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삶 ‘2020’

이현훈 목사

11월 18일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은 이러하니이다” (단 2:28)

을 꾸었으나 그 의미와 해석을 알지못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처럼, 인간은 온갖 시공간의 제약으로 인하여 자신이 바라는 바 꿈과 소원의 실체를 알지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라는 것만 있을 뿐, 소원의 이유와 목적, 그리고 그 가치의 진정성에 대한 이해도 제각각일 때가 많습니다. 남들이 모두 좋다고 해서 열과 성을 다 해 소원을 이루었는데, 그것이 정말로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이었는지, 또는 유익한 것인지조차 모를 때가 많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롬 7:15). 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현실적인 것이건, 비현실적인 것이건 간에, 인간이 바라는 모든 유형의 꿈과 소원의 실체는 오로지 창조주 하나님과의 연관성 하에서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의 뜻과 계획에 합당한 것이라야만 소원의 진정성과 가치를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한시적인 삶을 살다가 갈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로서,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고려하는 식으로는 어떠한 꿈과 소원의 가치도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대개의 경우 꿈과 소원은 희망적입니다. 스스로 불행하고 불길한 삶을 위해 꿈을 꾸거나 소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꿈과 소원은 자기 자신에게 유익하고 행복한 것을 이루고자 함입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의 소원과 꿈이 유익하고 행복한 것이 되기위해서는 반드시 창조주의 의도와 계획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땅 위의 모든 인간의 삶의 궁극적인 행복과 번영을 기원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선한 뜻을 그 마음에 품는 자라야만 그의 소원과 꿈이 유익하고 희망적일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꿈의 내용도, 그 의미도 도대체 알 수 없었던 바벨론의 지혜자들과 술객, 그리고 박수와 점장이들의 한계는 ‘은밀한’ 것의 가치를 앞세우면서 너무도 분명한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배제한 데에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의 내면적 어둠에 가려 밝은 대낮의 환함을 인정하지 않는 격입니다. 실제로 점장이들이 구하는 점궤와 징조는 대부분 인간의 삶의 경험적 실재들의 통계를 바탕으로 합니다.

확율의 법칙에 따라 말하고 예측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경험이라는 것이 지극히 제한적이고 주관적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점장이의 점궤가 막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예외적인 이치와 같습니다. 자기 운명을 점치는 점장이는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확율이나 보편성의 법칙에 의한 일반화를 거부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 때문입니다. 불길한 징조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염원입니다.

자기 자신은 벗어나기를 바라면서, 다른 사람들은 온갖 징조와 점궤에 메이도록 하는 것은 가장 초보적인 윤리의 법칙에도 맞지않습니다. 성경이 점치는 일을 엄히 금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신 13:1-5). 느부갓네살 왕의 꿈에 대한 다니엘의 해석은 한 마디로, 역사의 주관자인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을 포함하여, 인간의 손으로 지은 모든 세상나라는 항상 그 끝이 도래해 있으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의의 도래를 위한 전초기지와도 같이, 용도가 다 하면 허물어져 초개와 같이 없어지고 말리라는 것입니다.

개인으로나 국가적으로나, 그 운명의 지속을 원한다면, 모든 얽메임의 원리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와 해방, 그리고 새로움을 도모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꿈은 전혀 은밀한 것이 아닙니다. 은밀한 것을 좋아하고 따르는 그의 심성의 어두움 때문이었습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치와 순종을 전제하지 않으면, 그의 삶의 속성 또한 어둡고 은밀한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어둠 속에 앉아 있으면서 삶의 밝고 바른 이치를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 내면의 은밀함을 벗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일치 뿐입니다. 최소한 자신의 꿈과 소원의 확실함을 위해서라도, 늘 주님의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사십시오. 온갖 생각의 실타래에 의한 마음의 혼돈과 어둠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참 생명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삶을 사십시오. 지극히 이기적이고 부도덕한 미신과 징조를 앞세운 점장이들의 운명론의 장난에 메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인생을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약속에 기초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스스로 감추고 속이기 좋아하는 ‘은밀한’ 것의 미혹을 떨쳐버리고, 햇빛처럼 환하고 밝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약속에 의지하는 참 성도의 삶을 사십시오. 그것만이 인생의 모든 상황 속에서 불행과 불길함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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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살후 2:2)

살로니가 교회 내에 만연한 주님의 날이 이미 이르렀다는 소문은 특별히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으로 하여금 ‘버림 받은 자’들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영으로나 말로나 편지로나 주님의 날이 이미 이르렀다는 소문에 흔들리지 말 것을 당부하는 사도 바울의 권고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특별한 영적 지혜나 체험 혹은 신분상의 거룩함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주님의 날의 시점을 알게 할 것이라는 착각은 순전히 인간적 교만함에서 비롯된 생각이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온전히 그리스도께 속하여 매사에 하나님만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종말의 시점에 관한 것이 두려움의 이유도, 지나친 관심사도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매일 매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위 대면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순전한 믿음을 매개로 하는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의 처지를 비하하고 업신여기면서 최소한 그들 보다는 우월한 영적 지식을 갖고서 주의 날의 싯점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일상 생활 속에서 주님과 성실하게 동행하는 생활방식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의 종말에 관한 지식이 아무리 특별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데살로니가 교회내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처럼 주님과 매일매일 성실하게 동행하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써의 삶의 가치를 능가할만한 것은 결코 없다고 강조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의 그리스도와의 동행이라는 상식적인 신앙의 의무를 저 버린체 특별한 계시나 영적 지식 그리고 체험 일변도의 믿음생활을 경계하십시오. 오늘을 성실하게 살지 않는 자의 삶에 뭔가 특별한 내일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 자체가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을 통하여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삶에 취지와 특성에 맞지 않습니다. 특별한 영적 능력이나 말의 기량, 혹은 글재주를 갖고서 지극히 정상적인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삶의 가치를 무시하는 모든 시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 특별한 체험이나 지식에 의해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들 각자의 그리스도와의 성실한 동행의 삶을 더욱 힘써야 합니다. 정말로 우리의 구원을 빼앗거나 위협할 만한 것들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매일매일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오직 그분이 구원이 시작이며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생활과 마찬가지로 믿음생활의 성실함과 진실함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리스도는 인간적으로도 인류 역사상 가장 성실하고 진실하게 하나님 아버지와 동행하는 삶을 살았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성실한 삶의 기초가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분께 속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생각과 삶의 방식 그리고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좇지않는 것은 모두 신앙생활의 걸림돌이이며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 (살후 2:3)을 따르는 행위입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시며,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까지 우리의 구원을 변호해 주실 분은 오직 그리스도 뿐입니다.

온갖 오해와 소문이 난무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지금 그 모습 그대로 그리스도께 속하여 매사를 그와 함께 하는 나의 구원을 방해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소문은 사람의 마음을 미혹케 하지만, 믿음은 삶을 성실하게 만듭니다. 소문을 좇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은 믿음 안에서 성실한 사람들의 몫입니다. 그를 향한 믿음의 성실함으로 자신은 물론 모두의 영혼을 구원하는 삶을 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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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일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살전 3:13)


울 당시 데살로니가 지역의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그리스도의 복음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참된 삶의 변화를 이루는 일과 관련하여 두 가지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 자신의 불의하고 불법한 과거, 즉 이방 문화와 습관을 좇아 살던 비기독교적인 과거의 생활양식을 들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그처럼 온전히 동화되지 못한 그들 자신의 생활습관과 환경이 초래하는 복음에 대한 이질감과 그로인한 그들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입니다.

한 마디로 불의하고 불완전한 과거의 삶이 복음으로 말미암은 밝은 미래의 소망과 구원의 확신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그들 자신의 현재의 발목을 잡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경우에만 아니라, 현재 우리들 각자의 삶에도 동일한 유형의 문제점이 발견되곤 합니다. 불행하고 어두운 과거의 잘못이나 불합리한 일들에 대한 기억이 믿음 안에서 확실히 보장된 미래의 소망과 기쁨의 약속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충분히 안심하며 평안을 누리는 일을 저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현재가 그만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것 같을 때가 많습니다. 동물로 비유하자면, 마치 뛰기만 할뿐 날아오르지 못하는 실험실의 개구리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매사에 나약하고 온전치못해 보이는 그 부분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참된 도약과 비행을 경험할 수 있는 여지라는 사실입니다. 이방인 출신이 대부분이었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그 날에 일절 흠없는 모습으로 그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한 바울의 선언은 순전히 그들을 ‘굳건하게’ 하사 매사에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의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불행하고 불의한 과거에 매인 사람을 온전케 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룩하는 도구로 사용하신 일에 관한한 바울 자신의 삶이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야 할 자로 부름받았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의 삶을 살았던 바울 자신의 과거의 죄성과 죄책감의 압력이 얼마나 컸었는지 모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라고 스스로 탄식할 정도였습니다.

우리들 스스로 과거의 죄성과 미래의 꿈 사이에서의 탄식과 절망이 아무리 크고 비참해 보여도, 그 모든 연약함의 원인을 제거하고 매순간 현재적으로 더욱 더 온전케 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는 날 그와 함께 할 ‘성도’들의 정체 역시 하나님에 의해서 ‘거룩해진’ 사람들의 무리입니다. 즉 그들은 앞서 간 믿음의 성도들로서, 지금의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육체의 연약함을 참아내며 매일매일 믿음으로 온전케 되어 하나님에 의한 영화로움을 힘입게 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살전 4:14).

믿음의 여정 중에 항상 현재의 부족함을 채우사 온전케 하실 주님의 능력을 신뢰하십시오.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지금 자기 자신이 느끼는 부족한 만큼을 능히 채우시고 완전케 하실 분이 바로 주님입니다. 사람마다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 부족함을 갖는 이유는 남 때문도 아니며, 자기 자신 때문도 아닙니다. 단 한가지 우리의 대속자가 되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필연성 때문입니다. 매번 주님을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현재의 부족함을 삶의 디딤돌로 삼는 삶을 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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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8일

“이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황폐하게 하사 그 큰 소리를 끊으심이로다 원수는 많은 물 같이 그 파도가 사나우며 그 물결은 요란한 소리를 내는도다” (렘 51:55)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는 말처럼, 뭔가 공허한 삶의 여지들이 많을수록 허망한 소리가 많아집니다. 반면에, 바르게 정리되고 충만한 마음가짐에는 허망한 소리보다 명확하고 일관된 메시지가 작용합니다.

의미가 분명한 교훈 및 교훈체계가 뚜렷이 전달됩니다.  요 1:1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는 말씀의 의미 그대로입니다. 처음부터 인생을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에 관한 메시지가 온통 가득한 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온갖 허망한 주의 주장을 앞세운 이 땅 위의 소리들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가 퇴색되고 약화되는 현실을 경계하십시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 편의 궁극적이며 절대적인 진리의 제어함을 받지않으면 자연히 헛된 망상의 지배를 받고, 공허한 마음의 소용돌이에서 비롯된 허망한 소리들을 듣게끔 되어 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온갖 자극적인 뉴스나 근거없는 소문에 의해 대중의 마음이 돌풍처럼 휘둘리는 것과 같습니다. 고대 중근동 사회에서 가장 흔한 신의 명칭이 바알, 즉 폭우를 동반하는 광풍을 주관하는 신인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입니다.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배타적이고 뚜렷한 신관을 기초로 삼는 신앙의 내용과 메시지가 분명하지 않으면, 그저 사나운 광풍의 소리만으로도 두렵고 떨림을 경험하게 되고맙니다. 사나운 ‘광풍,’ 즉 미친 바람 소리와도 같은 세상의 온갖 염려의 소리에 매이지 않도록 늘 서로의 마음을 하나님 편의 분명한 메시지로 무장하십시오. 이왕에 지적인 동의와 의지적 결심, 그리고 정서적 공감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으로 믿고 받아들인 말씀에 대해 최대한 자기 자신의 것으로 삼고자 하는 반복적인 경험과 훈련의 가치를 절대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지중해 연안 한 복판에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일어나 배와 사람을 모두 포기해야 상황 속에서도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나타나 구원을 약속한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행 27:23-25)고 말합니다.

바울과 함께 한 일행의 운명은 바울이 확신한 그대로 되었습니다. 세상의 온갖 허망한 소리 대신 늘 하나님 편의 분명한 구원의 메시지를 통하여 자기 자신과 모두를 구원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떠들어도 바벨론 제국의 군대와 마병 소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선지자의 메시지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 그 자체가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로서 삶을 늘 그리스도의 메시지로 잘 무장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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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1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 (렘 50:20)


모든 죄의 궁극적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그 마음이 괴롭고, 또한 양심의 찔리움을 경험하는 까닭은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운 마음의 작용 때문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범한 모든 잘못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해서 책임을 져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주님으로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대신해주신 그의 공로를 믿는 이유 역시 오직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용서의 은혜만이 우리의 삶을 온전히 새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이해와 용서를 구하는 일 이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죄사함의 확신과 확증을 구해야 합니다. 인간관계 자체의 상대적 특성상, 자신의 잘못이나 허물에 대한 누군가의 인간적 이해와 공감을 얻기란 쉽습니다. 하지만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는 그분을 참 경외의  대상으로 여기는 믿음이 전제되지 않는한 불가능합니다.

바벨론 칠십년 포로기를 지나는 동안 고대 유다백성들의 경우 좀처럼 떨칠 수 없는 마음 깊은 곳의 죄 문제, 즉 죄의식이 있었습니다. 이방 땅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까닭에 일상적으로 드려졌던 제사와 제물을 매개로 하는 대속의 조치를 더 이상 취할 수 없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 군대들에 의해 파괴되고 난후, 그들 가운데 신의 거처가 사라진 이유로 인해 인간성 자체의 불안함을 온 몸으로 겪어야만 했습니다. 죄의식의 타개를 위한 아무런 인간적인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선지자들이 대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충고와 선언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의 지배 하에 놓인 불안한 인생으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매개로 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죄사함의 약속을 누리도록 하신 이유는 죄문제 해결의 궁극적인 방법과 목적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도가 죄문제에 관한한 하나님 편의 유일한 방법인 죄사함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는 이유는 그 말씀을 통해 죄를 사할 뿐 아니라, 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보장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편의 죄사함의 약속에는 이미 범한 죄를 사할 뿐 아니라, 그러한 죄를 다시 반복지 않는 예방과 치료의 능력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죄와 죄성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게 해주신 것만으로 죄성을 능가하는 방식의 순종과 사랑, 그리고 희망 안에서의 새로움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사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편의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는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 편의 궁극적인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만이 일상의 영역에서 죄의 미혹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없으면, 사람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두려움 때문에 죄의 미혹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를 용서하사 그를 향하여 온전하고 자랑할만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설혹 우리들 각자가 죄로 인하여 몇번을 너머지고 또 너머진다 해도, 우리를 향한 그의 뜻은 모든 죄를 사하셔서, 다시는 죄에 메이지않는 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의 의지를 바로 알면 죄를 지을 필요조차 없습니다. 정말로 성도에게는 죄를 이기는 삶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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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4일

“도망하여 네 생명을 구원하여 광야의 노간주나무 같이 될지어다” (렘 48:6)


레미야서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의 여러 예언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주변 여러 나라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예언의 취지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주변 나라들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소유된 이스라엘의 연단을 위한 목적상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취지에 맞지않으면 언제든지 내어버림을 당하고 맙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그 나라들의 압제와 포학이 너무 심할 경우 하나님께서는 가차없이 그들을 버리고 새로운 나라들을 세우곤 하였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을 파멸시킨 앗수르 대신에 바벨론을 세우고, 유다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페르시아를 들어 쓴 예가 바로 그것입니다. 둘째는, 그러한 이유때문에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한시도 마음을 놓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세상 모든 민족의 흥망성쇠가 다만 이 세상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 편의 구원과 회복의 의도와 계획을 이루기 위한 것인 이상, 선민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보편적인 지배원리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변 여러 나라들, 특별히 대제국의 형체를 갖춘 나라들의 ‘추풍낙엽’과 같은 처지를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 역시 매사에 스스로 삼가며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부합하는 삶을 힘써 살아야 했습니다.

지리적으로 남왕국 유다와 가장 가까웠던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로 구성된 나라로서, 이스라엘 민족과 애증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혈연관계로만 보자면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여호와 신앙의 순수함을 간직해야 하지만, 다분히 국가적 차원의 생존을 위해서 종교적 충성심은 아랑곳 없이 온갖 이교도 신앙과 문화를 받아들여서 종교혼합주의의 온상을 이루었습니다.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수 차례의 배신과 반역을 도모하면서 기회가 있는대로, 침략과 공격을 일삼았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지배 하에 있던 적도 많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에 의한 모압의 파멸을 예고하면서 그들이 부분적으로라도 살아남고자 한다면 도시문명의 편안함 대신에 광야의 야생목 중 하나인 노간주 나무처럼 외로움과 고독함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정말로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고 스스로 삼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이는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있어서 늘 공격적이며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해 온 모압 사람들의 생활양식과는 정반대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전히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타인을 효용가치를 극대화하도록 요구받는 현대사회의 효율성의 지배원리와는 정반대의 삶의 태도입니다. 노간주나무는 측백나무 과에 속한 향나무의 일종으로서 팔레스타인 광야의 곳곳에 심겨있는 장수 나무입니다. 나무의 수명이 질기고 향이 강해서 관절이나  통풍과 같은 지병을 치료하는 약재료로 쓰이기도 합니다. 서구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노간주 나무와 열매를 이용하여 드라이 진이라는 독주와 남성용 향수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만큼 향이 주는 유익이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삶이 모든 인위적인 요소들을 제하면 제할수록 더욱 더 자신과 타인에게 유익한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누리는 유익도 귀하지만 때로는 광야의 노간주 나무처럼 홀로있는 법을 배우고 익힘으로서 자신도 몰랐던 본인만의 장점을 터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직 주님을 마주하여 홀로 설줄 아는 삶의 비결을 터득하십시오. 하나님을 대하여 홀로 서서 그를 마주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만 성도로서 올바른 삶의 특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광야와 같은 인생의 외로움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 편의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의 여지를 대비함으로서 노간주 나무처럼 자기 자신 속에 무한한 치료와 회복의 향을 쌓아두는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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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7일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손이 만든 것으로 나의 노여움을 일으켜 너희가 가서 머물러 사는 애굽 땅에서 다른 신들에게 분향함으로 끊어 버림을 당하여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저주와 수치 거리가 되고자 하느냐” (렘 44:8)


벨론으로 유배된 유다인들은 칠십년 포로 기간 후 원하는 자들 모두 이스라엘 고토로 돌아온데 비해, 예레미야 선지자를 강제로 이끌고 바벨론 대신 애굽으로 피신한 자들은 영영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간헐적으로 소수의 사람들이 소식을 주고받으며 소규모의 왕래가 있긴 하였지만, 성경 (에스라/느헤미야)에 기록된 바 대로, 유다 백성이 바벨론으로부터 무려 세 차례에 걸쳐서 전 민족적으로 귀환을 도모한 것과 같은 사례가 애굽 땅에 살던 유다인들에게는 아예 없었습니다.

형벌과 보응까지도 하나님의 간섭의 손길임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재기와 회복의 기회가 주어지는 법입니다. 반면에, 삶의 대안을 순전히 자기 임의대로 정하는 자들은 재기의 기회는 커녕, 스스로 자기 손아귀에 매이는 처지를 당하고 맙니다. 애굽 땅에서 살던 유다인들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는 죄를 범한 결과 뉘우치고 돌아와 그를 섬기는 기회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섬기던 ‘하늘의 여왕’ (17, 18절)은 흔히 바알 신의 아내로 여겨졌던 아세라 여신을 가리킵니다. 고대 중근동 지역 여러 나라에서 흔히 여인의 생산 능력과 물질적 번영을 가져오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남은 유다 백성들의 애굽 행 자체를 반대하신 이유가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을 자신들의 도움의 손길로 인정하도록 하기위함이었습니다. 나일강 삼각지에 위치한 애굽의 지정학적 특성상, 사람들마다 온갖 농산물의 풍성한 재배와 수확을 영락없이 자기 자신의 수고의 덕분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풍요의 순간은 물론 고난과 궁핍의 때에도 여전히 창조주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인정하며 살아야 하는데, 자연 조건 자체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만큼 충분히 풍요롭고 만족할만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손의 공급의 여지를 믿지않게 되면 결국 자기 자신의 손의 대안을 찾게됩니다. 그로인한 만족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여지보다 더한 것으로 여기게 되면, 바로 그것이 우상숭배적 행위입니다.

바벨론 대신 애굽으로 달아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손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우상인 하늘의 여왕께 분향하면서 복을 빈 것이 바로 그 예입니다. 당장에는 아프고 힘이 들더라도, 성도라면 매사에 하나님의 손에 의지하는 마음으로 그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 몇 배나 더 유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믿음 안에서의 수고는 자신감과 보람을 제공하지만, 믿음없이 행하는 손놀림은 불안과 염려, 또는 근심과 집착의 표현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레미야 당시 남은 유다 백성들의 경우 ‘바벨론 행’은 하나님의 손에 빠지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이었으며, ‘애굽 행’은 그들 각자의 손으로 무엇이든 해보고자 하는 마음의 표시였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손을 거절한 그들의 손으로 우상을 만들어 거기에 제사를 드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믿는 마음으로 하는 일은 모든 복되지만, 믿음이 없으면, 그 하는 일 자체가 두려움이며 부끄러움입니다.

마음을 믿음으로 무장하는 길만이 우리 손의 노고가 정말로 우리들 자신을 위하는 것이 되게끔 하는 비결입니다. “…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시 90:17)라는 모세의 기도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손의 노고를 유익한 것이 되게끔 해주시는 은혜를 꼭 누려야 할 것입니다.삶이 어려움에 처할수록 더욱 더 하나님의 손에 빠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샬롬!

