전파하고 고치시는 사역이 모두 이 땅 위의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뜻으로 사용된 말은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의 요동’을 가리키는 표현 입니다. 메시아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천국 창고에 들일 알곡과 같은 존재들이었는데 반하여, 예수님 당시의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는 그들이 마치 ‘가라지’와 같아서 뽑아내 버리고만 싶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좀처럼 죄인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의 마음이 생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죄인들을 정죄하고픈 의무감만 가질 뿐, 그들을 구원하여 새 사람 되게할 책임감과 열망은 갖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기대하고 바라는 메시아, 또는 그들이 소망하고 추구한 하나님의 구원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이고자 하신 참된 구원과는 거리가 먼것이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보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 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율법에 의하여 정죄된 온갖 죄인들을 포함하여 세상 만민을 대하여 끝까지 구원과 사랑의 관점으로 대하는 대속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고, 또한 그의 입을 대신하여 그가 말하고자 하는 마음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처럼 대속의 마음 가짐을 갖고서 하나님의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바로 복음의 일꾼이며, 주님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께 더 많이 보내주시기를 청한 사람들입니다. 매사에 주님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염원을 이해하고 그의 뜻에 적극 동조하여 한생명이라도 더 하나님 나라의 알곡 창고에 들이기 위해 힘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에게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말할 수 있게 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로 그들이 보는대로 말 하지 못하고 온갖 종교와 이념적 편견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리스도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한 바리새인들은 보는 것도 말하는 것도 믿음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행한 처지를 대변합니다.

주님께서 보이신 것을 주님 편에서 말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의 백성의 삶의 전제 조건 입니다. 매사에 주님만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대언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십시오. 자신이 보고싶은 대로 보지 않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십시오. 매사에 주님이 보이신 것을 주님의 뜻대로 말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보는 것과 말하는 것이 일치 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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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7일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11)


도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을 바로 이해함에 있어서 꼭 짚어봐야 할 사항 중 한가지가 바로 인간의 필요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이해의 우선순위에 관한 것입니다. 성도가 순전히 ‘자기 자신의 필요 때문에 기도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며, 그를 더욱 잘 알고자 하는 이해의 토대 위에서 기도 하는가 라는 문제입니다. 정확한 대답은 그 두가지모두여야 하겠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 크리스천들을 대상으로 하는 마태복음의 취지상 사람마다 필요에 의한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토대 위에서 하는 기도는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주님의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성도의 기도는 마땅히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토대 위에서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을 담대히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그의 백성을 가까이 하시는데 그 가까움이 마치 사람의 입이 귀에서 가까운 것과 같습니다. 도대체 남의 말을 듣지않는 사람들의 입처럼 위험하고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친근함을 내세우면서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뜻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 없이 다분히 자기 자신의 인간적 필요에 의한 것 만을 구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친근감을 담은 대접과 하나님의 뜻과 지혜가 담긴 두 개의 대접에 담아드려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 자신의 마지막 간구의 내용처럼 우리의 기도가 우리들 자신의 필요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모든 기도가 하나님을 더욱 잘 알기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아는 지혜 가운데서 그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기도는 반드시 복종과 헌신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의 의지만큼 기도할 수 있으며, 또한 누구든 진심으로 기도하는 만큼 하나님의 뜻에 대해 복종할 수 있습니다. 의인처럼 기도하면서 죄인으로 살 수 없고 죄인처럼 살면서 의로운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참되고 거룩한 것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바르고 참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황금율’로 불리우는 서로에 대한 자발적인 대접의 필요성을 기도의 열매처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12절). 성도라면 자신이하나님께 간구하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만큼 자기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염원을 살피고 이행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죄 사함을 바라는 간구자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든지, 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속 마음을 알아 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힘든 처지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면 기도는 물론 성도의 삶 자체가 다르게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간절하고 진실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잘 알아가는 성도가 되십시오. 또한 하나님을 아는 만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필요성을 잘 헤아리는 삶을사십시오. 구하는 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함이지만, 찾는 것은 하나님의 뜻, 그리고 두드리는 이유는 우리를 향한 그의 구원의 문을 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기도하는만큼 살고, 참된 삶을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한 성도는 기도의 내용과 삶이 항상 하나입니다. 그와같은 기도는 이미 하나님의 응답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기도로써 모두의 마음을 헤아리고 열매맺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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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3).