P.S. 교우 여러분의 염려 덕택에 잘 도착하여 보건소 시설에서 격리 중입니다. 거듭 감사드리며,  건강한 모습으로 피차 다시 뵙기 바랍니다. 각별히 조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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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0일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더라” (렘 39:18)

다 최후의 날 반바벨론 정책을 표방하였던 시드기야 왕은 믿었던 애굽의 군대가 퇴락한 다음 바벨론의 군대에 의해 무려 삼십개월 간이나 포위를 당한 끝에 성의 함락을 목도하게 됩니다. 떳떳이 항복하고 목숨을 구걸할 용기조차 없어서 밤 중에 군사들을 데리고 피신하려다가 갈대아인의 군대에 붙잡혀서 느부갓네살왕의 엄중한 심문과 함께 그 자신과 왕자들, 궁궐 대신과 유다의 모든 귀족들이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시드기야 자신은 두 눈을 잃은체 사슬에 포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제국의 통치를 따르지않고 반역을 도모한 역도들의 죄목에 따른 심판을 당한 것입니다. 바벨론이라는 징계의 매를 사용하여 언약 백성을 단련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당사자가 되어 그의 선민으로서 특권과 능력을 누리는 것이 그 언약에 합당한 책임과 의무의 전제 위에서만 가능하며, 그렇지 않는 경우, 그들을 대하는 하나님의 방식이 다른 이방 족속을 대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생생하고 지극히 타당한 전제 위에서 이루어진 사건이 바로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입니다. 한 마디로 예외는 없었습니다.

세상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인간의 삶의 원리를 적용하고 유지해 가는 데 있어서 추호라도 예외적인 것을 구할 수 없습니다. 삶의 모든 상황과 조건 속에서, 자기 자신은 뭔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보편적인 믿음의 원리, 즉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심판과 저주가 임하고 만다는 사실을 예외적으로 적용하려는 마음의 미혹이 없어야 합니다.

설마 여호와께서 유다 민족이 이방 사람의 포로가 되는 일을 용납하실까, 혹은 그가 친히 그 이름의 영광과 함께 자신의 거처로 삼은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도록 방치하실까 라는 식의 예외주의적인 생각이 유다 최후의 날에 시드기야 왕과 유다 민족 대부분이 스스로에게 속게끔 만들었습니다.

바벨론 왕이 그 이름을 지어준 대로, 시드기야라는 이름 자체가 ‘여호와께서 판단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아니러니하게도, 그 이름의 주인공인 시드기야 자신은 끝까지 자기 판단에 매어 여호와의 판단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시드기야의 내시였던 에벳멜렉이라는 사람은 지금의 에디오피아에 해당하는 구스 사람으로서, 시드기야 왕과 유다의 귀족들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대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왕에게 직언을 하였던 사람입니다. 왕을 포함하여 유다의 고관들의 모함으로 구덩이에 매장되어 죽을뻔한 예레미야를 위해 왕에게 직접 간언하여 예레미야를 구출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렘 38:7-13).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여호와의 판단을 따르기를 거절하는 왕으로 하여금, 한번이라도 하나님의 판단을 따를 것을 직언하였습니다.

한낱 왕궁의 내시에 불과한 이방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선지자와 그의 메시지를 보전하기 위해 결심하고 따른 것입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유다가 함락된 후 왕궁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 속에서 에벳멜렉은 오히려 선지자에 의해 구원을 약속받았습니다. “네가 노략물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전리품처럼 여겨주실 것을 의미합니다. 전에는 대적의 소유물이었지만, 전쟁의 승리를 이룩한 순간, 그 모든 것들이 승자의 손에 넘어가듯이, 그의 인생의 주체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태생이 이스라엘 백성인지 아닌지의 여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언약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이라도 하나님의 판단을 좇지 않으면, 그가 버리고 맙니다. 이방인 내시라도, 그의 판단을 좇으면, 하나님의 것, 그의 전리품입니다. 에벳멜렉이라는 이름의 뜻이 ‘왕에게 매인 자’ 즉 왕의 노예라는 뜻인데, 인생은 다만 참되고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매인 자가 되어야 할 존재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판단 외에는 우리를 영원히 메이도록 할 대상이 없습니다. 힘써 그의 판단을 좇고, 자원하여 그를 섬기는 자가 되서, 그가 친히 우리의 싸움을 대신해 주시도록 해야 합니다.

‘승자독식’이라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이기면,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전리품처럼 취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일단 전쟁에서 지고나면 아무 것도 바랄 수가 없습니다.

에벳멜렉처럼, 참 왕되신 하나님의 판단을 믿고 따름으로서 그에게 온전히 속한 자가 되십시오. 우리의 목숨만 아니라,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승자의 전리품처럼 취할 수 있습니다.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는 말씀 그대로, 인생의 모든 싸움의 승리가 일단 믿음의 승리에서 비롯됩니다. 매사에 믿음으로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는 일에 승리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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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렘 35:19)

겐 족속으로도 불리는 레갑 자손은 (대상2:55) 일찍이 미디안 광야에 정착해 있던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후손입니다. 유목민으로서 유다 광야에서 목축을 하고 있었는데, 팔레스타인 지역 전역에 대한 바벨론의 침공이 이어지자 예루살렘 경내로 들어와 터부살이를 하면서 피신 중이었습니다. 레갑의 가문에 속한 요나답이라는 레갑의 아들 요나답은 왕하10:15에 나오는 여호나답과 동일 인물로서, 당시 부패한 아합 왕조를 무너뜨린 예후를 도와서 아합에 속한 자와 바알의 모든 선지자를 멸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가 자기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조상 적부터 지키던 세 가지의 관습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집을 짓거나 파종하지 않으며, 평생 장막에 거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포도주의 붉은 색이 반영하는 풍요와 만족,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보상심리로부터의 자유함을 추구하면서, 세상에서의 삶을 단지 나그네의 여정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삶 자체에 대한 비움과 단순화의 미덕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포도를 재배하거나 파종하지 않는 것은 목축업이 주업인 그들 자신의 생존의 방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매사에 삶 자체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열심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이룩하고자 하는 취지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바알신앙을 배격한 이유 역시 농사를 위주로 하는 가나안 산지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달리 팔레스타인 전역을 배회하며 살아가야 하는 생활방식 때문이었습니다. 한 곳에서 집단으로 거주하다 보면 자연히 온갖 것에 대한 소유욕구가 발현되고, 그와 함께 서로 더 많은 것을 확보하기 위한 갈등과 투쟁이 양산되기 마련입니다. 소유에 대한 인간의 욕심은 믿음의 동기마저도 온갖 소유와 지배욕구를 자극하고 충족하기 위한 것으로 변절시키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전체에 걸쳐서 바알신앙의 미혹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날이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예레미야 당시는 바벨론 군대에 의한 유다 예루살렘의 함락이 목전에 도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백성은 여전히 온갖 불의와 불평등, 개인과 사회적 차원의 부정의를 일삼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이나 예언자와 같은 종교인들마저도 다분히 종교적 기득권의 유지를 위해 아예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함락 가능성을 부인하며, 국가주의 또는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오히려 바벨론에 대한 저항을 부추길 정도였습니다.

다 망해가는 유다 민족 최후의 날에 온갖 인위적인 거짓 주의 주장에 취하여 비틀거리는 예루살렘 성 사람들 앞에서, 여전히 조상들의 관습을 내세우면서 포도주에 취하지 않고, 가옥의 화려함과 편안함에도 도취하지 않는 삶을 추구하며 실천하는 레갑 사람들의 존재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대한 하나님 편의 교훈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온갖 세속적이며 인위적인 타락의 요소들에 의해 취할 수 밖에 없는 삶의 상황에 놓일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취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통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레갑 자손들이 이방인의 범주에 속하지만, 여호와 신앙의 순수함과, 그 순수성의 보존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그들이 ‘참 이스라엘’의 범주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그 사실에 대한 신적 의지의 표명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동시대의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초대 교회 당시 레갑의 후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믿음의 내용과 동기에 있어서의 순수함과 그 열정이 갖는 하나님 편의 가치와 위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취할 목적으로 마시는 포도주만 아니라, 생각과 사상의 건전함을 방해하고, 마음과 정신의 혼미함을 방조하는 일체의 그릇된 이념이나 주의, 주장에 취하는 일을 금해야 할것입니다. 매사에 복음적이지 않거나, 건전한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나 마음의 성향, 그리고 건전한 사회 질서 및 전통을 허무는 온갖 급진적이며 폭력적인 주의 주장이 모두 금해야 할 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야할 자들로서 어울리지 않는 일체의 자기만족과 탐닉, 또는 보상심리를 조심하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대속을 위해 그 몸으로 마지막 물 한방울을 다 쏟으시기까지 통증을 감해주는 신 포도주 한 입도 삼키지 않았습니다 (마27:34). 맨 정신으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앞장서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주님 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절대 취하지마십시오. 끝까지 몸과 마름가짐을 바르고 건전하게 유지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그 앞에 영원히 세워주실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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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6일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 (렘 32:27)

다 백성의 바벨론 유배의 필연성을 예고하며 마음 아파하는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반문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께서 왜 유다백성을 바벨론의 유배생활이라는 회복불가능의 상태에 처하게끔 하시는 지에 관한 예레미야 자신의 인간적 고민에 대한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있기 전 예레미야는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 (렘 32:17)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동족인 유다 백성의 처지를 동정하며 하나님께서 바벨론 유배를 모면할 수 있기를 간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생각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특성과 하나님 자신의 전능함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매사에 ‘극단의’ 상황만큼은 피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 대부분의 염원인데 비해서, 하나님 편의 구원과 회복을 통한 삶의 변화는 일부러 우리를 극단적인 삶의 상황 가운데 처하도록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오죽하면 ‘모든 불길한 상상은 항상 현실로 경험된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전능함은 예레미야를 포함하여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삶의 극단적인 위기나 한계상황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여호와,’ 즉 ‘주님’으로 칭하면서 우리 모두를 굳이 ‘육체’라고 부르는 이유는 순전히 창조주로서 그의 위엄과 권능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아담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를 도울 배필로 이브를 만들기 위해 그의 몸에서 갈빗대 하나를 취하시고, 그 몸을 다시금 살로 채우시기까지,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몸 전체를 가장 온전하고 유익하게 하실 수 있는 지혜와 권능의 하나님입니다. 그가 보시기에 인간은 다만 모든 면에 있어서 보다 더 온전하게 만들어져야만 하는 불안하고 아직 미완성의 상태로 남아있는 ‘육체’일 뿐입니다. 앞서 토기장이와 진흙 한 덩이의 비유와 같이, 인생은 다만 하나님의 손에서 몇 번이고 새로 빚어져야만 하는 대상물일 뿐입니다.

사람이 저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대해서만큼은 굳이 ‘인간’이 아니라 ‘육체’로 불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참된 성도의 삶의 ‘극단’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삶의 끝, 즉 극단의 상황을 추정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의 표현입니다. 정말로 믿음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늘 삶의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 끝이라고 여길만한 것은 아예 없습니다. 창조주에 의해 삶의 기회를 제공받은 한낱 육체에 불과한 자들로서 자기 삶의 끝을 상정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무례함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입니다. 늘 새로운 시작으로서 삶을 대할 뿐입니다.

감격과 감사, 그리고 온갖 유형의 감동을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한낱 육체에 불과한 인생의 모든 특권을 누리기에 부족합니다. 매사에 삶을 극단화 하는 온갖 세상적인 것들의 미혹을 경계하십시오. 세상이 강요하는 온갖 인생의 극단들은 정말 하찮은 육체의 경험, 또는 ‘육체 뿐’인 자들의 경험을 전제하는 것들입니다. 똑같이 불완전하고 미완성인 것처럼 보여도,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손 안에서 다시금 재창조와 온전한 회복의 기회로서 구원을 갈망하는 성도의 삶의 끝은 반드시 그가 친히 보장하고 보완합니다.

더욱 새롭고 온전하게 될 여지가 항상 남아있습니다. ‘신들의 문’이라는 이름의 뜻 그대로, 바벨론은 온갖 이방신들의 만신전과도 같은 곳이었지만, 실상 구약성경의 유일신 여호와 신앙의 기초는 그곳에서 칠십년 포로기를 지나는 동안에 확립되었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유일신 여호와 창조주 하나님이 바로 그들의 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임이라는 사실이 확실히 믿고 깨달아졌습니다. 믿음 안에 있으면 인간의 삶의 모든 끝이 새로운 시작일 뿐입니다.

하나님 외의 그 어떤 세상적인 힘도 성도의 삶의 끝을 상정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전능하신 그분과 항상 동행하십시오. 한낱 육체 뿐인 인간의 삶의 끝을 늘 새로운 시작을 위한 기회로 만들어 주시는 그분을 더욱 신뢰하는 삶을 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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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9일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그들을 위하여 세울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리라” (렘 30:9)

람마다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를 예배와 섬김의 대상으로 여기기 마련입니다. 그 두려움의 종류나 계기가 자발적이며 자원하는 마음의 감동을 기초로 할수록, 예배와 섬김의 특성 또한 생산적이며 참된 유익을 수반하게 됩니다. 흔히 종교의 역기능이라고 불리는 극단적이며 비현실적인 믿음의 형태에는 반드시 강요된 두려움이나 지나친 집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뭔가 참되고 건설적인 차원의 삶의 유익과는 거리가 먼  다분히 주관적이며 반사회적이며 인간본성의 파괴를 초래하며 적극 조장하기까지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활동 당시 바벨론 땅에서 칠십년 간의 유배기를 지내야 했던 유다 백성들의 경우, 그러한 전 민족적 위기상황 속에서 그들 각자의 참된 예배와 섬김의 대상 및 그 동기에 대한 자기 확신과 점검이 절실히 필요하였습니다. 얼른 보면 마치 유다 민족의 생존 자체를 어렵게 만드는 것만 같은 이방 땅에서의 유배생활을 그들의 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면서 참아내는 것이 지극히 불합리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제국주의를 표방하는 바벨론의 군사력에 대한 무조건적 항복을 조장하는 것만 같아서, 친바벨론적 메시지를 남발하는 예레미야를 반국가적인 인물로 낙인찍고, 그를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까 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바벨론에 대한 무조건적인 두려움이 그들의 생각을 지배한 탓이었습니다.

두렵기만 한 현실을 차마 마주 대하지 못하는 그들 자신의 무기력과 무능력, 그리고 불신앙적인 마음자세가 바벨론에 대한 무조건적 항거를 촉발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 안에서 바벨론 칠십년 유배까지도 참아낼 수 있다고 말한 예레미야의 예언의 동기는 유다 백성의 참된 두려움의 대상이 바로 하나님 뿐이라는 사실을 근간으로 합니다. 비록 현실적인 두려움과 공포의 요인만을 따진다면 바벨론의 군대를 능가할만한 것이 없겠지만, 몸은 죽여도 영혼을 멸하지는 못하는 이 세상적 두려움의 대상들을 영원히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 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그들 자신의 지나간 역사 속에서 온갖 두려움의 여지들을 물리치도록 하신 자신들의 구원자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견줄 때, 겨우 칠십년 간의 유배를 강요하는 바벨론을 두려워 할 이유는 결코 없으리라는 역사관과 세계관을 보유한 탓입니다. 신앙생활 자체의 전인적 특성을 고려할 때, 하나님을 믿고 그를 섬긴다는 것은 확실히 여호와 하나님만을 참된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동기는 현실도피와 같은 비겁함이 아니라, 보다 더 크고 깊은 차원의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소망으로 포로기를 견뎌낸 자들에게 장차 다윗과 같은 왕을 세워줄 것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분히 그들의 참된 예배와 섬김에 대한 보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인생의 참된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섬김으로 말미암는 대속의 삶의 은혜와 복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지혜 안에서 삶의 참된 섬김의 대상을 발견하십시오. 성도가 정말로 자신의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고 믿을 때, 당장에 눈에 보이는 두려움의 요인들로 인한 마음의 미혹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인의 상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입니다.

그분의 뜻 외의 다른 어떤 것도 인생을 영원히 메이게 하지 못합니다. 정말로 두려운 분이 누구인지 바로 알면, 여타의 두려움의 대상에 의한 마음의 요동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 한분을 두려워할 뿐입니다. 오직 그분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가 우리를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사랑에 메이는 삶을 사십시오. 그분을 예배하고 섬기는 자에게 더 이상 두려워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삶의 위기상황마다 매사에 마음 조리며 움추린 상태에서 순간적이며 찰라적으로 현실도피용 방안을 찾아 헤매는 것보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와 섬김의 대상으로 삼는 삶이 훨씬 더 용감한 처사입니다. 자기 스스로 마땅히 섬길 자를 택하여 섬기는 삶의 방식과 동기 안에서 본능적인 차원의 두려움은 이미 떨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또한 용기있는 일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참된 예배와 섬김으로 가장 용감한 삶을 사는 인생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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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니라” (렘 26:18)

대성과 주관성의 표현인 사람의 말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은 천하만물에 대해 참된 유익을 끼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의 모든 말에는 경험을 토대로 한 사리판단과 이해관계가 작용하는데 비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모든 피조물의 존재의 원리이며 참된 번영과 행복의 이치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전하고, 편견없이 들을 때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유익은 삶을 위한 마땅한 원리와 판단을 제공받는 데에 있습니다. 물건의 사용법을 몰라서 아무렇게나 작동하다가 그만 물건 자체를 망가뜨리거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과 같은 폐단을 예방하는 길입니다.

인간의 삶은 저마다 고유하고 특별해서 일정한 사용법이 없을 것이라는 착각과 달리, 삶 자체에 보편적으로 적용되야만 하는 하나님 편의 원리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고 영원한 구원의 진리로서 경험하는 계기와 방식은 다를지 모르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저마다 삶의 근본이 되는 이치를 깨닫고 믿는 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듣는다는 것은 피차 삶의 ‘근본’에로의 회귀를 추구하는 일입니다. 마치 오랜 주행 후에 자동차의 축을 점검하고 바퀴의 정렬을 바르게 하는 것처럼 저마다 인생의 구조를 창조주의 의도와 목적을 따라 재배열하고 정리하는 일이 필수적입니다.

서툰 정비사가 혹이라도 해당 차량의 매뉴얼의 규정을 무시하고 임의로 정비한다치면 대형 사고의 위험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차의 수리를 맡긴 자나 맡은 자 모두 해당 차량의 사용법을 따르는 일이 당연지사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생의 근본 이치를 깨닫고자 함에 있어서 섣부른 판단이나 이해관계를 배제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매사에 일의 근본을 정하고 밝히는 데에 있어서만큼은 그 어떤 인위적인 요소의 개입도 없어야 합니다.

남왕국 유다의 어질고 신실한 왕 중 한 사람이었던 히스기야 왕이 미가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듣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물리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를 조심하고 회개하여 재앙을 물리침으로서 자신 뿐만 아니라, 온 백성의 형편을 유익케 하였습니다. 왕과 백성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마땅한 삶의 자리, 즉 근본을 회복한 것입니다. 맛있고 신선한 물의 공급을 위해서는 물 근원인 샘을 정결케 하고 이물질이 섞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처럼, 성도의 삶 속에서 행여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방식에 있어서 마음의 타락과 오염을 항상 경계하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그것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자에게 ‘커다란’ 감동과 울림을 제공합니다. 그 감동과 울림이 우리들 각자의 주관성과 상대적인 욕구에로의 이끌림을 능가할 때 비로소 진리의 말씀을 통한 참된 유익이 제공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언제나 우리 삶의 근원을 바르게 하는 식으로 경험됩니다. 진리 안에서 매사에 ‘근본’이 강화되는 유익을 누리십시오. 전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삶의 근본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의도만 분명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능히 도우시며 최고로 유익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내 생각’의 대치 상황 속에서 언제고 나 자신의 패배와 복종이 선언되어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며,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매사의 근본을 강화하는 복과 은혜를 허락합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삶의 근원이 분명해지는 유익을 누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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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6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 14:17)

모세 율법의 흔한 명칭을 히브리어로 ‘판단’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인간의 모든 결심과 판단을 이끌어내는 최종 과정에 있어서 ‘단순화’의 시도가 절대 자기중심적으로 되서는 안된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모세와 같은 사람을 포함하여 인간은 다만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야 할 자들일 뿐, 결코 자기 판단에 이끌리거나 남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모세의 이름의 어원인 ‘메시아,’ 즉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간음현장에서 붙들린 여자에 대한 판단까지도 스스로 금하셨습니다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8:11). 만큼 타인에 대한 이기적인 판단의 위험성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만큼은 자기 주관대로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은 더욱 어렵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와 판단이 쉬울수록, 타인에 대한 판단을 쉽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도의 첫번째 원리가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사람마다 매사에 판단이 어려워야 합니다. 올바른 결정과 판단을 위한 마음의 단순화가 순전히 자기 위주로 흐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쉽지않은 판단력을 갖고 사는 것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효율성의 원리에 맞지않아 보이지만, 최소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이상을 구현하는 취지에 있어서만큼은 그러한 마음의 부담과 복잡스러움을 참아내야 합니다. 물론 그러한 인내와 자기 부인의 과정 속에 하나님의 활동이 개입되리라는 전제 하에서 입니다. 한번만 돌이켜 보거나, 입장을 달리 해서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고 마음이 돌아서게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지나고 나면 매사에 그릇된 판단의 위험성과 폐단의 주 원인이 자기 자신인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자신을 판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주로 세리와 창기, 그외 각종 죄인들을 가까이 하면서도 그들을 결코 판단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주님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그들까지도 사랑하사, 죄인들을 위해 친히 그 몸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타인을 향한 모든 판단과 비방 속에 자기 자신에 대항 비방이 포함되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라야만 타인에 대한 관심과 믿음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 결코 먹고마시는 일처럼 쉽게 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만족만을 위해서 살 수 없는 것이 바로 거듭난 성도의 삶입니다. 매사에 자기 위주의 지나친 마음의 단순화의 유혹을 벗어 버리십시오. 나 편하자고,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은 정말로 성도의 도리가 아닙니다.