태복음 5 장의 산상수훈의 첫 구절에서 예수님은 현대의 소비문화에서 쉽게 이해하기 힘든 단어 인 ‘축복’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축복은 일반적으로 쾌락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행복’과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행복과 축복은 겹칠 수 있지만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복있는 사람’의  상태와 조건을 나열한 산상수훈 어디에도 감각적인 차원의 행복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요소들은 없습니다.  산산수훈 자체가 행복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축복에로의 약속입니다. 가난과 애통, 그리고 주리고 목마르며, 또한 핍박을 받는 일들을 당연시 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유익하고 참된 복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이유에서 소위 행복의 ‘조건’을 초월한 차원에서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축복은 정말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모든 약속이 하나님 나라로 시작하고 끝납니다 (3 절과 10 절).  그 약속의 전제가 바로 예수님께서 친히 선포한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 4:17)는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은 결국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의 새로운 삶의 질서와 특징으로서 축복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공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의 삶의 축복은 부귀와 건강 또는 지위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인간적 의로움이나 책임감에 대한 보상도 아닙니다.  축복은 다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단지 미래에 주어질 종말론적 선물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순간마다 현실적으로 주어지는 삶의 구성요소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영접한 자의 삶 속에서 달라질 현실의 삶의 내용과 특징이 바로 축복의 의미입니다. 실제로 ‘복’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 ‘마카리오스’ 는 그 자체로 충분한 더할나위 없는 복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할 때, 가난이란 말 자체가 ‘절대 빈곤 상태’를 의미합니다. 도와줄 자가 없어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따라서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마음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마음가짐을 간직한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어,

그 나라에 속한 자들만 누릴 수 있는 온갖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삶 속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확립됨으로써 절대 빈곤의 상태에서도 최상의 삶의 특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힘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한 축복을 경험하는 자들의 삶은 모든 물리적 환경의 지배를 초월합니다. 하나님 편의 참된 의를 이룩하기 위해 겪는 박해까지 마땅한 것으로 여기면서 오히려 그러한 핍박의 경험이 없는 자들보다 자기 자신을 더욱 복된 사람들로 여기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삶의 ‘조건적’ 산물인 행복보다 오히려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고 가르칠 수 있는 하나님의 복, 즉 축복을 구하십시오. 다른 모든 삶의 구비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어도, 스스로를 하나님의 인정과 그의 은혜의 선물이 없이는 한 시도 살아갈 수 없는 자로 여기면서 그가 친히 삶의 ‘충분 조건’이 되어주시기를 갈망하십시오.

인생의 참된 부요함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면, 온갖 삶의 악조건들이 다만 감사 찬양의 이유일 뿐입니다. 이런저런 조건들을 앞세우며 일일이 거기에 맞는 복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복있는 사람’이 되고 나면, 행복은 정말로 우리의 마음가짐에서 비롯됩니다. 심령이 가난하여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되면 삶은 항상 행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이 세상의 행복만으로는 결코 복있는 자의 삶의 특성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복된 사람’이 되어 스스로 행복을 결정짓는 참 성도의 삶을 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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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3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마 1:24)


수님의 탄생은 새로운 세상의 출현을 위한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메인 인생의 지배원리를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영적인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는 새로운 삶에로의 초대 입니다. 그런 뜻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이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꿈을 꾼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 자신의 꿈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도, 다윗을 통해서도 미처 다 이룰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즉 그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거듭 태어나기를 바라는 하나님 자신의 꿈과 소원이 실현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정혼만 하였을 뿐 아무런 육체관계도 없이 되어진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발견하고 가만히 끊고자 한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이른 말씀은 결코 ‘현실’로의  초대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꿈으로의 초대’입니다. 최소한 요셉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은 그의 정혼녀 마리아에 대한 ‘신뢰’ 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네 아내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는 천사의 권고는 마리아의 의심스러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남편으로서 자신의 정혼녀인 마리아를 신뢰하는 일에서부터 하나님의 꿈을 실현하는 방안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온전한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 반드시 거창한 능력이나 희한한 기적을 매개로 삼는 것은 아닙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일상에서의 신뢰와, 하찮은 것이라도 그들의 꿈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될 때가 많습니다. 사람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꿈을 자기 방식대로 꾸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꿈을 순전히 그의 소원과 계획대로 꾸기란 여간 어렵습니다. 여인의  존엄성이 일방적으로 무시되는 유대 전통의 가부장적 사회구조 속에서 요셉은 ‘부정한 여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수 밖에 없는 그의 정혼녀 마리아를 통하여 이루어질 하나님의 꿈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일을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모든 인간적 고뇌를 마땅히 감수하였습니다.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라는 말씀은 ‘동정녀 무흠설’을 뒷받침하기 위한 이론적인 변명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꿈을 현실화하는 데에 필요한 요셉 자신의 인간적 수고와 인내의 대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수고와 인내가 사실은 하나님 자신의 수고와 인내를 반영합니다.