이원론을 대입하여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못이라고 여기게 되면 효율성의 만족은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인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 즉 성도의 내면의 기쁨과 만족은 없습니다. 매사에 주님처럼 생각하고, 주님처럼 받아들여야만 우리가 과연 그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세상 나라의 이치 대신에 하나님 나라의 이치를 좇는 삶을 사십시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까지도 끝내 판단하여 정죄하지 않으셨던 주님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판단이 바로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의 약속입니다. 매사에 하나님 나라의 판단으로 영생을 누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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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9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롬 11:29)

사도 바울은 한때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고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하는 일에 앞장 선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에 관하여 말하면서, 하나님의 성품 상, 그가 결코 후회할 일은 하지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 하여 그들 스스로 버리운 자의 처지에 속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순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그들을 다시금 회복하여 애초부터 그들의 주인이었던 하나님 자신의 주권과 영광을 나타내시리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건, 이방인이건 간에, 인간의 운명 자체에 대한 궁극적 유익과 축복의 제공자이신 하나님의 선함을 능가하거나 무효화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존재방식 자체가 인간의 현실적이며 상대적인 판단 기준에 따라 좌우되지 않습니다. 여호와, 즉 ‘스스로 있는 자’라는 그의 이름의 뜻처럼, 하나님의 성품과 행동방식애 대한 이해와 평가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 자신에 따른 것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그의 전부를 내어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삶과 죽으심, 그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의 약속을 통하여 알 수 있는 하나님에 관한 유일한 이해는 그는 끝까지 선하시며, 인류 전체에 구원의 길을 제공하고자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을 취지로 하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대응방식을 추정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유는 이 세상 그 누구도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먼저 그를  버리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그 마음을 아는 것이 구원이며 회개의 시작입니다. 그래도 이 세상에 버림받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는 자기 스스로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된 인간을 벌하고 버릴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공의의 원칙에 대한 하나님 스스로의 버리움입니다. 독생자의 대속의 죽으심과 함께 하나님 자신 또한 죽기로 한 것입니다. ‘신은 죽었다’고 외쳐대는 수많은 비관론자들과 회의주의자들의 발상은 처음부터 그 동기가 잘못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그가 죽었다고 외치기 전에 하나님 스스로 이미 죽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은 인생의 온갖 한계상황 속에서 다시 죽음을 마주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꼭 죽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극단적인 삶의 정황을 대할 적마다, 바로 그 이유를 무마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리스도 안에서 대속의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아들의 죽음을 허락하면서 하나님 자신은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버리고 또 버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죄성의 참혹함을 용서하고 그들을 사랑하시기 위해 지극히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모든 성품과 의지에 대해 죽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결코 후회함이 없습니다. 이방인들을 향하여 무조건적인 은혜의 선물로 허락한 구원의 초청, 즉 그리스도의 복음의 약속은 결코 후회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을 열방의 빛이 되어야 할 자들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 역시 후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의 고집스러움과 완고함이 더할수록 그들을 끝까지 용서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가 더욱 빛나며, 더 많은 이방인들에게 매력의 여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조건적이고 현실적이기 쉬운 섣부른 인간적 판단의 오류 대신, 피조물로서 인생 자체의 운명에 대한 모든 결정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원칙을 따라 행하고자 하는 마음가짐만 유지하면, 그러한 인생은 결코 후회스럽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 대해 염려하고 후회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후회와 염려를 대신하셨기 때문입니다. 매사에 우리를 향하여 달라진 하나님의 마음을 대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만 있으면, 우리의 근심조차도 하나님께 대한 회개를 이루는 것이 됩니다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0).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고 용서하사 구원하시기 위해 먼저 자신의 뜻을 돌이키신 하나님 안에서 일절 후회할 것 없는 삶을 사십시오. 믿음 안에 있으면 삶은 정말로 한번 살아볼만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후회스럽지 않을 삶을 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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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 9:8)

기독교 신앙의 제반 요소가 모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는 이유는 신앙의 궁극적 목적인 구원의 방법이 오직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성의 평가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 도덕적 의로움이나 성실함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한계상황을 초월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과 그 성취는 다만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의로움을 믿는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죽음이 죄로 인하여 초래된 인생의 불행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로부터 한 번의 실패 후에 ‘두번째의’ 기회를 제공받은 존재일 뿐입니다. 나름대로 정의로운 삶을 살기위해 노력하는 것이 가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성의 한계를 지닌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하나님 편의 용서의 ‘은혜’를 전제로 하는 ‘빚진’ 자의 처지에 속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의 의’의 속성을 알고나면 자기 스스로 의로워질수록 더욱 더 자비롭고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통용되는 사법적 정의와 달리 믿음의 의는 다만 하나님의 성실함과 자비로움에 대한 계몽을 통해 자기 자신의 불의함과 부족함을 깨달아가는 과정입니다. 영생의 소망을 포함하여 믿음생활 전반에 걸쳐서 철저히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주도하시는 은혜의 속성과 원리를 깨우쳐가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입니다.

이스라엘과 비이스라엘의 구분은 물론, 아브라함의 후예인 이스라엘 중에도 이삭으로부터 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모두 인간적 자격이나 공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약속이 지닌 ‘은혜’의 속성에 대한 깨달음과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면서도 막상 아브라함이 믿고 의지한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믿지못하면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자신도 한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못하여 그의 자녀, 이스마엘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범주에 속할 기회를 누리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부모의 불신앙이 자녀의 믿음의 기회를 박탈하고 만 것입니다.

성도가 인생을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이스마엘과 같은 처지에 속한 자라 할지라도, ‘육신의 자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에 속한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육신의 자녀’라는 말에 수반하는 온갖 유형의 인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이 땅위의 모든 인간을 능히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바꿀 수 있습니다. 사람이 육체의 한계를 간직한 체로 도저히 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인 영원한 삶의 열매를 성취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인간적 성실함과 의로움의 노고를 우리를 대신하여 친히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성실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세주로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대속’의 주님으로 믿는 믿음만큼 성실한 것이 없습니다. 그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 그가 친히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 그리고 그의 부활과 승천, 재림의 약속에 장차 우리의 삶의 방향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의 전부를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 안에서 삶 자체의 성실함의 기준을 바꾸십시오. 우리 스스로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그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없다면, 우리는 인생 자체를 불성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땅 위의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의 대를 이을 자들로 지으셨습니다.

그저 아쉽고 허무한 것일 뿐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생을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 대신, 죽음의 필연성에 매인 체로 내버려 두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성실의 대표입니다. 삶을 대하는 방식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 두번의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 마치 죽음이 의미하는 절망과 단절, 그리고 온갖 유형의 무기력감에 사로잡힌체 헤어나지 못하면, 그 또한 하나님께 대한 불성실의 표시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낙심하여도, 하나님께 대해서는 결코 낙심하지 않는 것이 바로 성실함의 본질입니다. 매번 삶을 하나님과의 약속에 대한 성실함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줄 아는 사람들이 곧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육신의 자녀’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약속의 자녀’들로 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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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5일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롬 7:6)

람마다 표면적인 상처보다 내면의 상처로 인한 아픔과 해로운 기억이 더 오래 남습니다. 외상으로 인한 흉터나 흔적보다 내적 심리와 정서장애와 같은 것이 치료의 과정 또한 훨씬 오래 되고 복잡합니다. 불건전하고 병적인 내면의 자극으로 인한 심리적 매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훨씬 더 유익하고 건강한 방식의 ‘자유로운 속박’과 그로인한 진정한 내면의 유익과 보람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삶 자체에 대하여 지배적인 욕구와 피지배자로서 욕구를 동시에 소유한 인간 존재의 특성상, 자신이 다스리고자 하는 대상은 물론, 다스림을 받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서 지속적인 신뢰와 우호적 관계를 지속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서로 진실한 속 마음을 내주고 싶지만, 그럴만한 이웃이나 동료를 쉽게 찾지못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우리 모두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본연의 ‘매임’의 욕구를 가장 온전한 방식으로 실현해 주었습니다.

삶의 전 과정에 있어서, 그리고 죽음의 이유와 목적까지도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뜻을 실행에 옮기는 식으로 인생의 참된 매임의 의미와 가치를 구현한 것입니다. 서로 대상을 잘못 설정하거나, 대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한 탓에 인간관계의 참된 만족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남과 헤어짐의 이유와 목적을 모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찾고자 하는 마음가짐만 전제되면, 굳이 이별의 아픔이나 서로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성도라면 의례히 모든 인간관계의 유형과 특징을 하나님을 대상으로 해야할 것입니다. 추호라도 속박과 매임의 여지가 있다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심의 토대 위에서 행해져야만 합니다.

유한한 피조물로서 인간의 삶 자체의 특성상, 온갖 유형의 의무감이나 마음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같은 속박을 경험하면서도 즐거움과 감사로 인하여 스스로 자유스럽게 여길 뿐입니다.  그러한 마음가짐의 변화와 그 비결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힘입는 믿음의 삶의 원리에 담겨 있습니다. 내면 깊숙한 곳에 잠재해 있는 마음의 온갖 상처와 아픔을 치료하듯, 그리스도는 우리 스스로 겪어아먄 하는 삶의 온갖 무거운 짐과 그로인한 마음의 얽매임을 우리 대신 담당해 주었습니다. 단지 믿음을 통한 심리적 안정의 차원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의 삶의 에너지와 연료를 제공하는 식으로 우리 내면의 필요를 채울 수 있게 합니다. 때로는 죽기보다 힘들다고 여겨지는 삶을 위한 온갖 마음의 부담까지도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의 의미를 헤아리는 식으로 능히 너머설 수 있습니다.

죄성을 매개로 하는 마음의 고소와 비난도 그가 이미 그 대가를 모두 치르셨다는 믿음만 있으면 능히 벗어버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경험하는 삶의 부담은 더 이상 부담이 아닙니다. 그가 친히 대신하여 준 삶의 흔적들을 찾아가는 기쁨과 안정, 그리고 평강의 여정일 뿐입니다. 하는 일마다 매사에 불안감에 쫓기고 실수와 잘못을 의식하다가 또 다른 실패를 반복하는 온갖 불안과 염려증후군은 결국 그 삶의 대리자, 대속자가 없는 탓입니다.

믿는 우리에게는 최소한 삶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요구사항을 충족할 수 있는 여지가 그리스도안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매사에 얽매임이 아니라 자유케 하는 영적 감동과 새로움의 원리에 따른 삶을 사십시오. 누구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양심의 고소를 받는 일 따위는 사전에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시는 그의 뜻에 온전히 매임으로 인하여 다시는 자기 스스로 초래한 거짓되고 불필요한 속박의 노예가 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정말로 그리스도께 속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달라야만 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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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9일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2)

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회교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삼 대 종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마저도 의의 기반이 그 자신에게 있지않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사람이 매사에 온전하고 의로워지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며, 또한 그 반대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만 있으면 누구나 아브라함처럼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아브라함위 생물학적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들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간직한 사람들 모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된 의의 선물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변호하고자 하는 것이 바울 사도의 의도입니다. 유대인이건 비유대인이건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구세주로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의 대속의 공로에 의지하여 죄를 벗어버리고 그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갈 때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 또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위해 축복의 ‘원형’과도 같은 아브라함마저도 사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원리에 따라 살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구원의 원리에 관한한 ‘믿음의 조상’이라 칭하는 아브라함마저도 ‘특별한’ 존재일 수가 없습니다. 그마저도 오직 하나님께서 주도하심으로 이룩한 죄된 인간성의 변화와 그 열매로서의 의의 선물을 다만 믿음으로 겸손히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 예외일 수 없던 것입니다. 우리들 대부분 믿음생활을 하면서도 종종 겪는 어려움 중 한 가지가 바로 스스로를 예외시하는 일 때문입니다. 믿음의 원리만으로는 뭔가 부족할 것이라 여기면서, 스스로의 삶의 문제점에 대해 자기 나름의 걱정과 염려를 지나치게 대입합니다. 하찮은 일로도 비교의식에 빠져 자기를 남보다 우월시하거나 혹은 열등시하는 것처럼, 사소한 일에도 하나님 중심의 믿음의 마음 대신 자기중심적 염려의 늪에 빠져들고 맙니다.

죄성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타락한 이기심, 즉 자기중심성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기 자신의 삶의 문제점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식의 생각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나은 자식을 다시금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야하는 일생일대의 삶의 위기를 단지 그의 믿음의 시험의 차원에서 겪은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가 ‘특별히’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의 자랑과 상급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의 선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을 향하여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 아브라함’이 ‘신적 모순’이나 ‘만들어진 신’과 같은 개념의 타락과 미혹에 빠졌다면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일 자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의 선물에 관한한 아브라함마저도 예외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등 삶의 모든 상대적 가치를 추구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절대 자기 자신을 예외시하는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인간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충분히 누릴 수 있습니다. 정말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를 위하여 친히 대신 죽으시고 또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을진대, 자기만큼은 예외일 것이라고 여길 수 있는 근거가 우리에게 아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독자 이삭을 드리면서도 하나님께서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줄 믿을 뿐입니다 (히 11:18). 참 믿는 자를 위한 ‘예외적인’ 삶의 자랑과 보상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법입니다. 인간의 이기심을 자극하는 온갖 예외주의, 제일주의의 홍수 속에서 오히려 가장 진실하고 겸손한 믿음의 보편성으로 인생의 난관을 극복하십시오. 진실한 성도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노력과 수고가 바로 자기 자신에게 속지않는 거짓없는 믿음, 예외없는 믿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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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5일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의 추위를 감당하리요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 (시 147:16-18)

‘할렐루야 시편’으로 불리는 시편 146-150편은 시편의 대미를 장식하는 찬송시들입니다. 각 시의 시작과 끝이 모두 ‘할렐루야’로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이름의 영광을 높이는 것이 성도의 삶의 시작과 끝이 되어야 함을 암시합니다.

인생의 온갖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지은 세계 속에서, 그의 구원의 능력에 의지하여 사는 것만이 마땅한 삶의 도리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 자신들의 과거에도 그렇게 살아왔고, 장래에도 계속 그럴 것이라는 다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처럼 지극히 순수한 은혜의 관점을 유지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찬송시입니다. 그 중에서도 147편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의 하나님을 동일시하면서, 만물을 지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원천이 바로 그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말씀으로 온 세상을 지으시고 유지해가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삶 자체의 온갖 변화무쌍함에 시달리는 식의 마음의 한계와 황폐함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주로 바벨롣 포로기를 끝내고 이스라엘 고토로 돌아온 유다의 포로객들이 성전 재건과 함께 국가적 차원의 부흥운동을 벌이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고무하기 위한 취지의 찬송시가 바로 ‘할렐루야 시’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고백 속에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그들 자신의 비극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의 구원을 가능케 하였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눈과 서리와 우박이 초래하는 광야의 겨울 추위를 이기게 한 것이 바로 그들의 구원자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다양한 형태의 인생의 ‘추위’는 각각 다르지만, 결국 그 모든 삶의 ‘냉기’를 이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직 창조세계의 궁극적 선함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신실한 성품을 반영하는 그의 말씀 뿐입니다. 단지 믿음의 영역에 있어서만 아니라, 삶의 모든 요소들에 있어서 누군가의 말은 곧 그 사람의 성품이며 인격입니다. 누군가의 말을 믿는다는 것은 곧 그 사람 자체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인생의 온갖 추위를 이기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곧 그 사람 자신의 하나님을 대하는 마음가짐 자체가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그 거룩하고 온전한 믿음의 일관성이야말로 매번 변화와 변천의 필연성을 강요하는 이 세상의 아픔을 이길 수 있는 비결입니다. 힘들고 어렵게 여겨지기만 하는 삶의 상황 속에서 혹 자신을 구원해내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릴 적마다 스스로 눈을 들어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의 일관된 마음을 해하려 보기 바랍니다. 눈과 서리, 우박을 동반하는 겨울의 추위가 괜한 것이 아니듯, 북풍한설을 내모는 봄의 온기와 바람 또한 결코 괜히 부는 것이 아닙니다.

겨울 추위 속에 다듬어진 단단한 씨앗의 생명력이 이듬 해 봄의 새싹을 피우며 가지와 잎사귀의 푸르름을 보장하는 법입니다. 겨울 추위가 없으면 봄기운에 따른 생명의 약동 또한 없습니다. 추위에 떨며 견뎌온 그만큼의 활력과 결실이 주어지기 마련입니다. 여러 모양으로 다가오는 인생의 시련과 아픔 속에서, 순전히 이기심이 동기가 된 낙심과 절망 대신에, 믿음으로 창조주의 진리의 선함과 유익을 경험하십시오. 대부분 구원의 열망은 일시적이며 조건적인 삶의 이유에서 기인하지만, 창조주께 대한 믿음은 우리들 각자의 삶의 형편에 따라 메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순간적인 것에 메이기를 거부하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말씀의 성실함을 믿는 믿음입니다. 삶의 시작과 끝을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정하고 나면, 전혀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불의하고 잘못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일체의 모순이 없습니다. 겨울 추위 후에는 반드시 봄의 기운이 밀려오듯, 힘든 일이 지나고 나면 꼭 좋은 일이 주어질 것입니다. 인생의 고난 속에서 창조주의 신실함에 대한 새로운 눈이 뜨여지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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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8일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시 142:7)

‘갇힌 자의 노래’라는 별명을 지닌 시 142편은 다윗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몇 번이고 옥에 갇히는 것과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다윗은 일찍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블레셋 군대와의 싸움에서 골리앗 장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지만 그를 정적으로 여긴 사울 왕의 시기 때문에 이후로 무려 십년 간을 도망자의 처지로 지내야 했습니다.

하다못해 원수의 나라인 블레셋의 가드라는 곳으로 피신하여, 그곳 사람들의 앙갚음이 두려워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숨어 지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곳에서의 다윗의 은신처가 바로 아둘람 굴입니다. 삼상 22:2에 따르면,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고 말합니다. 원수의 나라에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일조차 어려운 지경에서 비록 굴 속에 갇혀 지내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있었고, 훗날 그들은 다윗의 평생지기가 되어 그의 왕조를 이룩하는 공신들이 됩니다.

삼하 23장의 기록에 의하면, 그 사람들 가운데 요셉밧세벳이라는 장수는 팔백 대 일로 싸워 이겼고, 브나야라는 장수는 사자를 쳐 죽일 정도로 용맹한 장수였습니다. 그 외에도 그 무리 중에 그 유명한 나단 선지자도 있었고, 충신 중의 충신인 우리아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삼십칠 명이나 되었고 한결같이 다윗에게 충성하였습니다 (삼하 28:39). 결국 한때 옥에 갇힌 것과 같았던 다윗의 시련이 그의 왕조의 초석을 이룩하는 기회가 된 셈입니다. 마치 자신의 영혼이 옥에 갇힌 것만 같은 처지로 인하여 부르짖음과 원통함을 내뱉는 말로 시작하는 다윗의 기도가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시 142:7) 라는 감사와 확신의 말로 끝나는 이유입니다.

전염병이 창궐하여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도록 강요받는 시대에 혹이라도 삶이 옥에 갇히는 것만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육체의 삶이라는 것이 고작 영혼을 가두는 감옥인 것처럼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생의 약속을 간직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모든 유형의 현실적 얽매임으로부터의 자유의 특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신체적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물리적 얽매임은 기껏해야 죽음의 권세를 부리는 것 뿐이지만, 우리에게 영생의 자유를 허락하신 그리스도 안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차원의 보장이 말 그대로 영원한 삶, 즉 생명 중의 생명입니다.

‘죽음에 의한 죽음’의 강요를 물리치도록 하는 참 생명의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 10:28)고 당부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윗처럼, 스스로 옥에 갇히는 것만 같은 삶의 여정이 반드시 믿음 안에서 새로운 삶의 영화와 존귀를 회복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바라고 또 바라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믿음으로만 그 끝을 볼 수 있습니다. 전염병에 대한 염려로 기왕에 서로 간에 인간적 접촉이 어려운 때에 하나님과의 속깊은 대화와 만남에 주력하여 그가 친히 모든 삶의 얽메임으로부터 자유케 하실 것을 약속하는 위로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정말로 인간을 그 메임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실 분은 하나님 한분 뿐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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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3)

편 136편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주제로 하는 교독문 형태의 찬송시입니다.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 백성의 과거의 역사 속에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일일이 열거하면서 현재에도 역시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들 자신의 삶의 원동력이 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시편의 많은 찬양시들이 다 그렇지만,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마주할 적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푸셨던 은혜를 기억하면서, 그 은혜의 연장선 상에서 온갖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운 현실의 어려움을 능히 타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은혜스러운 기억력에 의한 삶의 치료효과와도 같습니다. 사람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바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삶의 처지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이며 조건적인 판단에 메인 나머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다분히 비교적인 차원의 우열의식을 기반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그의 은혜의 부르심을 따라 삶의 기회를 제공받은 고유하고 특별한 자기 존재의 가치를 상실한 체로, 현실적 이해관계나 물질적 성취감만으로 인격의 가치를 재단하는 잘못을 범할 때가 많습니다.

자신을 가장 무시하고 괴롭게 하는 당사자가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 되고마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모두 26절로 구성된 시 136편은 매 절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감사 찬송의 이유가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기본적으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관계의 성실함과 진실함에 내포된 하나님 자신의 성품입니다.

언약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수혜자인 이스라엘을 대하는 방식 자체가 인자하다는 뜻입니다. 정치적 동맹관계를 전제로 피차 운명공동체가 된 이스라엘과 그들의 신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언약의 수혜자인 이스라엘이 먼저 그 관계를 소홀히 하거나 배반하지 않는 한 언약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 관계를 저버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애초에 언약관계 자체가 이스라엘의 필요에 따라 맺어진 것입니다. 변화와 변덕의 주체가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일 뿐, 하나님은 결코 변해야 할 이유도 가능성도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이스라엘이 그 언약관계의 유익을 얻는 삶을 지속해주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시 136편 전체에 걸쳐 언급된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 속의 하나님의 자비로운 행동들의 나열은 그토록 변함없는 마음으로 자신들을 대하셨던 하나님의 일관성에 반대되는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의 불신앙과 변덕스러움에 대한 후회와 뉘우침, 그리고 새로운 결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삶의 비천함은 세상에서 경험한 그들 자신의 삶의 낮은 지위를 뜻합니다. 430년 간의 애굽의 종살이와 바벨론 포로기 70년 세월이 그 예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땅 위에서 비천한 처지를 경험하면서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지만, 그 때에도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에게 자비로우셨던 것입니다. 애굽의 철권통치가 끝나고, 바벨론의 군대가 페르시아에 의해 함락된 것이 모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맺은 언약관계의 유효함을 나타내기 위한 일련의 조치였던 셈입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순전히 이스라엘의 구원과 생존을 위해 친히 이끌고 가실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스스로 가장 비천해 보이는 것만 같은 삶의 처지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새로운 눈이 뜨여지는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우리를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성품입니다. 우리의 공로나 가치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 자신의 성품이 그러하며, 그의 존재의 방식 자체가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약속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항상, 그리고 영원토록 자비로우십니다. 그 사실을 액면 그대로 믿는만큼  우리들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의 삶의 가치가 높고 귀해집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믿지 못하면, 인생의 가치가 초라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가장 낮은 삶의 처지에서 가장 높고 귀한 자기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십시오. 믿는 사람, 믿을줄 아는 사람이 귀하고 높은 사람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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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4일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시 128:2)

편 128편은 노동의 참된 의미를 일깨우는 시편으로 유명합니다.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는 말씀에는 손의 수고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축복의 여지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노동은 일찍이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말씀을 범한 결과 죄에 대한 형벌의 일환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그들이 임의로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의 모든 피조물들을 가꾸고 돌보는 수고로움의 책임을 맡겼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피조세계 전체의 관리 감독, 그리고 창조 질서의 보존과 같은 신적 대리자의 수고를 감당하였던 것입니다.다만 그 일을 순전한 기쁨과 감사, 그리고 복종의 즐거움으로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인한 그들 자신의 보람과 또한 모든 피조물들에게 끼치는 유익과 행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에덴이라는 말의 뜻이 ‘극락’이라는 이유 역시 인간 본연의 노동과 수고의 가치가 극대화된 장소가 바로 그곳이라는 의미에서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려면 사람이 수고하지 않아도 에덴의 즐거움을 보장해주시는 무책임과 불성실을 조장하는 분은 아닐 것입니다.

많은 수고와 땀흘림의 과정 속에서 피조물의 본분을 깨닫고, 또한 참된 수고의 대가로 삶의 보람과 만족의 이유와 목적을 제공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면서 다만 피조물로서 마땅한 삶의 희열을 맛보도록 지어진 존재가 바로 타락 이전의 인간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 거룩한 노동과 수고의 의미에 있어서 타락을 초래한 것이 바로 사탄의 미혹에 이끌려 피조물의 본분을 망각한체 스스로 창조주인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의 유혹과 그로인한 너머짐이었습니다. 결국 사탄의 미혹은 수고없는 인생의 헛되고 거짓된 만족을 넘보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피조물로서 자기한계, 즉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삶의 실천을 위한 수고를 당연시 하는 마음가짐에는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와 목적이 없습니다. 피조물의 위치에서 수고는 당연하며, 그것이 참 만족과 보람, 그리고 상급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피조물의 경계를 허물기 시작하면 결국 인생의 수고가 손해이며 형절처럼 여겨지기 마련입니다.

시 128편을 포함하여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 하의 시편 전체 (120-134편)가 ‘예루살렘의 복’을 구하며 찬송하는 공통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곳이 의미하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의 기쁨이 회복된 성도의 삶의 가장 중요한 특징과 축복이 바로 삶의 수고로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수고와 온갖 노력의 가치가 충분히 인정받는 자로서의 삶이 참으로 복된 삶입니다.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든지, 혹은 삶의 처지가 어떠하든지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받으시고, 스스로 그의 대리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노고가 없는 것이 결코 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온갖 수고로움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성실함과 그가 맡기신 일을 감당하는 것이라는 마음의 확신이 바로 복의 증거입니다.

온갖 삶의 무게와 버거움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참된 복의 이유가 될 ‘내 몫의 수고와 보람’의 이유를 찾으십시오. 예수님 말씀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항상 우리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요 5:17). 거듭 말하거니와  고생하지 않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수고와 노력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불행이며 저주입니다. 그날 그날의 수고의 기쁨을 허락하신 주님께 늘 마음으로 감사하면서 고생 중에 더욱 주와 동행하고 가까운 삶을 사십시오. 우리 몸이 참되게 흘리는 땀만큼이나 주님은 우리와 가깝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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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7일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신 32:8)

32장의 ‘모세의 노래’는 모세 자신의 유언과도 같습니다.  살아 생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한 율법의 모든 말씀을 결단코 저버리는 일없이 온전히 준수할 것을 당부하는 생애 마지막 당부입니다. 그냥 말로 만으로는 모자랄것 같아서 노래로 부르면서 대를 이어 그 다짐과 충성을 다하도록 한 것입니다. 유언은 사람이 남길 수 있는 마지막 말입니다. 가장 하고싶고,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말을 남기기 마련입니다.듣는 사람도 그렇게 듣기 마련이고요. 모세의 노래의 핵심 주제는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기업이며, 또한 하나님 자신은 이스라엘의 기업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다만 하늘의 이치에 따라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입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이 땅 위에서 마지막으로 하고자 했던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 즉 이스라엘이며, 그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친히 택한 기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외의 다른 민족들을 역차별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역시 창조주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복된 약속을 누릴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와 축복은 이스라엘에 대한 선택적 사랑의 전제 위에서 행하여 질것입니다. 세상 모든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와 복은 그가 이스라엘에게 베푼 은혜와 구원의 방식대로 될 것입니다.이스라엘에게 베푼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능가하는 식의 복을 받는 백성이나 민족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복의 모형이며 공식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이 세상 어느 민족이나 백성도 이스라엘만큼 더 사랑하거나 위하지 않습니다.

땅 위의 모든 성도는 다만 이스라엘의 복을 하나님께 구할 뿐입니다.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분깃 또는 기업으로서 이스라엘이 갖는 의미입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존재론적인 면에서 그러한 의미를 갖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로서 ‘내 몫의 기업’이 있기 마련입니다. 단지 소유의 영역에서만 아니라 우리들 각자의 존재의 방식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모든 형편과 처지 가운데서 다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감사하고, 자족할줄 아는 마음의 기쁨 혹은 능력과 같은 것입니다.삶의 방식 자체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 즉 기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원리나 방식으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소유된 자의 삶의 권리를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민족들과 인종을 나누실 때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수효대로 그 경계를 정하셨다고 했는데, 그 말의 뜻 역시 이스라엘의 기업을 분명히 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대로 그들에게 일일이 복을 전달하는 식으로 땅 위의 다른 백성들의 존재를 허용한다는 뜻입니다. 숫자의 비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수의 ‘절대성’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의 기업으로서 이스라엘의 수를 가감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떠한 삶의 악조건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는 반드시 채워집니다. 그 수 자체가 하나님의 기업으로서 절대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인간 세상의 온갖 비교원리에 메이다 보면 성도라도 자기 삶의 가치를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업이 된 자로서 절대적인 가치를 의식하면서 삶을 사십시오. 세상에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께는 우리들 각자가 오직 ‘하나뿐인 그대’와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대하되 오직 ‘하나뿐인 당신’을 대하는 마음가짐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삶은 결코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감사와 감격을 이어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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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며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하시는 맹세에 참여하여” (신 29:12)

약과 맹세는 믿음생활의 양면성, 즉 특권과 의무를 가리킵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주시마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에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이끌리지 않고 순전히 하나님 편의 주도적인 의지에 따라 평생 구원의 길로 인도함받는 것입니다.그런가 하면 여전히 우리들 자신의 맹세를 변함없이 준수해 가는 것이 또한 믿음의 다른 면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속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이 확증되어 가는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작은 맹세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들 각자의 믿음의 표현이라는 점을 인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감동과 교훈을 따라 행할 때 우리 스스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서 삶을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우리 속에서 맹세로 변화되어가는 과정이 바로 믿음의 경험 또는 증거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일상의 삶 속에서도 모든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만 그 의미와 가치가 보장되는 법입니다. 지키지 않는 언약과 약속이 많아질수록 인간의 삶은 황폐해지기 마련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며,’ 또한 그가 하신 맹세에 ‘참여할’ 자들이라고 부른 것은 사람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일평생 짊어지고 가야할 삶의 조건과과 같은 것이라는 뜻에서입니다.

인생의 모든 상황 속에서 그가 베푸시는 영원한 구원의 약속이라는 안전장치를 보유한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억지로 맹세를 강요당하듯, 언약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 자체가 버겁고 힘들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단 바다 길을 시작한 사공이 노젓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으며, 산새가 고르지않다고 해서 오던 길을 되돌아 갈 수는 없습니다. 마음대로 곁길로만 가지않으면 강이든 산이든 결국 닿아야 할 곳으로 향하기 마련입니다.

매사에 끝까지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는’ 마음가짐을 가지십시오. 이편에서 저편으로 강을 건너라고 배가 있는 것처럼, 모든 하나님의 약속은 그것으로 저마다 인생의 끝을 삼으라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생에게 언약을 주셨다면, 그것은 필경 평생토록 간직해야 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매일매일 하나님과의 약속에 참여한다는 마음을 갖고 삶을 살다보면, 물 위의 배가 절로 미끌어져가는 것처럼, 삶의 참 기쁨과 행복의 길로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무리 적어도, 성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간직한 사람들입니다. 참 생명에 속한 모든 귀한 것들이 거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매 순간 하나님과의 언약에 참여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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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신 28:1)

복과 저주에 관한 신명기 법의 규정은 철저히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언약관계의 의무이행을 전제로 합니다. 어느 한편 당사자의 일방적인 주장이나 간청에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경의 복은 결코 미신적이지 않습니다. 축복에 합당한 삶의 전제조건, 즉 매사에 주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행하는 생활방식없이 인위적이거나 무책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복을 구할 수 없습니다. 수고하고 노력한 대가로 얻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뿐 그것이 무슨 복이겠느냐고 생각하지만, 삶 자체의 변화무쌍함을 고려할 때  축복의 조건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만을 전제하는 것 자체가 확실한 복입니다. 그만큼 삶이 일관되고 정직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않으면, 인간의 삶이 온갖 복의 조건들을 좇아 헤매는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의무만을 축복의 전제조건으로 삼은 이유는 복과 저주의 주체가 결코 독립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의 모든 유형의 축복과 저주의 원천입니다. 인생의 축복과 저주는 하나님의 뜻의 대리 역할을 할 뿐, 그 자체의 세력이나 존립 근거를 갖지못합니다.

인간이 그것 자체에 대해 일일이 신경쓰거나 마음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분 안에 거하면 삶 자체가 복의 근원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없이 살면 복된 환경 속에서도 삶의 질이 여전히 저주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자들을 높여주신다는 뜻입니다. 땅 위의 온갖 복과 저주의 개념에 대한 이해에 사로잡히지 않고,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생의 참된 복을 헤아릴줄 아는 사람으로의 변화를 가리킵니다.

사람 자체가 높아지고 그 마음의 동기가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복의 규정 자체가 어렵습니다. 무엇이 복이며 무엇이 저주인지조차 알지못하기 때문입니다. 복과 저주 그 자체에 메이기보다, 복과 저주를 바르게 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청종과 순종입니다.

창조주의  뜻을 알아야만 피조물의 입장에서 복과 저주의 이치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복이 무언지, 저주가 무엇인지 도대체 알지못하는 상태에서 삶의 최후를 맡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스스로 ‘높은’ 사람이 되는 법을 터득하십시오. 특별히 인생의 바른 도리로서 복과 저주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영역에 있어서 차원이 높은 삶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내면이 주님을 닮아 높아지지않고는 결코 삶의 질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삶의 취지와 특성 자체가 높아진 성도가 되십시오. 복 중의 최고의 복은 언제든지 나 자신이 복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그 최고의 복을 누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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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7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신 24:18)

명기법을 포함한 모세오경의 근본 취지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항상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가 약자이며, 약자로서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삶의 성취와 보람을 이룩하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은 이스라엘 공동체 형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최대한 정직성을 유지하는 일이었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은혜입은 자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그르치면 이스라엘 사회는 한 순간에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라고 말하는 이유 역시 이러한 이스라엘의 존재방식 때문입니다. 비록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이 그 사회를 변화시키고 개조할만한 능력은 없어도 서로에 대한 긍휼과 자비가 넘쳐날 때 거기에는 반드시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편의 초월적인 개입이 수반되기 마련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자만심을 바탕으로 아무리 타인의 문제점을 지적해도, 막상 자기 스스로를 작게 여기면서 당연한 권리와 특권을 포기하는 일에 인색하다면 공동체적 차원의 삶의 변화와 개선의 여지는 결코 마련될 수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긍휼과 자비만이 인간의 삶을 부요케 하며 더 나아지도록 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긍휼과 자비는 오직 인간 스스로의 한계와 유약성을 깨닫는 마음의 정직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들에서 농작물을 수확하는 일에조차 처음부터 곡식의 전부를 내것으로 여기지말고 다른 사람들, 즉 객과 고아와 과부의 것일 수 있다는 식의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른 봄 햇볕 따가운 들녁에서 땀 흘리며 일한 노동의 대가만 생각한다면, 바닥에 떨어지는 낱알갱이 하나라도 내것으로 아끼고 일일이 거두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땅의 주인이 하나님 한분이시며, 인생은 모두 나그네처럼 지나갈 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땅 위의 어느 것 하나 영원히 내것으로 주장해도 되는 것은 아에 없습니다. 나의 주장을 포기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아무 것도 취할 수 없는 인생여정에서 일찌감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스스로의 손을 거둬들이는 일이 사실은 더 많은 것을 더 오래 누리는 비결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로서 정직한 자기 이해를 가지십시오.적은 것도 하나님과 함께 소유하고 누리는 법을 알게되면 그로인한 삶 자체의 보람과 만족은 기하급수적입니다.

매사에 가난하고 연약한 존재로서 자기 이해를 통하여 하나님의 부요함과 강건함이 항상 삶 속에 살아 역사하는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생각이 정직하고 기억이 올바르면 정말로 우리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믿는 자의 삶에 능치못함이 없습니다. 서로서로 정직한 마음가짐으로 참되고 진실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얻고 누리는 삶을 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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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너는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여 무죄한 자의 피 흘린 죄를 너희 중에서 제할지니라”(신 21:9)

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피살자의 억울함을 처리하는 방식에 있어서 해당 성읍의 장로들과 재판장들, 그리고 제사장들까지 모두 동원되어 암송아지를 속죄물로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암송아지의 피가 의미하는 정결함의 뜻을 좇아, 어떤 식으로든 간에 자신들이 거하는 곳에서 변을 당한 피살자의 억울한 죽음에 대하여 백성의 지도자들이 대속의 짐을 질 것이라는 마음가짐의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의 구원 역사가 의미하는 대속의 은혜에 힘입어 자유인이 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다른 나라들처럼 국가를 구성하고 살아갈 때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배푼 대속의 은혜를 영원히 기억하고, 그 삶의 방식을 통하여 ‘대속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구현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피는 반드시 피로서만 대신할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한 것이므로 사람의 피를 흘리는 행위는 곧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며 반역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한 것입니다.

살인과 살상이 난무하는 고대 사회에서 지극히 사소한 이유때문에 사람의 목숨을 헤하는 일이 흔하였던 상황 속에서 원인불명의 피살자의 시신을 거두는 일을 위해 성읍의 모든 지도자들이 앞장 서도록 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이스라엘 사회에서 살인은 정당화 될 수 없으며, 반드시 그에 대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책임을 하나님께서 요구한 것입니다. 원인을 알 수조차 없는 피살자의 죽음에 대해 그토록 심각한 공동체적 책임을 요구한 것은 그 외 다른 알려진 이유때문에 살인이 행하여질 여지를 아에 없애기 위함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 아담 가문의 두 아들, 즉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데서 비롯된 사실은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생명의 유지와 번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죽음의 위협과 유혹이 그만큼 흔하고 가깝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많은 제사제도에 관한 규례가 단순히 죄를 씻기위한 차원이 아니라, 죄가 초래하는 살인과 살상의 위협으로부터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취지까지 담고 있습니다. 마음의 모든 미움과 원한의 감정에 대해서까지 일일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동기로만 아니라 온갖 상하고 거친 마음의 유혹과 원한 때문에도 늘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그의 대속의 은혜와 능력에 힘입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다는 것은 단지 모양좋고 느낌이 순한 것만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진실과 진심은 오히려 항상 부서지고 깨어진 모습 그대로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다른 누군가에 대해서도 혹이라도 억울한 피의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위해 피차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여 늘 그분의 대속의 은혜를 힘입어야 합니다.

혹이라도 가깝다는 이유로 서로에 대해서 희생의 피를 흘리게 만드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피차 하나님께 대한 마음의 정직함만이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을 가장 괴롭게 하는 죄로부터 우리들 자신을 지키는 비결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정직함을 회복할 수 있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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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3일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신 17:18)

구든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평생 ‘한 책’의 사람, 즉 하나님의 율법을 친히 책에 써서 읽고 준행하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보좌에 앉은 왕으로 하여금 제사장 앞에서   직접 자기 손으로 율법서를 책에 기록하도록 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왕권 자체가 하나님의 허락을 전제한 것임을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왕의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내내 이스라엘의 참 왕이신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 하며, 오직 그의 대리자로서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서약과 다짐을 해야만 했습니다. 왕권 (monarchy) 자체가 단 하나의 절대 권력과 통치의 기반을 전제하며, 왕국은 오직 한 가지 권력체계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 구조입니다. 그 한가지 권력의 핵을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추구하고 발휘하겠노라는 평생에 걸친 다짐과 결심이 이스라엘 나라에서 왕이 되고자 하는 사람의 필수 조건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나라 자체가 사람들에 의해 조직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부르심과 언약에 따라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사회 구조와 특성이 사실은 모든 인류의 실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왕의 조건과 의무에 관한 신명기의 말씀이 실제로 인생의 올바른 도리를 지적해 줍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기를 바라며 자기 방식대로 행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구의 지배를 받습니다. 최소한 인간의 삶의 내면적 영역에 있어서만큼은 사람은 누구나 각각 왕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자가 제사장 앞에서 친필로 기록한 모세의 율법서 사본을 평생에 곁에 두고 읽고 묵상하며, 또한 그대로 실행하면서 살아야 한것처럼, 인생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함으로써만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왕으로서 유일무이의 권력 기반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저마다의 삶의 근본이 붕괴되고 맙니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간에 인간의 삶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는 한도 내에서만 바르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병마, 즉 전쟁에 대비하여 말과 병사를 모으는 일은 물론 은금을 쌓고, 심지어는 아내를 두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제 맘대로 왕권을 행사하는 여지가 없었습니다.

왕이 되는 것 자체가 매사에 제한과 제약을 경험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더욱 절실하게 이스라엘의 참 왕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도록 한 것입니다. 살아갈수록 성도의 삶에 하나님 편의 제약과 제한이 많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 스스로 삶의 제약을 느끼는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왕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주 사소한 영역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인생의 가장 초보적인 욕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간섭을 받아들여야만 우리 스스로 진정한 왕이 되는 것입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고말 인생이 어줍잖게 왕노릇하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고 그의 다스림을 따라 행하는 것으로 삶의 보람과 기쁨의 이유를 삼기 바랍니다. 그가 친히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이 되어주셔야만 우리의 삶이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평생토록 오직 한 왕을 모시는 충실한 신하로서 삶을 사십시오. 성도라면 그것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왕과 주인이 되는 비결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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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6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신 14:2)

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다분히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변화된 삶의 실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듯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삶의 안팎에 걸친 다양한 변화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도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일 자체가 마치 우리의 입장에서 대단한 수고와 헌신을 해야하는 일인것 같지만, 참된 사랑과 순종은 우리들 각자에 대한 하나님의 주도권을 깨닫고 인정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비록 우리의 오관을 통한 충분한 경험이나 확증이 부족한 상태에서도 하나님은 순전히 하나님 자신의 선함과 성실한 본성에 따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로 삼아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에 대한 이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거룩해진 우리들 자신의 본성에 대한 이해 역시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충분히 거룩한 존재가 되었다는 믿음을 토대로 하여 매사에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고자 하는 삶의 의지를 키워가야 합니다. 때로는 그 일을 감당하는 데에 필요한 확증이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에는 믿음의 의지를 발휘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거룩한 행동을 취할 때, 그 일의 가치와 타당성을 뒷바침해주는 마음의 확증이 따라오곤 합니다.

신 14장에 열거된 이스라엘 백성의 식생활에 있어서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 편의 요구는  그들의 건강과 행복, 그리고 거룩한 삶의 목표의식을 갖도록 하는 하나님 자신의 바램과 의지의 표현입니다. 먹어도 되는 것과 먹지말아야 할 것을 구분해 놓는 일 자체를 우리의 자유의지를  침해하는 하나님의 간섭처럼 여길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편의 그러한 구분 자체가 우리를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성품을 지닌 자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거룩한 것으로 여기는 모든 먹거리의 정체와 특성이 한결같이 보건위생적으로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며 유익한 것들입니다. 반대로 부정하다고 간주되는 먹거리의 대부분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종자들입니다. 짐승의 사체를 먹는 새와 가축이라도 새김질을 하지않는 탓에 먹이의 독소가 몸 안에 남아있는 짐승들은 모두 부정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거룩한 삶의 유지를 위한 하나님의 모든 명령은 반드시 우리를 거룩하고 온전하게 하기위한 하나님의 마음을 믿음과 선의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거룩함이란 한, 두 가지의 반복적인 행위나 습관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의 일치, 즉 우리를 지극히 위하시며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복종, 그리고 신뢰를 회복함으로써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온전히 이룩하십시오.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은 하나님의 모든 요구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일치와 연합이야말로 우리가 구해야 할 최고의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마음으로터 일치가 결국 성도의 삶에 수반하는 모든 일을 가능케 합니다. 항상 거룩한 하나님을 믿는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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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9일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신 11:14)

나안 땅의 이른 비는 5월부터 9월까지의 건기를 지나고 10월과 11월에 내리는 비를 말하며, 늦은 비는 이듬 해 건기가 시작하기 전 3월에 집중적으로 내리는 비를 뜻합니다. 10월과 11월의 이른 비는 건기 동안 완전히 말라버린 대지를 적셔서 씨를 뿌리고 농사를 시작하기에 적절한 토양으로 바꾸는 데에 필요합니다. 반면에 다음 해 3월의 늦은 비는 수확기를 맞은 곡식이 알차게 영글 수 있도록 충분한 수분을 공급하는 역할을 합니다. 한 해 농사의 풍작을 가져오는 데에 결정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 년에 단 두 차례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는 지역인만큼 농사의 진행 속도에 따라 적절한 시기에 비를 경험하는 것이 가나안 땅에서의 생존의 필수 조건입니다.