요셉처럼 하나님도  몇 번 씩이나 참고 또 참으시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를 위한 완전한 구원의 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영접한다는것은 바로 하나님의 꿈에 대한 우리들 각자의 동의와 협력을 나타내 보이는 일입니다. 우리들 자신을 포함하여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마땅히 구원받을 하나님의 사람들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동조와 적극적인 협력의 삶을 살기로 작정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믿음 안에서 항상 하나님 편의 위대한 일의 가치를 끝까지 신뢰하면서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매사에 꿈과 소원,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방법과 취지까지도 하나님의 생각과 같아야만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 됩니다. 요셉처럼 ‘하나님의 꿈’을 꾸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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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6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요일 4:2)


도 요한의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혹은 ‘시험하라’는 훈계는 단순히 성도들 간에 이단 시비를 벌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의 참 뜻은 우리의 믿음과 삶이 과연 하나님의 것인지, 즉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반드시 그의 진리에 기초하고 그의 진리에 속한 방식대로의 사랑에 중점을 둡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만이 하나님의 진리를 가장 완전하게 드러낸 사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내포된 하나님 자신의 ‘참된 사랑’을 위한 책임과 의무를 다한 사실에 있습니다.

창조주이며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을 회복시키는 데에 있어서 순전히 인간의 입장에서 매사를 살피는 식으로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하나님 편의 기준을 따르자면, 하나님의 아들이 굳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거기에 수반하는 온갖 육체적 한계와 괴로움을 겪을 필요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그 외의 방법으로도 대속의 기능이 얼마든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피조물인 인간의 연약함을 고려하여, 그리스도 자신이 가장 인간적이고 육체의 한계를 모두 허용하는 방법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사랑의 방식에 있어서 단지 영적이거나 심리적으로만 아니라, 육체적 방식에 따라 온갖 수고와 인내, 그리고 희생과 연단을 각오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피차 사랑의 대상을 위한 육체적 희생과 헌신을 전제하지 않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독생자를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나게 할 정도로 현실적인 수고를 감당하였는데, 하물며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함에 있어서 육체의 수고를 각오하지 않는 것은 사랑을 위한 노고의 가치 자체를 부인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과 함께 그 사랑이 반드시 진리 안에서 행하여지도록 당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이 하나님께 속하고 그에게서 비롯된 영인 이상 성령의 감동과 가르침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진리를 반영하기 마련입니다. 성육신의 의도와 동기를 고려하지 않는 방식의 사랑은 결코 성령의 감동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낭만적인 감정에만 치우친 나머지 성육신의 수고를 감당하는 하나님 편의 사랑의 가치를 부인하지 않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순전히 자기 자신에게 편안하고 즐거운 것만을 추구하면서, 상대에게 그러한 방식의 사랑의 요구를 일삼는 것은 결코 진리에 속한 사랑이 아닙니다. 성도가 구해야 할 사랑의 방식이 결코 아닙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육체로 겪어야만 하는 모든 수고와 인내, 그리고 희생을 감당하신 것처럼 참 사랑의 수고와 인내를 진리를 따라 행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영적인 것만 있고 육체의 수고와 책임이 없는 사랑이 아닙니다. 최소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개시된 하나님의 진리는 영과 육의 완전한 조합을 통한 것이지 그 둘 중 어느 한 가지를 결코 배제하지 않습니다.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방식으로 해야 할것이며, 누군가를 사랑하되, 그 사랑 역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방식으로 해야 할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라도 피차 더욱 더 하나님의 진리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에 있어서 진리 안에서의 영적 감동과 그것의 열매를 위한 육체적 희생과 노고까지 감사히 여길줄 아는 사랑의 실천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몸으로만, 또는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 전부를 다해서 하는 것입니다. 독생자의 목숨을 친히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드리고 감사히 누리는 전제 위에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참 사랑의 영적이며 또한 현실적인 의무와 책임을 감당하는 ‘진리 안에서’의 사랑의 실천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