모든 농사가 ‘타이밍’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리저리 마음의 동요와 불편함이 없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정확한 시기와 양이 문제이긴 하지만 최소한 매년 두 세 차례씩 내리는 비가 전혀 오지않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사는 동안 겪은 기근과 가뭄은 주로 그들의 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그들을 연단하고 시험하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며, 실제로 지금처럼 기상이변이 생겨서 비가 내리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비의 시기와 때에 관한 하나님 편의 믿음을 갖고서 그들 스스로 안심하고 기다릴줄 아는 마음자세가 필수적이었습니다. 약간의 시차와 양의 차이일 뿐, 자연의 질서에 따라 내리는 비는 결국 창조주 하나님의 성실함을 나타내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 그들의 신 여호와 하나님의 성실함을 믿지못하고 인간적 조급함과 불평에 빠지게 되면 영락없이 비를 주관하는 또 다른 신적 주체가 있을 것이라는 미혹에 빠지게 됩니다.

잠간 동안의 마음의 조급함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제일로 금한 다른 신을 인정하고 우상숭배에 빠지는 죄악을 범하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청종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무슨 마술적인 힘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의 성실하심을 믿는 우리들 각자의 마음의 변화가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더불어 참되고 진실한 사랑을 나누다보면 그 사람의 허물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참 사랑과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 가운데 우리들 각자의 이기적인 마음이 초래되는 우상숭배와 같은 초라하고 경박한 삶의 태도를 벗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참되고 거룩한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득할 때라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기독교 자체가 말씀의 종교, 즉 하나님의 참되고 거룩한 성품을 계시하는 말씀을 믿음의 내용으로 삼는 이유입니다. 항상 불안하고 불의하며, 불편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마음을 그 반대로 항상 진실하고 의로우며 편안한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참된 사랑의 말씀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허망해지기 쉬운 온갖 인간적인 생각과 마음의 동기를 항상 하나님의 참 진리와 교훈으로 가득하게 채우십시오. 아무리 이치가 분명해 보여도 인간 속에서 나오는 생각들은 결국 죄성을 반영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들 자신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않아도 우리의 생각 속에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가 가득 차있으면 결국 자기 자신과 모두를 유익하게 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함으로서 일체의 마음의 불편함이 사라지는 참된 믿음의 유익을 꼭 경험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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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2일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 8:16)

셉 생전에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애굽으로 이주한 이후로 400년 넘게 던 고센 땅은 목축업을 주로 하는 그들의 형편에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애굽 땅의 90퍼센트 이상이 사막 지역인데 비해, 고센은 나일감 삼각지의 동편부에 위치한 비옥한 곳이었습니다. 농사를 주로 하는 애굽 사람들이 목축업을 천한 직업으로 여긴 탓에 그들이 내륙으로 들어오기보다는 국경 지역인 고센 땅에 거하도록 허락한 것으로 보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이 힘들 때면 어김없이 모세를 원망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갈 것을 희망한 이유가 바로 고센 땅의 비옥함 때문이었습니다.

종살이긴 하지만 그곳에서 누리던 물질적 풍요로움만큼은 광야의 절박한 삶의 형편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로 이끌어 내시고 기름진 음료 대신에 생존에 꼭 필요한 양만큼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만나를 먹도록 했습니다. 배부름이 목적이 아니라 창조의 능력과 순종의 덕을 일깨우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애굽에 내린 열가지의 초자연적 재앙을 경험한 것에 비추어 볼 때, 광야에서 고작 만나에 의존하면서 연명해야 하는 자신들의 처지가 더욱 기막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으로 살면서 배불리 먹는 것이 광야에서 자유인이 되어 굶주림을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낫지않을까 라는 마음의 유혹을 사십년 간이나 겪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 사십년 세월이 그들로 하여금 만나와 함께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생명의 말씀에 대한 인격적인 순종의 덕을 쌓도록 하기위한 시간이었습니다.

음식은 결코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사명감을 일깨우기 위함임을 알도록 한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먹는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의한 다스림을 받을 수 있어야만 비로소 다른 방면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도구로서 삶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먹고사는 일이 순전히 자기 의도나 욕심대로 되지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자기 처지를 원망하거나 자기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탓하는 식으로는 삶 자체의 개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믿고 따르는 백성들의 삶의 처지를 낮추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일부러 그 백성을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운 처지를 겪는 동안 하나님의 사람들의 매너와 사고방식에 있어서 훈련과 절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마음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사백 삼십년 간의 종살이를 이어 온 이스라엘 백성의 기질상 먹고사는 문제와 같은 인간으로서 본능적 충동이 제어되지 않고는 결코 그들 자신과 후손들이 자유인이 되어서 나라를 세우고 가정을 세우는 일 같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그 모습 그대로라면 그들은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평생, 아니 대를 이어가면서 노예생활을 반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먹는 욕구를 포함하여 인간 본연의 모든 욕망에 걸쳐서 주님의 다스림을 받으십시오.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성도의 삶에 소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지란 결코 없습니다.

신앙은 ‘프라이버시’가 아닙니다. 프라이버시에 속한 것이 하나님과의 언약과 부르심의 목적을 위한 것이 될 때라야만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어서 그가 베푸시는 인생 최고의 목적과 가치를 구현할 수 있게 됩니다. 먹는 욕구를 포함하여 인간 본연의 모든 욕망의 표현을 순전히 자기 자신을 낮추기 위한 기회로 활용하십시오. 이제껏 내 마음대로 하던 식의 욕망의 표현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될 때, 거기서부터 우리를 이스라엘처럼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소유된 사람들로 세우시고 복된 일을 위해 그가 친히 들어쓰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 거하면 인간 본연의 가장 추한 욕망이 오히려 거룩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성취하는 신적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매일매일 욕망의 지배 (obsession) 대신 신적 부르심에 대한 순종 (obedience)의 삶을 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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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

“너는 여기 내 곁에 서 있으라 내가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네게 이르리니 너는 그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서 내가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는 땅에서 그들에게 이것을 행하게 하라 하셨나니” (신 5:31)

계명을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들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즉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 자신의 임의대로 들어서는 안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는 순전히 하나님의 의지와 생각을 반영합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의 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의 처지를 다른 어떤 신보다 더 잘 아시며, 그들에게 최고의 구원의 선물을 제공하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구원의 은혜는 다만 이스라엘이 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고 행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 하나님은 고대 사회의 포악한 군주들처럼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에게 최고의 행복과 번영을 베풀고자 하는 어진 왕입니다. 따라서 그들을 향한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들이 한결같이 진심으로 그들을 위하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지의 여부에 따라 그의 명령에 수반하는 삶의 참된 유익과 기쁨이 보장됩니다. 문제는 백성들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내포된 바와 같은 하나님의 복되고 선한 성품을 믿기에는 그들 자신의 삶의 형편이 그만큼 미치지 못하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알아갈수록 그들 자신의 삶의 괴리가 날로 커져만 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이 직접 듣지않고 중보자 모세를 통하여 듣도록 한 이유입니다. 무슨 말이건 간에 그 말을 한 당사자의 입장을 고려하여, 애초에 그가 말하고자 한 바대로 듣고 이해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순전히 듣는 사람 자신의 오해와 잘못으로 원래의 말의 의도를 전혀 벗어나는 식으로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관계의 불화의 원인 대부분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 일을 위해 부름받았으며, 정작 그 자신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계명의 전달자로서 사명을 감당합니다.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의 전달자 역할을 감당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출애굽 2세대의 몫인 가나안 땅과 관련한 모세 자신의 어떤 이해관계도 모두 배제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이해관계나 개인의 현실적 판단이 배제된 상태에서 순전히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취지 그대로를 전하고 나눌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되, 그분의 뜻과 의지대로 듣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자신이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 많아 보여도 정작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은 몇가지 안될 때가 많습니다. 불필요한 소원과 욕구를 골라내듯, 하나님의 말씀의 순전함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의 모든 진리는 우리의 ‘소원’을 만족시키는 대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고자 합니다. 꼭 필요한 것을 얻고나면 무리한 방식의 소원과 욕구를 벗어버리는 일이 훨씬 더 쉬워집니다.

때로는 삶의 불행이나 슬픔의 원인에 대해서도 소원의 법칙이 아니라 필요성의 원리에 따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시련과 역경을 통한 내면의 정화와 강화를 위해 신적 은총이 인간적 불행의 옷을 입고 다가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스라엘이 모세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 그리고 법도들 들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대속의 죽으심, 그리고 부활의 능력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신, 구약 성경의 모든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일에 꼭 필요한 답안지와도 같습니다.삶의  불행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리의 말씀 안에서 행복과 소망의 근거가 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에 까지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가 미치는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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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8일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막 14:36)

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는 마가복음 전체의 기록 중에서 가장 인간적이며 또한 가장 신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인간적이라 함은 그의 대속의 죽음이 제자들을 포함하여 예수님 주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의 버림과 외면 가운데 이뤄진 것이라는 뜻이며, 그러면서도 그의 죽음의 결단이 하나님께 대한 가장 친근한 형태의 기도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것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가장 신적인 면을 보여줍니다.

마가복음의 문맥상 겟세마네의 기도 직전에 베드로의 부인에 대한 예고가 있고 (막 14:27-31), 직후에는 유다가 군대를 이끌고 예수님을 잡으러 옵니다 (43-50절). 예수님께서 기도를 시작하기 전과 기도를 마친 후에 모두 인간적 배신과 부인을 경험합니다. 그의 기도 중에 잠시라도 함께 깨어있기를 바랬던 제자들 모두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기도하는 중에도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소외되고 외면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하나님을 가리켜 아빠라고 부르면서 가장 솔직한 마음의 표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는 결코 신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스스로를 신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기도하지 못합니다. 기도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이며, 자신이 정말로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유한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방법입니다. 기도의 말뿐만 아니라 그 행위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이 그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모든 상황 속에서 모든 이유와 조건을 앞세우며 쉬지않고 기도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철저한 인간적 배신과 외면으로 도저히 기도할 수 없을것만 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께 간구한 분이 바로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입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가장 친근한 교제의 산물입니다. ‘아빠 아버지’라는 표현은 전통 유대식 기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예수님만의 유일한 기도의 방식으로서, 무엇이든 구하는 것을 다 들어줄 것이라고 믿는 어린아이스런 마음가짐의 표현입니다. 마가복음의 강조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과 마음가짐이 앞서 언급한 철저한 인간적 배반과 소외를 경험하는 상황의 산물이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그의 기도에 대해 ‘예스’라고 응답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일체의 거리감이나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삶이 도대체 자기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는것만 같은 상황임에도 예수님은 그의 하늘 아버지를 향하여 일체의 마음의 거리감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것이 예수님을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 수 있게 한 비결이었습니다.

인간적일 수 밖에 없으면서도 신적인 영광과 하나님께 대한 초월적인 친근함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기도의 가치이며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피하고만 싶은 십자가의 죽음의 결단을 기도로 정하신 것은 기도가 삶과 죽음의 한계를 너머서게 하는 신적인 무기이며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삶이 어렵고 힘들수록 하나님께 대한 더욱 더 친근하고 솔직한 기도를 통하여 인간적 한계를 극복함은 물론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신적인 초월과 결합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한계 그대로 하나님을 향하여 날아 오르도록 하는 것이 기도의 능력입니다. 항상 그 능력으로 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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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신 4:7)

도는 성도를 위대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행위 자체에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거나 기도 하는 사람 자신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정말로 위대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특별한 행동이 아닙니다. 기도는 누구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이 삶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온갖 일들에 대한 도움을 청하는 행동입니다.

가나안 정복 과업을 앞둔 출애굽 2세대들을 위한 모세의 권면 가운데 출애굽 1세대들의 광야생활 중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가리키며 그들이 크고 위대한 나라였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들은 광야에서 모두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가리켜 크고 위대한 나라였다고 말하는 것은 다만 그들의 부르짖음에 대해 번번이 응답하고 그들과 함께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 해도 우리의 간구와 부르짖음의 대상인 하나님은 위대한 분입니다. 그분을 가까이 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를수록 우리들 역시 결국 위대한 사람, 위대한 나라가 되는 법입니다. 그것이 꼭 현실적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실만으로도 기도하는 사람 자신의 내면세계의 견고함과 무한함을 확립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대면을 통해 믿음 안에서 무한대로 확장하는 내면세계의 여유와 능력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가리켜 성경은 세상이 감당할 수없는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히 11:38).

온갖 인간적 연약함이나 현실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삶을 늘 하나님을 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문제가 아무리 크고 어려워도 그것으로 인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마주 하게 되면 우리는 최소한 그 문제보다 더 큰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크고 위대한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자기 스스로 큰 믿음의 사람이 되고난 후 다양한 삶의 문제들을 상대 하십시요. 그러면 크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그 모든 문제들을 지극히 사소한 것으로 여길 줄 아는 믿음의 지혜와 지식이 가능해 집니다 (신 4:6).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성도가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 되는 비결 입니다. 일상의 모든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더욱 친근히 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가까이 해주시는 은혜를 힘입어야 합니다.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 권세가 난무하는 시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부르짓고 그분을 상대 하는 믿음 안에서 더욱 큰 능력을 지닌 위대한 성도가 되십시오. 성도가 믿음 안에서 추구하며 누리는 하나님 나라는 최소한 죽음의 권세가 지닌 ‘한계상황’의 의미가 무효화 된 곳입니다.

영원한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살든지 죽든지 다만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하는 크고 위대한 믿음의 결심 때문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본인 스스로 가족들과의 생이별을 각오한체 헌신하는 많은 의료진들의 마음가짐과 같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을 통하여 참으로 위대한 일을 하도록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삶은 우리를 위축하여 ‘작은 사람’이 되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부르짖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각각 ‘큰 사람’이 되게하는 은혜를 힘입으시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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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5일

“또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시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의 자녀들도 그리로 들어갈 것이라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산업이 되게 하리라” (신 1:39)

별력이 없는 것이 오히려 믿음생활에 더 유익할 때가 많습니다. 자기 나름의 상황파악이나 판단이 오히려 현실을 해쳐 나가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있고요. 선과 악의 최종적인 기준 역시 섣부른 인간적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궁극적인 순종에 의해서 판가름나는 법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간의 삶의 모든 가치의 근본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바로 이것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애초부터 출애굽 이후 광야 사십년 여정은 그들 자신의 판단 대신에 하나님의 판단을 좇아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한 훈련 과정이었습니다. 출애굽 2세대들을 위한 모세의 회고 중 오래 전 출애굽 이듬 해에 있었던 1세대들의 아모리 족속과의 싸움에 관한 일화가 좋은 예입니다. 비록 아모리 족속이 산지에 거하면서 고지대의 싸움에 능한 자들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토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한 이상, 그들 나름의 전술적 판단을 내세우기 보다 일단 하나님의 명령에 대항 무조건적 순종을 보여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430년 간의 종살이를 하면서 단 한번도 그들 나름의 전쟁을 해본 적이 없는 처지이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필 그 시점에 가장 호전적인 아모리 족속과의 싸움을 개시하도록 한 데에는 필경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깨우치도록 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출애굽 1세대 이스라엘은 열두 정탐꾼들을 통한 아모리 산지에 관한 하나님 편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그들 자신의 판단을 앞세우면서 산지로 나아가기를 거절하였습니다.

민 14장에 의하면, 온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차라리 자신들 모두 애굽에서나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출애굽의 자유와 해방을 부여한 여호와 하나님이 마치 그들을 죽이려 하는 것으로 오해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부인한 것입니다. 그토록 모진 말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부인한 출애굽 1세대 이스라엘은 나이 이십세를 기준으로 그 이상된 자들 모두가 광야 사십년을 지나면서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함께 하였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남습니다. 이십세 미만이라는 기준은 단지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 여부를 가리킵니다. 함부로 선악의 기준을 논하지 아니하며, 다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행하는 것으로 삶의 절대 가치를 삼는 순전한 마음과 믿음의 소유자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모리 족속과의 싸움을 명한 시점이 정확히 출애굽 이듬해였습니다.

불과 일년 만에 430년 간의 종살이에서 그들을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였으며, 겨우 일년 동안의 자유인으로서 경험을 갖고 하나님의 뜻을 임의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의 궁극적인 선은 다만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과 순종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덴 동산에서부터 인간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것을 금하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대로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만큼만 알고, 그것을 바르게 믿고자 하는 마음이 급선무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겪는 삶의 곤경이 무엇을 몰라서가 아니라, 잘못 알려졌거나 혹은 바르게 알려고 하지않는 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염병의 위험이 난무하는 시대 속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얻는 삶의 도리를 바로 알고 믿을 때 각종 위험 요인들을 하나님 편의 새로운 삶의 기회로 여길 수 있는 여지들이 많습니다.

제 몸 바쳐 헌신하는 의료진들의 눈물겨운 노고를 보면서 인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값지게 살아가는 삶의 가치와 소명감의 회복을 추구할 수도 있습니다. 과신이나 과용, 또는 과욕을 버리고 성도로서 삶의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을 다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대한 충실함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로 참된 믿음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소리쯤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영원토록 선하신 하나님을 믿어야만 인간이 정말로 선할 수 있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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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일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 21:17)

활하신 주님께서 세번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영생과 제자의 도리를 말씀한 것은 그만큼 제자들의 연약함을 아시고 이해한 탓입니다. 주님의 부활과는 상관없이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 대부분이 온갖 인간적 허물과 연약함을 미처 벗어버리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특별히 베드로를 향하여 세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그가 세번 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두번은 신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셨고, 세번째는 형제애의 차원에서라도 자신을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의 인간적 한계를 아시고, 그 한계 내에서의 사랑의 책임을 촉구한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이 한때는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한다고 자부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전부 주님을 버리는 날이 와도 자신만큼은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만 무려 세번씩이나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세번에 걸친 ‘사랑고백’의  강요는 그토록 모질고 무지하였던 베드로 자신의 말로 인한 실수와 그것이 초래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한 것입니다.

두번의 신적인 사랑과 한번의 인간적인 사랑의 의지와 책임에 대해 물으면서 다시는 사람들 앞에서의 실수와 무책임위 죄를 범하지 말것을 일깨운 것입니다. 말을 포함하여 우리들 자신의 온갖 인간적 실수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여전히 주님 자신의 생명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기대감을 갖고서 그의 부르심에 대해 최선을 다하여 응답하는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한,두번의 실수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혀 다른 또 한번의 성공의 기회를 포기하는 것은 다만 어리석은 자의 행동에 불과합니다.

자신에 대한 진실한 사랑의 확인의 차원에서 물으시는 세번에 걸친 주님의 똑같은 질문에 대해 일일이 응답하면서 베드로는 마침내 주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이 세번이나 실수하고 넘어졌지만, 주님은 여전히 그가 그 모든 잘못을 벗어나 새로운 사람, 즉 참 제자의 반열에 서게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베드로는 정말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의 죽음을 감당하기까지 주의 뒤를 따른 ‘제자 중 제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처럼 때로는 부끄러움을 무릅쓰면서라도 끝까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십시오. 실제로는 그러지 못한 우리들 자신의 속 사정은 아랑곳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번의 고백 후 그 말을 지키지 못하면 어쩌나에 대한 염려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매순간 최선을 다하여 그의 부르심에 예라고 대답하는 것만이 혹 있을지도 모를 우리들 자신의 연약함을 이길 수 있는 비결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불의하고 거짓된 말보다 주님의 말씀의 진실함과 온전케 함을 믿는 것이 바로 참 생명얻는 삶의 조건입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의 말씀으로 자신의 불의하고 부족한 말과 생각의 한계를 극복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우리 마음 속의 진실한 생각들, 즉 그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처지를 누구보다 주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베드로처럼, 혹 실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말로 영생을 경험하는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언제든지 ‘나의 말’보다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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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4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 17:1)

광’ 혹은 ‘영화’라는 말의 의미가 소극적으로는 겉으로 드러난 찬란한 모양이나 형태를 거리키지만, 보다 적극적으로는 원래의 값이나 가치를 정한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를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매사에 하나님의 가치와 존엄성을 원래 그대로 최고조로 높여서 정하며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편의 원래의 가치란 두 말할 나위없이 그의 창조주로서 성품과 존재의 방식을 가리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하고 거기에 맞는 적절한 예우와 존경의 표시로 그를 예배하고 그의 뜻을 따라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창조주를 높이고 그의 존귀함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정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문제는 그 때와 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데 있습니다. 꽃의 영화로움을 예로 들자면, 새 봄에 온 산과 들에 활짝 핀 꽃송이는 그 아름다운 자태로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런가하면 늦가을 들녘의 시든 꽃망울이나 낙엽이 되어 져버린 잎사귀들은 겉으로는 처연하지만, 이듬 해 봄에 다시금 화려한 모습으로 피어날 것을 알기에 그 또한 창조주의 성실함을 드러내는 영광의 도구입니다.

계절의 변화를 온 몸으로 겪으면서도 창조주의 섭리를 따라 살아가는 피조물이기에 꽃은 화려하게 피는 계절에만 아니라, 땅에 떨어져 낙엽이 되는 순간에도 역시 대자연의 일부분으로서 가치와 영광을 간직하는 법입니다. 결국 피조물로서 꽃의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움은 화려하게 피는 순간만 아니라, 창조주의 섭리에 따라 시들어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때에도 여전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생명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제 스스로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의 간섭과 돌보심을 받아들이는 지의 여부가 문제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영화롭게 되고, 또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가 이르렀다고 말씀하는데, 그 ‘때’가 바로 주님 자신이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을 담당하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지닌 최고의 영광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친히 죽기까지 복종한 믿음과 순종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자녀된 우리들 각자의 삶의 영광의 순간과 때를 정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의 뜻 안에서 살아가기만 하면, 우리의 삶의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사실은 인생 최고의 영광의 시간들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주님의 시간표 안에서 사십시오. 살고죽는 이치를 초월하여 다만 그를 향한 참된 바램과 순종의 의지로 살아가다 보면 삶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영광의 때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정말로 영화롭게 하는 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사람들에게서 비롯되는 영광이란 결코 영원히 신뢰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과 그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의지 가운데 삶을 대하는 모습 자체가 영광스러워야 합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으로 언제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영광스러운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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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6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반적으로 평화 혹은 평안은 삶의 외부적 요건이 충족될 때 얻는 결과물과 같습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삶의 필연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가르치는 평화 혹은 평안의 의미는 그와 다릅니다. 삶 자체가 창조주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삶의 충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평화와 평안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의 개입에 의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창조와 구원, 심판과 회복에 이르는 인류 역사의 전 과정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의 실현 과정일 뿐이라고 믿는 성경적 역사관을 토대로 할 때, 성도가 평안의 능력을 경험하는 방법 역시 하나님의 뜻과 계획,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가는 하나님 자신의 성실함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삼 년 간의 공생애 기간 동안 늘 먹고 마시는 일을 함께 하며 지내온 제자들 곁을 떠나면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일러준 약속이 바로 주님 자신의 평안을 그들에게 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질적인 선물이나 보상을 주고자 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주님 자신이 평생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담당하기까지 신뢰하고 복종한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마음의 평화, 그 편안함을 그들에게 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가 친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극히 거룩한 ‘죽음’의 본을 보이시면서 가르치고 전해준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평안의 약속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상의 평안이라는 말 자체가 믿음의 대상으로부터의 선물, 즉 신적인 은혜가 사람의 내면에 부어짐으로서 누리게 되는 평안을 뜻합니다. 평화와 평안의 ‘선물’을 받아야 합니다.

성도로서 우리 각자의 내면에 정말로 주님으로 말미암은 평화의 씨앗이 심겨져야 합니다. 주님 자신이 늘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 받은 자로서 삶을 살아오셨기 때문에 그가 제자들에게 평안을 끼치는 방식에 대해서까지 평안을 ‘내보낸다’ (release, send away)는 식의 표현을 씁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가 베푸시고 허락한 이상 이 세상 그 누구도 성도의 평안을 가로챌 수 없다는 뜻입니다. 평화를 구걸하듯 찾는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평화를 ‘누리는’ 사람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라고 믿는 성도의 삶의 평안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까지도 부활의 영광과 재림의 약속으로 성취한 주님의 마음 속에 있었던 바로 그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평안’을 누리십시오. 그를 믿는 것이 바로 그가 누리셨던 ‘하나님의 아들’로서 평안을 누리는 길입니다. 일찍이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주님 자신의 별명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의 왕’처럼 사십시오. 믿는 우리에게 그 평안을 주시고자 친히 십자가에 달린 그분께서는 우리 모두가 ‘평화의 왕’이되는 모습을 보고자 하십니다. 참 믿음으로 평안을 일구어내는 삶의 주인공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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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9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요 12:43)

수님 당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세상의 구원자로서 행한 많은 기사와 이적에도 불구하고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 대부분의 문제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세상 사람들의 영광에 더 치중하였기 때문입니다.

영광이란 하나님의 존재의 방식을 나타내는 표현으로서, 하나님 편의 존재의 ‘무거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인 성전을 봉헌하던 날 구름이 그곳에 가득하였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구름 자체의 무게와는 별도로 그처럼 가득하고 충만한 하나님의 존재의 방식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믿는 자의 삶 속에서 매사에 어느 편이 더 무거운 쪽에 속하는가의 여부에 대해 항상 조심하고 유의해야 합니다.

성도가 믿음 안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나 생각에 반드시 하나님 편의 가치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따라 정해놓은 삶의 질서와 ‘무게’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울에 달때 추의 중심이 항상 진리의 말씀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과 계획 쪽으로 기울어야 합니다. 율법의 심판자 노릇을 하면서 구세주의 긍휼과 자비에 찬 행위를 죄된 것으로 평가절하한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또한 그들의 판단이 두려워서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신성모독 행위로 매도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의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행위가 어느것 하나 잘못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편의 가치보다 당장에 사람들끼리 통용하는 가치에 치중한 결과 하나님의 뜻을 그만 인간의 고집과 불의로 뭉개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지금도 우리 개개인의 삶에 매일 반복되고 있습니다. 참된 성도라면 항상 하나님의 영광, 즉 주님 편의 존재의 ‘무거움’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의 견해를 포함하여 세상 사람들 대부분의 생각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준 삶의 질서와 가치를 끝까지 유지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나 생각이건 간에 결국 그 무게를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의 추에 달았을때 기꺼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향하는 쪽으로 기우는 방식을 선택해야 합니다.

요 12:47의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는 예수님의 자기 주장이 바로 그렇습니다. 주님 자신의 삶의 목적에 관한한 다른 어느 누구의 판단보다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 편의 심판의 필연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의 구원하심이 하나님 편의 최종 가치 임을 믿고, 그리스도 자신의 삶과 죽음의 목적까지도 그렇게 정한 것입니다. 그의 그러한 일관된 가치판단이 과연 주님 자신을 영광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들 역시 심히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자들로 지음받고 또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말과 행동, 생각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정해주신 그의 자녀들로서 영광스러움을 잃지않는 삶을 살아야 할것입니다. 매일매일 그리스도인으로서 영광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삶을 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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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2일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 11:4)

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참 생명, 즉 영원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모진 육체의 질병까지도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일 수 있습니다. 질병이 강요하는 삶의 한계상황을 벗어나 단지 육체적 생명을 지속하는 방식으로만 아니라 영적 생명, 즉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을 갖는 식으로 또 다른 삶의 의지를 꽃피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병이나 재난이 초래하는 인간의 마음 속의 절망과 두려움은 항상 육체적 생명의 한계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경험하는 삶 외의 것들에 대한 소망을 갖지못한 상태에서 육체의 생명이 다 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고 말것이라는 한계상황 자체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을 병에 걸린 나사로의 처지를 가리켜 이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한 이유는 어떤 의미에서 주님이 직접 나사로 자신의 믿음을 대변해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평소에 늘 사랑하고 가까이 지내던 그였기에, 당장은 죽을 병에 걸려있지만 그가 예수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오히려 육체적 한계를 너머 영생을 바라고 확신하는 삶을 살고 있을 것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경험하는 것만이 결코 다가 아닙니다. 몸은 편해도 마음이 불편한 경우가 있고, 마음이 자유롭고 강건하면 몸을 괴롭게 하는 현실상황들이 오히려 마음을 더 맑고 거룩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의 삶은 영원한 삶,  또는 영적으로 자유한 참 생명의 삶입니다. 성도가 그러한 삶을 희망하면서 살면 그의 삶 자체가 거룩해 보이기 마련입니다. 더욱이 모진 질병의 와중에서 그러한 소망을 갖는다면 그 병이 낫고 안낫고의 여부를 떠나 그는 이미 참 생명의 능력과 영광을 경험한 것입니다.

삶을 결코 육체적인 것으로만 제한하지 마십시오. 건강하고 희망에 찬 마음가짐, 즉 영원한 삶을 위한 소망으로 거듭나고 충만한 마음가짐으로 경험하는 삶에 죽음의 한계와 같은 것은 없습니다. 가을 낙엽이 이듬 해 봄의 새싹을 피우는 거름이 되듯이, 더욱 알차고 풍성한  삶으로 거듭나는 도구일 뿐입니다. 늘 그 마음으로 사는 것이 삶을 바르게 사는 길이며, 혹 죽음 앞에서도 그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영원한 삶을 사는 방법입니다. 비록 우리의 몸이 때때로 고통스러운 병으로 인하여 괴로울지라도, 마음만큼은 항상 참 생명, 즉 영원한 삶의 토대 위에서 지극히 편안한 삶을 누리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육신을 갖고 살면서도 마음으로 항상 영원한 삶을 이어갈 수 있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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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5일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 9:7)

주님께서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고쳐주신 사건에 관한 요한복음의 기록의 강조점은 그가 주님의 명령대로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고 온 행위의 중요성에 있습니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신 행동이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예수님 자신의 신적 능력을 표현하는데 비해, 그 맹인이 주님의 말씀에 따라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고 온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 편의 최소한의 순종의 도리를 일깨워 줍니다.

그 맹인의 불행이 필경 그 자신이나 그의 부모의 죄때문일것이라고 생각한 예수님의 제자들의 견해와 같이, 인생은 불행한 현실 앞에서 의례히 자기 자신과 타인을 탓하고 원망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포함하여 모든 면의 한계를 지닌 존재로서 필연적 선택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맹인의 눈을 뜨여주면서 침으로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른 것은 주님 자신의 창조주로서 능력의 손길을 직접 경험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를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을 지닌 실로암 못으로 보내 친히 그 눈을 씻도록 한 것은 주님을 만나고 그의 능력을 경험한 자로서 자신의 삶의 새로운 방향을 직접 정하도록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신적 능력과 깨달음을 받아도 삶의 의지적 선택이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며 현실위주적이어서는 진정한 삶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매사에 주님의 부르심의 감동과 교훈을 좇아 살며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르심에 대한 온전한 순종 이후의 우리의 삶의 진로는 순전히 주님 자신의 몫입니다. 주님께서 보이신 참 생명과 빛의 원리를 따라 행하는 것만이 우리의 몫입니다. 평생을 맹인으로 살았지만 그 사람은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순종한 시점을 시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오신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그리스도를 거절한 유대인들은 평생을 정상인으로 살았으면서도 결국 메시아를 죽게하는 일에 앞장서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진로를 바꾸는 것이 바로 주님의 부르심으로서 그의 말씀에 대한 우리들 각자의 순종입니다. 그래서 순종이 정말로 제사보다 낫습니다. 순간순간마다 거룩하고 참된 부르심으로서 그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으로 인생의 방향이 바꾸어지는 ‘실로암’의 은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샬롬!

1월 29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요 7:28, 29)

수님 당시의 사람들의 경우 예수님의 신적인 기원, 즉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인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가 다름아닌 그의 출신지가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지리적으로 이스라엘 나라의 북부 접경 지대인 갈릴리 지방은 옛날부터 이방 나라들의 문화와 습관들이 유행하던 곳이었습니다. 접경 지역인만큼 로마의 군인들이 북쪽 여러 나라들에 대한 침략 전쟁의 주요 요충지로 활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곳에 주둔하는 로마 군인들이 활개치던 곳이어서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해방을 꿈꾸던 유대의 열혈 청년들의 무력 시위에 대하 잔혹한 진압이 행해지기도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로마의 군인들에 의한 온갖 폭력적인 행위가 자행되었으며, 로마인들 역시 반역과 저항의 도시처럼 여기던 지역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를 처음 본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에게 그를 소개하자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다나엘 이르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 1:46)라고 반문할 정도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온갖 오해와 억측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여전히 메시아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던 유일한 비결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소위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의 신적인 기원 또는 영적 소속감과 정체성이 분명한 탓이었습니다. 매사에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을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근원적인 것에 대한 확신과 확인에 있는 것처럼, 믿는 자의 삶에 수반하는 온갖 갈등과 혼돈을 벗어나는 길 역시 삶 자체의 신적인 기원을 확신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근원이 하늘로부터인것처럼 우리들 각자의 삶의 근원 역시 하나님께 있습니다. 생명 자체가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것처럼, 삶에 수반하는 온갖 문제점과 괴로운 여지들도 그 근본 이유와 목적은 모두 하나님께 있기 마련입니다.

기쁘고 감사한 삶의 조건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때문이라고 믿는다면, 당연히 슬프고 괴로운 삶의 이유 역시 하나님의 배려와 간섭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 스스로 자초한 것만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까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자초한 불행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믿음으로 승화되기만 하면 얼마든 은혜의 이유와 조건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세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자신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룩할 목적으로 보내심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사십시오.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길입니다.

하찮은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이 단지 자기 자신의 선택과 유익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책임을 맡기신 전능자의 의도와 계획 때문이라고 믿을 때 전혀 다른 차원의 보람과 가치를 누릴 수 있습니다. 높으신 하나님에 의해 맡겨진 일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면, 그 일을 이룩하는 내내 필요한 모든 능력의 원천 역시 그분으로부터 공급받기 마련입니다. 주님처럼 오늘 하루 종일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 받은자답게 살아 가십시오. 환경과 사람들의 반응을 초월하는 감사와 보람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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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2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 6:29)

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믿는다는 것은 그가 바로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향한 간구와 염원을 채워줄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때때로 세상살이에 수반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 눈 앞에 펼쳐질 때, 정말로 보이는 세상과 그 속에서의 삶만이 전부라면, 그로 인한 마음의 허전함과 무의미함을 해소할 방법이 없습니다. 순전히 창조주 하나님 편의 일방적인 사랑과 긍휼에 의해 온갖 인생의 한계와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이유와 목적이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믿음 안에서 주어졌음을 알고 믿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 보내 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인정하는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며 끝입니다. 성도가 삶을 위한 온갖  수고로운 일들을 일일이 감당하면서도 그것이 결코 수고롭지만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이룩할 수 없고 이해할 수조차도 없는 모든 일들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찾을 수 있도록 그를 세상 가운데 보내어 주셨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인류의 참 구세주임을 믿는 성도의 삶에는 괴로운 현실을 잊기위해 더욱 힘들여 일하고, 그로인해 또 힘들어 하는 식의 노고와 수고의 악순환이 없습니다.

인생이 정말로 힘들다고 여겨질 때, 그것까지도 우리로 하여금 참된 삶의 위로와 해결책을 찾기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를 의지하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비단 영생과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만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일들에 있어서도 매사에 믿는 마음이 우선입니다. 누군가가 믿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믿음의 가치를 인정하고 안심하는 마음자세가 삶을 대하는 방식 자체를 달리해주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구원자이며 우리들 각자의 개인적 구주가 되심을 믿고 받아들이는 마음자세가 중요합니다. 진정한 성공은 언제든지 성공심리에서 기인하는 법입니다.

아주 작은 것의 가치와 가능성을 충분히 예견하면서 온갖 큰 일에 도전하는 사람과 무조건 큰 일을 맡고자 하는 사람의 차이와도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의 삶의 시작이며 끝입니다. 그를 이 땅 위에 보내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모든 것 위에 모든 것을 더해주시고자 하는 마음으로 친히 그의 품 안에 계신 독생자를 우리 모두의 구원자와 인도자가 되도록 보내주신 것입니다. 온갖 해야할 일이 많아 지치고 힘겨울수록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마음가짐을 새로이 하십시오. 믿음으로 행하고 시작하는 일이라야만 온갖 변형된 진행과정을 거치면서도 나름의 가치와 보람을 끝까지 누릴 수 있습니다.

조건적 만족이나 성취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허락하시는 삶의 만족, 즉 영생의 기쁨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믿고 또 믿는 일, 즉 마음가짐을 믿음으로 무장하는 일을 가장 먼저, 그리고 항상 하십시오. 그것만 있으면 다른 일들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 마음이 없으면, 다른 모든 일이 허사이며 허무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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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5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6)

삼십팔년 된 병자의 병을 고쳐주면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은 질문, 즉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말씀은 그 병자 자신의 구원의 의지와 대상이 무엇인지에 관한 확실한 이해를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삼십팔년이라는 긴 세월동안을 실패와 좌절 속에 살았다 할지라도, 그를 향한 구원자 하나님의 뜻은 여전히 그가 온전히 회복되어 건강하고 복된 삶을 살게되는 데에 있었습니다.

사람의 실패가 결코 하나님의 실패를 강요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 병자가 삼십팔년 간이나 믿고 살아온 베데스다 연못의 전설, 즉 천사가 내려와서 연못의 물을 동하게 한 다음 맨 처음 그 물에 들어가는 자는 무슨 병이든 간에 낫게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전설과 미신에 불과하였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 병자의 처지에서는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미신인줄 알면서도 천사의 출현을 고대하며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 서있는 분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세상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과연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지의 여부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병자 자신의 처지처럼 온갖 절망스러운 일로 가득한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은 이 세상을 향한 구원의 계획을 갖고 계시며, 그 거룩하고 복된 뜻의 완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믿는지의 여부가 또한 문제였습니다. 진실한 믿음의 가치와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는 결정적 요인이 대부분 우리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안일하고 부정적인 우리들 자신의 편견이나 경험이 순수한 믿음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사에 믿음의 의지와 대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에 대해 기대감을 갖는 것은 좋지만, 절망의 이유를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구원의 새로움과 회복은 다만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사랑과 은혜의 결심에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지는 변하지만 하나님의 의지와 결심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변화무쌍한 삶을 살면서도 항상 변함없는 하나님 편의 구원과 회복의 의지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서른 여덟 번의 실패와 좌절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인 하나님의 의지와 결심을 붙잡은 그 병자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아가라”는 주님의 말씀 한 마디로 삼십팔년 간의 병상에서 벗어나는 은혜를 얻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를 온전히 신뢰하는 자들의 운명을 단 한 절의 말씀으로 능히 변화시킬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의 영원불변한 구원의 의지를 발견하고 자신의 것으로 삼는 삶을 사십시오. 그분의 말씀이 곧 구원이고 생명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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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8일 / 2020년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기독교는 거듭남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데, 거듭남이란 두번째의 출생, 혹은 원래의 상태로의 회복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인간의 원 상태는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어진 존재입니다. 그러한 인간 본연의 모습이 그만 타락으로 인하여 죄성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 놓이게 되고 말았습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성경말씀 그대로, 온갖 부패한 생각과 판단의 미혹을 받는 처지에 들고 만 것입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하나님 나라의 신비에 관하여 물음을 제기하는 예수님 당시 유대 백성의 종교 지도자 바리새인 니고데모의 처지와도 같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종교적 훈련과 가르침에 익숙할지라도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지어진 바대로 원래의 마음상태의 회복이 없이는 항상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지식의 부족함이 초래하는 삶 자체의 목마름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향하여 하신 말씀, 즉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씀은 다분히 주님 자신이 인간 본연의 상태를 회복시킬 수 있는 구세주임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친히 대속의 제물이 되기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부르심을 따라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세주로 영접하는 믿음을 통하여 사람은 누구나 그 본래의 모습, 즉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지위와 특권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을 통한 죄사함의 약속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주권적 통치를 받아들이게 되며, 그로 인하여 순전히 하나님의 의와 평강의 약속의 지배를 받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유형의 종교적 신념은 이 세상 마지막 날, 즉 하나님께서 의인과 불의한 자를 심판함으로서 모든 인간의 최종적 운명이 결정되는 날에 이루어질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최종적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우리의 삶 속에 펼쳐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종말의 날에 행해지는 것과 같은 전 우주적 차원의 심판과 보응의 형벌을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들의 삶 속에서 지금 당장 능히 벗어버릴 수 있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 같은 인생의 온갖 두려움을 경험하면서도 그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오히려 종말론적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류의 종말이 어떤 식으로 펼쳐진다 할지라도, 지금 당장 그를 진실하게 믿는 믿음의 토대 위에서 살아가는 삶 그대로가 우리들 각자의 영원한 운명이 될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세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창조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자로서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십시오. 아무리 부족하고 모자라 보여도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본성상 하나님을 닮은 자들이며, 그의 권세와 능력을 내 것처럼 누리도록 허락된 사람들입니다. 한두번으로 족할 것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거듭남, 즉 하나님 편의 새로운 탄생을 경험하는 삶을 사십시오. 구원의 약속과 증거로서 거듭남의 체험은 한두번으로 족하지만, 삶의 목적과 가치, 그리고 의미에 있어서의 회복은 매순간마다 새롭게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 마음의 생각도, 삶의 습성도, 말이나 행동까지도 늘 거듭나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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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칸사의 Little Rock이라는 도시가 주의 수도이긴 해도 그곳 출신인 클린턴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까지는 미국인들에게 별로 알려진 바가 없는 시골 도시였습니다. 지금은 그곳에 세워진 대통령 박물관 때문에 관광 명소가 되어 도시가 화려하게 변신하였습니다. 누구의 명성과 이름으로 불리느냐에 따라 한 도시의 형편이 변하는 경우가 지금도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 베들레헴은 그야말로 아주 작은 곳이었지만, 그곳이 일찌기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예언의 말씀의 성취를 가져온 곳이 된 나머지 인류 역사 전체에 걸쳐 영원히 기억되는 고을이 되었습니다.

누구의 이름을 의지하고 자랑하는지, 혹은 누구의 지배를 받고자 하는 지의 여부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베들레헴을 메시아의 탄생지로 정한 것은 물론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지만, 그러한 신적인 계획을 따르고 협력하고자 하는 마음의 결단은 하나님의 성품과 계획을 신뢰하는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겉보기에 보잘것 없어도, 하나님의 구원계획 안에만 있으면 얼마든 위대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를 위해 친히 자신의 목숨이라도 내어주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랑이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가 작고 적다고 여겨질수록 더욱 더 크신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의지하시고, 그의 이름으로 불려질 정도로 그에게 속한 삶을 사십시오. 내게 자랑할 것이라곤 그분 밖에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열심에 취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작고 가진 것이 적어도 믿음이 진실하고 믿는 대상이 크면 반드시 그의 삶이 위대해지기 마련입니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위대한’ 사람으로의 탄생을 경험하는 성탄절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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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8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엡 4:4)

신앙인의 삶의 근본 특성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구원의 도리와 방법에 있어서 그 우선순위가 항상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르심에 있음을 알때 우리들 각자의 여러가지 한계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삶의 판단이나 가치의 기준에 스스로 얽매이는 일없이 순전히 믿음에 의한 초월로서 소망의 능력을 이룩하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한없는 인내와 관용의 삶을 강요받는 경우조차 억지가 아닌 또 다른 삶의 가치 창조를 위한 ‘이유있는’ 수고로 여기며 능히 대처할 수 있습니다. 삶 자체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 것이라는 말에는 이중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그만큼 인생 자체가 하나님과의 친근한 교제의 산물이라는 뜻이며, 그러면서도 그러한 부르심의 구체적인 열매와 성취는 여전히 우리들 각자의 몫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친근함을 내세워 우리들 각자의 독특하고 개별적인 삶의 특성을 무시하거나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많은 모순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묵묵히 지켜보면서 우리를 통한 하나님 자신의 온전한 구원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게끔 하십니다. 그만한 의지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의 창조적 능력과도 같은 소망의 위력을 일깨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도의 참된 능력의 원천이 되는 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다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매사를 바라고 또 바라는 근거와 이유로 여기는 사람들을 세상은 결코 감당하지 못합니다. 소망의 능력을 신뢰하고 누리는 삶을 사십시오. 순전히 믿음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매사를 복되고 온전케 할 것임을 믿는 사람들의 위력은 정말로 아무도 대항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 이전부터 우리를 택하시기로 결정하고, 우리를 부르사 당신의 자녀가 되도록 하셨다는 믿음 위에 서서 삶 자체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여기며 사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꿈이 곧 하나님 자신의  꿈이 되어서, 마침내 그가 그 꿈을 이룩하는 삶의 결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샬롬!


12월 11일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엡 3:1)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허락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의 정체는 성도를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으로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도가 하늘나라에 속한 자로서 이 땅 위의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세상을 등지거나 초월해서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살이의 근본이 되는 것을 좇아 행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것을 가리켜 신령한 것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이 단지 물질적인 것의 반대 개념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것의 근본이 되는 원리와 가치를 뜻합니다. 우리의 몸만 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도움이 더욱 절실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시적인 형체를 띤 우리 몸의 동작과 기능을 가능케 하는 것들이 사실은 전부 보이지 않는 영역에 속한 것들입니다. 숨을 쉬는 데에 필요한 공기는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단 1 분만 공급이 끊어져도 우리 몸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마음의 평화와 인간의 내면, 혹은 정신세계의 질서와 같은 것도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잠간이라도 정상궤도를 벗어나게 되면 저마다 삶 자체의 혼돈과 무질서를 다스릴 수 없게 되고 맙니다.

보이지 않는 영역의 인간의 삶의 요구 조건들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한 결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온통 혼돈과 파괴의 도가니가 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믿음의 특권을 간직한 성도들은 이 땅 위에 살면서도 그 삶의 원리를 이 세상의 가치 기준에 두지않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인간이 추구하는 온갖 ‘진선미’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한 완전한 다스림을 받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일진대, 세상살이를 하늘나라의 가치 기준을 따라 사는 자가 매사에 우월하고 더욱 온전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성도가 믿음 안에서 구해야 할 복의 원리와 기준을 절대 물질적인 것에 국한하지 마십시오. 돈, 명예, 자존심, 인기, 또는 세상적인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인간의 삶 자체의 하늘에 속한 기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로서 거룩한 내면의 확신과 증거입니다. 코에 숨이 끊어지는 순간, 육체적 생명의 종식과 함께 삶의 의미가 영원히 없어지고 마는 육체 뿐인 인간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기대와 확신 속에서 장차 하늘나라에 속하여 살아갈 자로서 생명 자체의 영원성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십시오.

나라는 존재의 의미와 그 가능성이 단지 이 세상에서의 순간적인 용도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여 영원한 가치와 가능성을 부여받은 자로서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그저 ‘내 눈 감으면 그만’이라는 식의 생각을 가졌다면 십자가의 구원의 약속은 영영히 없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가 영원성의 가치를 믿고 살았고 그 믿음 안에서 죽을 수 있었기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삶에 대한 희망과 확신이 주어진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이 마땅히 하늘에 속한 자답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진정한 복으로 주셨습니다. 그 복이 가장 위대하고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그것만 있으면 현실의 삶의 저주도 능히 또 다른 유형의 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 복이 없으면 다른 어떤 물질적인 복도 결국에 가서 저주스런 결말을 빚게되고 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구하시고, 그 토대 위에서 세상살이에 필요한 모든 복을 구현하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능히 나누어 갖는 풍성한 축복의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참되고 진실한 축복의 사람, 즉 신령한 복의 주인공들로 부르셨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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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4일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계 19:11)

사도 요한이 본 새 하늘의 이미지를 가리켜 열린 하늘이라고 말하는 것은 믿는 자의 삶 속에서 그 어떤 것도 영원한 한계와 제약을 강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믿음의 은사와 능력에 따른 거룩하고 참된 용기와 희망의 능력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이 순전히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어졌다고 믿는 성경적 세계관은 만물의 존재의 의미 자체를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참된 성품의 반영이라고 믿습니다. 믿음의 토대 위에서 만물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면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여겨져서 스스로 빈곤감이나 상실감의 유혹을 받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매사에 믿는 마음이 없어지면 풍족함 중에서도 허무함과 무의미함이 초래하는 박탈감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백마를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이 충신과 진실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없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성도의 삶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하나님의 존재를 기반으로 하는 것입니다. 충신과 진실이란 다만 한 가지,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실함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믿음의 도리이며 대상인 그리스도는 누구보다도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의 진정성을 추구하였으며, 진리 자체에 대한 성실한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충실함으로써 그가 전파하고 가르친 하나님 나라에 관한 모든 진리가 참되다는 사실을 증거하였습니다. 또한 친히 죽으시고 또한 죽음에서 살아남으로써 그가 믿은 믿음의 내용이 참되고 온전한 것임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로마의 군대문화와 황제숭배의 강요 속에 억압받고 신음하면서 살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한이 전하는 열린 하늘과 백마 탄 전쟁의 용사인 그리스도의 이름, ‘충신과 진실’은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한 충성과 진실을 다 하는 성도들에게 하늘이 항상 열려져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로부터 항상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희망이 도래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부터 올 것이라는 시편의 찬송의 의미와도 같습니다. 사도 요한처럼, 땅의 사방이 캄캄하고 닫혀져 있는 것만 같을 때 하늘을 쳐다보면서 그리로부터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바랍니다. 말씀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하늘은 항상 열려져 있습니다. 하늘 자체가 창조주의 피조물인 까닭에 그의 뜻대로 언제나 열어젖힐 수 있습니다. 성도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열린 하늘의 주인공은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위해 친히 피흘리기까지 싸워 모든 원수를 제압하고 승리의 상징인 백마를 타고 천하를 호령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를 개인적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 또한 그와 함께 승리의 자리에 들게 될 것입니다. 매일매일 열린 하늘 너머로 인생의 참된 승리를 가져다 주실 분을 기리며 축하하고 모셔들이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누구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저마다 인생의 참된 승리자의 후예입니다. 결코 두려움에 메일 자가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매일 열린 하늘의 유익과 능력을 경험하는 삶을 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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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7일

“또그 보좌로부터 주어진 명령을 받드는 일곱 천사들이 성도들을 괴롭게 하던 이 세상의 악의 권세들을 진멸하는 식으로 온 세상을 새롭게 하는 사명을 감당합니다. 따라서 그천사들의 행위의 정당성과 의로움을 인정하는 곳 역시 성전의 제단이라고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그만큼 요한계시록이 묘사하는 이 세상의 종말에 발생할 모든 사건의 중심이 바로 성전이며, 또한 성전의 제단입니다.

일곱 인과 일곱 나팔, 그리고 일곱 대접 등 세 가지의 시리즈로 전개되는 천사들의 심판 중 세번째인 일곱 대접의 재앙 역시 그 대접 자체가 성전의 제단 위의 재를 퍼나르는데 사용하 일곱 천사들의 재앙 자체가 이 땅 위의 교회와 성도들이 피와 눈물로 드린 온갖 정성과 헌신에 대한 하나님 편의 보응과 보상과 같은 것임을 의미합니다. 진실한 성도라면 누구나 할것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으로 행한 모든 노력과 수고에 대한 궁극적인 보상과 보응이 행해지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인 성전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세상 마지막 날에 되어질 심판과 보응의 자리가 하늘의 성전의 제단이라는 사실은 이 땅 위의 성도들로 하여금 공적인 예배의 장소인 교회와 자기 자신을 대하는 마음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교훈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대하는 성도의 마음자세,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친히 내주하는 거룩한 처소인 자기 자신에 대한 바른 이해를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족하고 때로는 불의해 보이기까지 해도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주님의 몸된 전을 사모하고 아끼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그에 해당하는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황제숭배를 강요당하는 로마의 제국주의의 위협 앞에서도 믿음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고 교회의 성스러움과 존귀함에 대한 인식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을 끝까지 거룩한 무리로 인정하여 둘째 사망의 해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는 마음으로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자로서 삶의 원리와 원칙을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매사에 궁극적인 판단의 지혜를 하나님 앞에서 찾아야 할것입니다. 성전의 제단 앞에 엎드러져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는 마음가짐으로 매사에 보다 더 온전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고자 하는 열심을 가져야 할것입니다.

주님을 예배할 때 갖는 생각이 최고로 지혜롭고 용감한 것입니다. 매일매일 자기 삶의 진정한 가치를 하나님 앞에서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오직 그가 인정하고 돌보는 삶의 이치를 따라 살 때라야만 최종적으로 그가 베풀어주실 삶의 보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전의 제단을 항상 자기 자신의 삶의 중심으로 삼으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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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일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계 11:15)

일곱째 나팔소리와 함께 사도 요한이 들은 하늘의 큰 음성은 사도 요한 당시 로마에 의한 기독교 핍박 상황 속에서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 과연 누구인지를 밝히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하늘나라가 이 세상과 다른 초월적 영역에 속한 별도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원론적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아무리 악의 권세가 난무하는 곳일지라도 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 한분  뿐이며, 그의 주권적인 통치방식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고 참된 믿음의 도리를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 성도가 아무리 괴롭고 힘든 일이 있어도 결코 세상을 등지거나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개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와 소유권이 확립됨으로서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또는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그 말은 세상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도 있을 수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자기 자신만큼은 이 세상이 영원히 하나님께 속한 곳이라는 믿음을 토대로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실과 진정으로 행하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이 결국 이 땅 위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되는 법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이미 그 나라가 이루어진 것이고요. 무가치해 보이는 작은 소자에게 베푼 친절과 자비를 주님께서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여길 것이라는 복음서의 가르침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스스로 속임을 당하고 손해를 강요받는 것만 같은 경우에도 매사에 주님의 가르침을 우선시하는 마음가짐으로 행하고 바랄 때 일의 결국이 보람있고 기대 이상의 보상 역시 주어지기 마련입니다.

사도 요한 당시 소아시아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의 처지에서 세상이 온통 사나운 짐승들의 권세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곳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계시록의 사도 요한의 환상 중에 유난히도 짐승의 모양이 많이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좌에 앉으신 주의 나라, 그리고 그의 어린 양 되신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 모든 짐승의 권세들을 물리친 하나님 자신의 완전한 통치에 의해 새로워진 곳, 즉 전에 세상 나라였던 그곳입니다.

그곳을 결코 버리거나 외면치 아니하시고 다시금 세우사 정결케 하고 온전케 해서 그 한 복판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도록 한 것입니다. 죄악된 세상에 살면서도 죄에 물들지 않고,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와 능력에 의지하여 자기 삶 한 복판에서 소금과 빚처럼 살아가는 성도들을 그 날에 그가 보실 때에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세상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데에 끝까지 성실과 책임을 다하십시오.그리스도께서도 친히 그렇게 하였기 때문에 진실한 마음과 삶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사람들을 주님이 가장 좋아하십니다. 그가 포기하지 않은 것이라면, 나 또한 결코 포기할 수 없으리라는 마음가짐을 갖게되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고, 우리가 이미 그의 나라 속에서 살고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도록 하는 일에 앞장 서는 삶을 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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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3일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계 7:3)

요한계시록의 내용 뿐만 아니라 , 성경 전체에 걸쳐서 세상을 향하여 행해지는 모든 유형의 심판과 보응의 주체가 하나님입니다. 진정한 성도라면 자신의 삶에 수반하는 다양한 형태의 시련과 형벌 중 어느것 하나도 그 원인을 하나님 외의 다른 것에서 찾지 않습니다.

은혜와 평안이라고 여겨지는 삶 뿐만 아니라 고통과 괴로움까지도 모두 한분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에 속한 것들입니다. 요행이나 기적과 같은 것을 바라는 대신 그러한 어려움이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은 과연 내게 어떠한 유익을 주고자 하시는 지를 생각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도리입니다. ‘고난의 유익’을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지내다보면, 결국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는 식의 성경말씀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하시는 사랑의 결심과 의지에 따른 마음의 인침을 경험하십시오. 혹 환란과 시련 가운데서도 그 마음의 회복과 온전함을 경험하기 위해 힘쓰십시오. ‘십사만 사천’은 숫자 ‘열둘’을 모든 것으로 삼는 유대식 상상력의 범주에서 고안해 낼 수 있는 최고, 그리고 최다 숫자입니다. 결코 주님이 먼저 누군가를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끝내 거부하거나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의 능력을 믿는 믿음 안에서 마치 누군가의 이마에 인치듯, 마음 한 복판에 구원자이신 예수의 이름이 새겨진 참된 성도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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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6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계 3:4)


한계시록은 사도 요한 당시 소아시아 지역의 일곱 교회들을 향한 주님의 당부와 책망, 그리고 격려의 취지를 내포하는 예언적 서신입니다. 다양한 유형의 묵시와 환상에 대한 기록이지만, 근본적으로 계시록의 모든 말씀은 그 일곱 교회로 대표되는 당시의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주님의 재림 사상에 대한 믿음과 그에 합당한 생활방식을 촉구하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와 어려움은 로마인들의 황제숭배에 대한 강요와 그에 수반하는 다양한 폭력적 문화, 그리고 그로 인한 타락한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젖어드는 현상 때문이었습니다.

신체적 위협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정신에 있어서의 타락과 영적 무감각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 고유의 신앙고백과 그 고백에 합당한 생활방식에 대한 추구를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형식주의 또는 혼합주의가 문제였습니다.  사데 지역의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는 영적 무기력과 무감각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몇 사람만큼은 마음을 더럽히지 않고 마치 깨끗이 빤 흰옷을 입은 것처럼  매사에 주님의 기대와 소원에 부응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지녔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은 속 사정을 아시고, 그들의 처지에 가장 걸맞는 형태의 위로와 상급을 약속합니다. 비유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그들이 거듭난 양심의 옷을 덧입고, 그것이 더렵혀지지 않도록 힘쓴 것처럼, 장차 그들 모두에게 주님 자신의 영광과도 같은 흰 옷을 압고 주님과 함께 다니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온통 불의한 세상에 살면서도 나름대로 의롭고 정결한 믿음의 양심을 따라 살고자 하는 성도 개개인의 중심을 아시고 그것에 맞는 가장 온전한 형태의 상급을 약속하는 분이 바로 주님입니다. 마치 반올림하는 식으로 불의한 사람들의 숫자가 조금이라도 더 많으면 온통 불의한 사람들 투성이라는 식으로 평가절하 하지않고, 의를 행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그리고 끝까지 헤아리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주님 안에 살면 의롭고 선한 일의 가치는 저마다 고유하고 독보적입니다. 그 일의 가치와 보람이 결코 ‘비교적이지’ 않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의인 한 사람의 가치는 결코 무시되거나 무효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숫자놀음에 절대 빠지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다 가지않아도 성도라면 반드시 가야하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며, 주님과 함께 하는 영생과 소망, 그리고 믿음의 길입니다. 믿음 안에 약속된 길이 천국으로 향하는 소망과 구원의 길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길을 간다고 해서 그리고 합류할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땅 위에서 우리의 믿음의 선택이 개인적인 것처럼, 그에 대한 주님 편의 영원한 상급 역시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의와 영광의 새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걷게 될 사람들이 반드시 있을 것인데, 그들의 면모가 바로 이 땅 위에서 오직 주님 편의 기대와 소망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있습니다. 주의 길을 따르는 자가 나 한 사람  뿐일지라도, 내가 담대히 주를 따라 길을 나설 것이라는 각오와 믿음을 갖고 늘 사십시오. 주님께서 그런 사람을 가리켜 “합당한 자”라고 말하는데, 합당하다는 것은 무게와 용량을 저울에 달았을 때 꼭 같다는 뜻입니다.

안과 밖이 결코 다르지 않고, 군중으로 있을 때나 혼자 있을 때나 그 바램과 소원이 같아서 사는 방식이 한결같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매사에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서, 그 삶의 열매와 보람 또한 지극히 합당하고 한결같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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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0일

“만일 누구든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레 20:9)


레위기의 중심 주제인 성도의 삶 속의 거룩함의 의무를 실천하는 중심 무대가 전반부에서는 성막 또는 성전인데 비해, 후반부에서는 가정입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와 제물의 거룩성이 온전히 실현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의례히 가정생활에서의 거룩함의 열매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에서 입니다. 혹 눈에 보이는 유형적인 제도나 건물로서 성전의 존재가 결여된다 할지라도 성도 개개인의 가정에서 거룩한 삶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바로 부모 자녀 간의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의 전달자로서 사명과 책임입니다.

부모에 대한 자녀로서 공경의 의무를 다 하고, 또한 자녀에 대한 부모의 하나님의 사랑과 권위를 대리하는 자로서 역할을 강조하는 성경의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이지만 자녀들의 입장에서 결단코 부모를 저주하거나 욕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가정이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따라 살아가는 삶의 비결과 방식을 배우고 익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여기며 부모에 대한 참된 공경심을 근거로 모든 일을 꾸려 나가는 방식으로 일상에서의 거룩함을 도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레위기 20장에 열거된 다양한 성적 요구에 대한 금기 사항에 관한 가르침은 가정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가짐을 갖고서 그외 다른 욕구들을 해소하는 방법을 도모해야 한다는 점을 교훈합니다. 아무리 절박한 욕구나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 할지라도 부모의 기대와 염원을 저버리는 식으로 욕망을 표현하거나 해소하는 방안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무분별한 성적 욕구의 대부분이 대상에 대한 비인격화, 즉 욕구 충족의 수단에 불과한 자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한 자녀’라는 생각을 갖고서는 도저히 탐할 수 없는 욕구라는 점입니다. 인간적 친밀감의 표현인 애정 또는 성적 욕구가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경외심의 전제 위에서 해소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외 인간의 삶에 수반하는 다른 모든 욕구들을 표현하고 충족하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 다름아닌 성도의 가정입니다.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의 의미 그대로, 가정에서의 올바른 배움과 경험이 인간 본연의 다양한 욕구와 욕망을 오히려 참된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는 수단이 되도록 해줍니다. 이를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부모 자녀 간의 공경과 신뢰, 그리고 참된 애정의 의무와 책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형벌을 전제로 하는 하나님의 엄중한 요구가 바로 부모 자녀 간의 거룩한 의무, 즉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사명과 책임을 다 하는 데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부모와 자녀 모두 매사에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공경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온전히 부모 노릇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하나님 두려워 하는 마음없이 부모에게 효도 잘 하는 자식도 없습니다.

부모 자녀 간에 피차 더욱 더 하나님께 대한 공경의 의무를 다 해야 할 노릇입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자녀들의 출현을 위해 먼저 거룩하고 경건한 부모가 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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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3일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레 25:23)


안식년을 일곱번 반복한 후 50년 차에 ‘희년’ (the year of jubilee) 제도를 명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 토지의 소유권을 하나님께 양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서로 생존의 기반인 땅을 영원히 상실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위한 하나님 편의 안전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의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순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그 땅에 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토지의 소유권을 포함한 모든 삶의 방식이 다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 땅을 점령하고 각 지파별로 제비뽑아 얻은 일 자체가 온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들만의 특권처럼 독점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 자격없는 자들에게 은혜로 맡겨주신데 대해 평생 감사 감격하며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혹 그들 가운데 형편이 넉넉치 못하거나 관리할 능력이 없어서 토지의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팔았더라도 희년 제도에 따라 재취득할 수 있는 기회를 얻도록 한 것입니다. 땅을 사고파는 당사자들이 그 소유권에 대한 하나님 편의 이해를 갖지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희년 사상을 다분히 비현실적 이상향, 즉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한 교훈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인생이 정말로 거류민이며 동거하는 자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바르게 이해할 때 희년 제도는 단지 이상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는 교훈입니다. 생전에 아무리 큰 저택이나 토지를 보유하여도 죽은 앞에서 공간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 의해 어디에 묻힐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세상을 떠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처지입니다. 사는 동안 우리들 각자의 소유인것처럼 보이는 넓은 공간이나 시간이 다만 은혜의 선물이며 따라서 성실과 책임감으로 돌보고 서로를 위한 유익을 도모할 기회의 수단우로 여겨야만. 더불어 함께 편안함과 소득의 유익을 얻는 기회로 삼으면서 피차의 번영과 안정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더많은 사람들과의 공존과 공생의 길을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마음이 넓어지면 좁은 집도 작게 여기지 않지만, 마음이 불편하면 저택에서의 잠자리도 불편할 뿐입니다. 항상 ‘희년’의 공간에서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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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6일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레 23:11)


대 이스라엘 백성이 보리 농사를 끝내고 수확하는 계절에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을 통하여 여호와께 요제, 즉 제물을 앞뒤로 흔드는 몸짓과 함께 올려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제물을 흔들어 여호와께 올려드리는 제사의 의미는 그 모든 수확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심으로 순전히 인간적인 마음의 동기에 이끌리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다짐과 헌신에 있습니다.

흔드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곡식에 대한 일체의 인간적 욕심을 ‘배제’하는 마음의 동기를 반영합니다. 감사와 두려움이라는 이중적 심리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풍성한 열매를 얻게하신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그 열매로 인한 지나친 만족감에 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의 다짐입니다. 살다보면 매사에 어렵고 곤란한 시절은 나름대로 잘 견디지만, 뭔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시간이 풍족하다치면 그만 마음의 빗장이 풀리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절제되지 않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생활습관의 타락과 지나친 욕심이 빚어내는 인간성의 타락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삶이 어려울 때보다 뭔가 수월하다고 여기는 때에 보다 더 마음의 경계를 늘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할것없이 한결같이 주님의 도우심을 구함면서 살고자 하는 자족할줄 아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뭔가 삶의 여유가 있을 때에 더욱 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향기로운 제물과 같은 것으로 여길줄 아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제사장의 손에서 자신이 수확한 첫번째 곡식 단이 위로 올려지고 앞뒤로 흔들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 열매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깨닫는 것이 바로 성실한 농부의 마음입니다. 아울러 모든 열매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을 따라 사는 것만이 앞으로도 계속 수확의 기쁨을 얻는 길임을 알기에 당장에 수확물을 얻은 사실로 인한 마음의 동요 또한 없습니다. 얻은 것이 많으면 그만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책임과 사명이 많아지는 법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항상 그 마음이 삶의 참된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한 것이 되어서 수확의 많고적음의 여부를 떠나 믿음 안에서 참된 부요함을 선사받는 삶을 사십시오. 주와 함께라면 가난도 부유함이 되고, 부함은 진정한 마음의 부유함에까지 이르도록 하는 성실한 교훈이 됩니다. 인생을 참으로 무르익게 하는 결실의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항상 삶의 풍성한 의미와 보람을 잃지 말아야 할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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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9일

“만일 누구든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레 20:9)


레위기의 중심 주제인 성도의 삶 속의 거룩함의 의무를 실천하는 중심 무대가 전반부에서는 성막 또는 성전인데 비해, 후반부에서는 가정입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와 제물의 거룩성이 온전히 실현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의례히 가정생활에서의 거룩함의 열매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에서 입니다. 혹 눈에 보이는 유형적인 제도나 건물로서 성전의 존재가 결여된다 할지라도 성도 개개인의 가정에서 거룩한 삶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바로 부모 자녀 간의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의 전달자로서 사명과 책임입니다. 부모에 대한 자녀로서 공경의 의무를 다 하고, 또한 자녀에 대한 부모의 하나님의 사랑과 권위를 대리하는 자로서 역할을 강조하는 성경의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이지만 자녀들의 입장에서 결단코 부모를 저주하거나 욕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가정이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따라 살아가는 삶의 비결과 방식을 배우고 익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여기며 부모에 대한 참된 공경심을 근거로 모든 일을 꾸려 나가는 방식으로 일상에서의 거룩함을 도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레위기 20장에 열거된 다양한 성적 요구에 대한 금기 사항에 관한 가르침은 가정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가짐을 갖고서 그외 다른 욕구들을 해소하는 방법을 도모해야 한다는 점을 교훈합니다.

아무리 절박한 욕구나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 할지라도 부모의 기대와 염원을 저버리는 식으로 욕망을 표현하거나 해소하는 방안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무분별한 성적 욕구의 대부분이 대상에 대한 비인격화, 즉 욕구 충족의 수단에 불과한 자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한 자녀’라는 생각을 갖고서는 도저히 탐할 수 없는 욕구라는 점입니다. 인간적 친밀감의 표현인 애정 또는 성적 욕구가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경외심의 전제 위에서 해소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외 인간의 삶에 수반하는 다른 모든 욕구들을 표현하고 충족하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 다름아닌 성도의 가정입니다.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의 의미 그대로, 가정에서의 올바른 배움과 경험이 인간 본연의 다양한 욕구와 욕망을 오히려 참된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는 수단이 되도록 해줍니다.

이를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부모 자녀 간의 공경과 신뢰, 그리고 참된 애정의 의무와 책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형벌을 전제로 하는 하나님의 엄중한 요구가 바로 부모 자녀 간의 거룩한 의무, 즉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사명과 책임을 다 하는 데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부모와 자녀 모두 매사에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공경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온전히 부모 노릇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하나님 두려워 하는 마음없이 부모에게 효도 잘 하는 자식도 없습니다. 부모 자녀 간에 피차 더욱 더 하나님께 대한 공경의 의무를 다 해야 할 노릇입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자녀들의 출현을 위해 먼저 거룩하고 경건한 부모가 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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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 17:11)

생제물의 피를 매개로 하여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삶은 항상 새로운 시작으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피가 의미하는 원초적인 공포와 두려움은 죽음의 한계상황을 의식하기 때문인데 비해,희생제물의 피를 통한 용서와 회복의 약속 안에서 피는 죽음이 아닌 생명과 희망, 그리고 새로움의 동력이며 증거입니다. 피흘림 자체가 죽음과 절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회복과 희망의 약속을 내재하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을 대하는 근본적인 자세를 달리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제물의 피의 공로를 매개 로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 결합하고 나면 때때로 피를 흘리기까지의 온갖 수고와 노고를 요구하는 인생의 모든 어려움과 한계상황을 대하는 성도의 마음자세가 더 이상 비관적이거나 비판적이지 않습니다. 그것까지도 넘어설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의 능력을 기대하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각종 제사 예식마다 반드시 제물의 피를 재단에 쏟거나 뿌리는 순서가 포함되어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인간이 감당해야 할 몫을 하나님께서 친히 대신해 주셨음을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피를 흘리는 것과 같은 수고와 희생, 때로는 복수심에 대해서까지도 하나님께서 친히 방법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각종 제사의 취지를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들 스스로 피흘리기까지 애쓰고 수고해야만 얻을 수 있는 마음의 평안과 삶의 행복을 그분이 대신해 주신 것입니다.

그가 우리의 피를 대신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행한 일을 믿고 받아들인 우리의 삶에 그로인한 대속의 능력과 유익을 얻도록 한 것입니다. 소위 ‘죽어야만’ 끝이 날것 같은 극단적인 괴로움과 수고를 요구하는 인생 문제들을 포함하여 삶의 모든 궁극적인 해결책을 반드시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안에서 찾아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그가 흘리신 피가 바로 내 삶의 문제점으로부터 나를 자유케하고 온전케 하기위함이라는 생각을 가질 때에 비로소 그가 우리에게 대속의 은혜와 능력을 베푸실 수 있습니다.

그의 피의 공로가 믿어지고 깨달아지는 순간 그로인한 신적 생명이 우리 안에 역사하여 우리의 죽을 몸이 살아나고 영혼이 새롭게 되어서 생각과 감정, 그리고 의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편의 변화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약속 안에서 피는 더 이상 수고와 아픔이 아니라 소망과 기쁨, 새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새로움입니다. 우리 스스로 온갖 피흘리는 수고를 감사와 기쁨,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취지 하에 능히 감당할 수도 있습니다.

매일매일 ‘피 흘리는’ 인생의 수고를 오히려 감사와 믿음으로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 거룩하고 복된 삶을 우리로 하여금 살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주님은 정말로 우리를 위해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가 우리의 희생제물이며 우리의 모든 수고를 값지게 만드셨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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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5일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시 120:2)

120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의 시로서 공동체 내에서 근거없는 상호간의 비방과 원망, 혹은 기만과 불의를 일삼는 언어의 폭력으로 인한 마음의 괴로움을 토로하는 기도문입니다. 그러한 상한 마음까지도 주님께 진실하게 고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간구가 되어 주님과의 소통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교훈해 줍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에 나아가는 이유가 항상 즐겁고 감사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오히려 크나큰 마음의 상처와 아픔 때문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누군가의 거짓된 말과 기만하는 몸짓에서 비롯된 마음의 상처는 얼른 씻을 수 없는 진하고 아픈 흔적들을 남기게 됩니다. 특정인의 명예나 인격을 흠집내기 위한 익명의 비방과 비난이 난무하는 이른바 말의 폭력 시대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피차 가장 아픈 마음을 강요받는 여지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인간의 말이 초래하는 온갖 상한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참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의 말 자체의 시시비비를 가리거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사람의 말 자체의 부당함과 부질없음을 깨닫게 함으로써 오히려 참되고 영원한 진리에 대하여 눈이 띄어지도록 하는 효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말은 오직 하나님의 진리를 반영하고 그것을 묘사하는 식으로만 가치를 지닙니다.

저마다 마음 속의 생각이 겉으로 드러난 말이 되기 마련입니다. 누군가의 생각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성도라 할지라도 그 말의 진정성과 거룩함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사리에 맞는다고 해서  바른 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내포된대로 주님의 생각을 나타내고 간직해야만 서로 말을 바르고 참되게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를 경험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을 간구하며, 그 상한 마음을 안고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고자 하는 시편 기자의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대하고자 하는 마음을 통해서만 비로소 참된 말을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말로 인한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기위해서 항상 자기 나름의 생각보다 앞서 하나님을 대하여 그의 생각과 뜻을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의 말의 진실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하나님 편의 참된 진리의 말씀을 묵상하고 늘 마음에 담아두어야 합니다.

소위 ‘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삶을 사십시오. 그래야만 항상 바른 말을 하고 참된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의 말을 속량하는 은혜를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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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8일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시 119:75)

나님의 본성에 대한 인간의 지식과 이해는 항상 윤리적인 특성을 갖습니다. 그냥 의롭고 선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에게 개인적이며 구체적으로 선하며 의로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이해의 방식과 지식에 따라 살면 반드시 그에 걸맞는 삶의 참된 유익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주의 심판이 의롭다고 말하는 이유는 매사에 그의 말씀을 따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결과 자신의 삶의 결국이 가장 의로운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가장 흔한 명칭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판단’입니다. 매사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판단하고자 하는 마음이 곧 믿음의 본질입니다. 일시적인 감정이나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참된 구원의 도리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바르고 온전한 판단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비결이며 방법입니다.

자신의 삶의 괴로움까지도 다만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을 통한 삶의 유익을 이루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이는 지혜와 결심이 가능해 집니다. 성도의 삶의 윤리와 도덕성의 기초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의 삶이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의 우월성의 가치를 결코 배제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의 삶의 어떠한 면도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과 판단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가리킵니다.

창조의 원리 그대로, 세상의 어떤 것도 그의 말씀과 계획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삶의 고난과 역경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의 유익과 위로를 구하다 보면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매사에 하나님의 성실함 뿐입니다. 고난당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그의 말씀의 진정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감사할 뿐이라는 생각이 가능해 집니다.

언제든 하나님의 말씀의 우월성을 전제로 믿음의 윤리성 혹은 도덕성을 겸비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결코 예외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인의 도덕성의 기초입니다. 천지는 없어져도 진리의 말씀의 다스림의 영역에는 결코 예외가 없다고 믿는 성도라야만 대홍수 중에도 방주를 예비하여 살아남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의 경우처럼 정말로 특별한 방식의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항상 하나님의 ‘특별’ 대우를 받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샬롬!

9월 11일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레 16:22) 죄일의 성전 청결식은 크게 두 가지, 지성소 안의 속죄소 (시은소)를 포함하여 성소의 제단을 정결케 하는 일과 대제사장을 포함하여 모든 백성의 죄를 정결케 하는 일입니다. 지성소 안의 속죄소와 지성소 밖 성소의 제단 곳곳에 속죄 제물의 피를 일곱번씩 뿌려 정결케 하는 일을 마친 후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위해 두 마리의 염소를 속죄 제물로 잡아서 드립니다. 한 마리는 대제사장 자신을 위한 속죄물과 마찬가지로 그 피를 지성소 안 속죄소  위에 뿌려야 했으면, 다른 한 마리는 백성의 죄를 지고 산 체로 광야로 내보내어 졌습니다. 그 이름을 아사셀이라고 부르는데, 아사셀이 염소가 향하는 광야의 지명일 수도 있고 그 광야를 지배하는 어둠의 신의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고대 중근동 지역의 신화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두 마리의 염소가 하나는 죄를 정결케 하는 속죄의 피의 제물로, 다른 하나는 산 체로 죄를 지고 광야로 나가는 아사셀 염소로 희생을 당한 것입니다.

혹 광야를 지배하는 어둠의 신들을 달래기 위한 제물이었을 것이라는 해석은 유일신 신앙의 근거가 없는 이스라엘 주변 이방 나라들의 습관을아사셀 염소의 취지는 속죄 제물의 대속의 죽음만으로도 다 씻을 수 없는 인간의 죄성을 매일매일 덜어주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와 자비의 능력, 그 자원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실 뿐 아니라, 부활하심으로써 영원히 살아계셔서 우리들 각자의 일상 속에서 죄의 멍에를 대신 짊어주시는 은혜를 배푸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랑을 죽음보다 강하고 귀한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미 범한 죄의 잔재들은 물론, 매일 경험하는 인생 자체의 온갖 한계상황과 모순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기위해 주님은 지금도 성령과 말씀 안에서 우리를 위한 아사셀 염소 역할을 담당하고 계십니다. 광야처럼 험하고 힘든 삶의 여정과 인생의 무거운 짐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어도 우리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감당하신 그리스도께서 또한 살아계셔서 그 짐을 대신 져 주실것이라는 믿음을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아사셀이 광야의 특정한 지역을 가리킨다고 한다면, 그 말은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지고 친히 가지못할 곳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죽음으로만 아니라 항상 살아계셔서 인생의 모든 노고를 대심 감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로 나의 구주, 대속의 주님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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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0일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를 속죄제물로 삼고 숫양을 번제물로 삼고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속바지를 몸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그의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레 16:3-4)

제사장 아론은 매년 한 차례씩 성소 안의 지성소에 들어가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이스라엘 온 백성의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속죄일을 지켜야 했습니다.  속죄일 (욤키퍼)은 태양역으로는 10월 초에 해당하며,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12월의 성전 봉헌의 날, 즉 하누카와 함께 일년 중 가장 귀하고 엄숙한 명절입니다.

주변 나라와의 전쟁 중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키고자 하는 절기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한 해동안 성막 또는 성전에서 드린 제사와 예배 중에 혹시라도 부주의함과 잘못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성전을 더럽힌 일이 있다면, 그로인한 죄의 부정함으로부터 자신들을 정결케 할 목적으로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차례씩 지성소 안에 들어가 정한 예법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 지정한 날입니다.

대제사장 자신의 죄를 위한 속죄물과 번제물을 드린 다음 온 백성의 제를 위한 속죄제사와 번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의 대제사장의 복장은 안팎으로 모두 흰 세마포로 된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평소의 대제사장의 겉옷은 금색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 그리고 가는 베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든 에봇입니다.  속죄일만큼은 모든 ‘색깔있는’ 옷 대신에 진실과 겸손, 그리고 청결함의 상징과도 같은 흰 세마포로 온 몸과 허리, 그리고 머리 위 관까지 쓰도록 하였습니다. 부지 중에라도 범한 죄의 사함을 받기위해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인 지성소를 향하여 나아가는 마음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지에 대한 교훈이며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꾸미거나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마포 옷을 입되 온 몸을 씻은 다음 입어야 했습니다. 물에 젖은 몸에 흰 옷을 걸치면 속이 다 들여다보일 수도 있을 것인데, 그만큼이나 투명하고 솔직한 양심의 토대 위에서만 바르게 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의 의복의 투명성과 청결함의 요구가 그러했다면, 일반 백성들에 대한 요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짖없는 양심과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기를 바라는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가짐으로 늘 주님을 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장기없는 맨 얼굴로 자신을 들여다보듯, 오직 주님의 은혜와 사랑의 간섭에 의해서만 참된 자기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의 마음가짐으로 늘 겸손하게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흰색 세마포 옷을 입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의 모습처럼, 오직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과 공로만을 의지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가장 정직하고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늘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 정결케 된 성도의 양심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지상최고의 선물입니다. 주님 안에서 오늘 하루도 정결한 양심의 자유와 특권을 마음껏 누릴 수 있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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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4일

“그 의복에나 가죽에나 그 날에나 씨에나 무릇 가죽으로 만든 것에 병색이 푸르거나 붉으면 이는 문둥병의 색점이라 제사장에게 보일 것이요” (레 13:49)

람의 몸에 생긴 문둥병을 포함하여 옷이나 동물의 가죽에 생긴 문둥병의 ‘색점’까지도 모두 제사장에게 보임으로써 정결함의 여부에 대한 진찰과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한 것은 병이 지닌 심판과 형벌의 의미에 대한 우리들 각자의 섣부른 판단과 상상력의 타락을 경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흔히 문둥병이 천형, 즉 하늘로부터의 저주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그 병의 외형적인 특징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눈으로 보기에 너무도 비참하고 혐오스러운 모습 때문에 뭔가 특별한 형태의 저주의 요인이 작용할 것이라는 인간 본연의 피해망상적인 판단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전염성이 강할 것이라는 이유로 겉모습만 보고 문둥병 환자를 격리시키는 식으로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하였던 이스라엘 공동체 내의 집단 이기주의에 대한 경계입니다. 또한 다수에 의한 폭력성의 행사를 경계하고 함부로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고자 하는 무지와 무분별을 방지하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의 권세를 대변하는 제사장의 판단을 우선적으로 구하도록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문둥병의 ‘색점’ 즉 그 표시만을 보고 쉽게 즉시로 판단하지만, 제사장은 칠일 간의 유예 기간을 두고 그것의 진행과정을 관찰하여 실제 전염성을 띤 질병으로 확장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는 경우를 구별해내야 했습니다.

옷이나 가죽의 경우 유해하고 전염성있는 곰팡이 균이 확실할 경우에는 물론 불에 태워 소각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물로 씻어낸 다음 다시 칠일 간 관찰하여 문둥병의 원인 여부를 재확인하고 일정한 부위를 도려내거나 아니면 한번 더 씻어내는 식으로 원상복구를 도모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이스라엘 백성이 일상의 삶 속에서 거룩함을 매개로 하는 보건위생학적 정결과 건강한 삶, 그리고 공동체적 차원의 윤리적 삶을 유지하도록 하기위한 것입니다.

의복이나 가죽제품에 대한 교훈이긴 하지만 매사에 부정하고 불결한 것에 대한 판단 기준을 ‘색점,’ 즉 겉으로 드러난 표시에 따라서 함부로 섣불리 해서는 안될 것을 교훈합니다. 정말로 옷 전체를 불살라 없애야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반드시 ‘칠일’ 간의 유예와 관찰이 필요하였으며, 다시 또 ‘칠일’을 두고 씻고 살피면서 정한 것으로 간주될 것들을 지켜내야 했던 것입니다. 의복이 되었건, 다른 무엇이 되었건 간에 함부로 겉 모양, 즉 표시만 보면서 전부를 아는 것처럼 말하거나 행동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의 차원에서나 모두 매사에 하나님 편의 판단 기준으로 사물이나 사람의 중심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필수적입니다. 요사이는 한센병으로 불리는 문둥병이 신체적 접촉으로는 전혀 전염되지 않는 비접촉성 전염병으로 불리우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개인이나 집단의 유익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고자 하는 타락한 인간 본성을 구속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누군가의 겉 모습만 보고 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다시금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하는 일과도 같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사람이 겉보기로 판단하기 좋은 일일수록 반드시 제사장에게 나아와 그의 판단을 따르도록 한 성경말씀의 의도를 충분히 헤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들 자신의 허물이나 불의함도 하나님의 긍휼의 판단의 유익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꼭 매사에 하나님 편의 판단을 쫓아 행하는 습관을 키우십시오. 그것만이 나와 우리 모두를 구원하고 온전케 하는 길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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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8일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레 10:3)

룩함이란 하나님 자신의 존재의 특성으로서 피조물과 달리 창조주로서 구별된 속성, 즉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경외와 존경심을 불러 일으키는 절대적 성품입니다. 그러면서도 피조물 가운데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에게 자신의 거룩성을 부여함으로써 그의 성품과 뜻에 따라 사는 법을 배우도록 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자신의 거룩함의 취지에 맞는 일이나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한한 사랑과 자비, 그리고 용서의 성품과 같은 긍정적이며 창조적인 힘의 원천으로 작용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거룩성을 위반할 경우에는 온갖 심판과 보응과 같은 두려운 현상을 유발시키는 파괴성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이 인간의 삶 속에서 긍정적인 형태로도, 부정적인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항상 사랑과 자비, 그리고 무한한 용서의 능력처럼 온갖 창조적인 일들의 힘의 원천처럼 대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온갖 긍정적이며 생산적인 힘의 원천으로 작용하도록 하는 방법은 한가지 뿐입니다.

매사에 그의 말씀의 가르침과 교훈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분향단의 향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불이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사용하다가 그만 죽임을 당한 이유 역시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얼핏 사소한 일인것처럼 여겨지는 일도 성도가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가 명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고려하면서 그의 뜻을 따라 행하고자 할 때  그러한 마음가짐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거룩성을 체험하고 그 능력을 덧입는 삶의 비결이 됩니다.

삶이 도덕적으로 바르고 온전해지 는 방법 역시 하나님의 거룩성을 따라 행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거룩함이라는 의미 자체가 온전함 또는 원래대로의 회복에 있습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맞는 삶을 선택하므로써 자기 자신의 삶 속에서 온전히 거룩성을 구현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좇는 거룩한 삶에 온갖 유익과 축복의 원천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식품으로 치자면 자체의 영양소가 고스란히 내포되어 있는 완전 식품, 즉 건강에 좋은 whole food과 같습니다. 인공 재료가 가미되지 않은 자연식 그대로의 음식을 즐기듯, 매사에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따라 행하고자 하는 동기를 갖고서 온갖 축복의 원형을 구현하는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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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1일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레 7:15)

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를 그 날에 먹고 이튿날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말씀은 공동체적 차원의 줄거움을 누리도록 하기위한 하나님의 배려와 간섭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의 즐거움의 회복을 위한 목적으로 드리는 제사의 제물을 당일에 혹은 그 다음 날까지 모두 먹고, 남는 것을 불살라 없애도록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화목의 목적이 결국 인간관계의 회복과 즐거움을 유지하는 데 있음을 알게 한 것입니다.

제사를 비롯한 모든 종교행위의 본질적 특성은 ‘집단성’의 표현에 있습니다. 종교행위을 통해 얻어지는 초월적 기쁨이라는 것이 결국 인간관계의 화해와 연합, 또는 집단적 기쁨의 나눔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매사에 더불어 함께 하는 즐거움을 배제한 체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만을 위한 전유물과 같은 믿음생활의 의미는 결코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구원 활동을 반대하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율법을 범한 신성모독죄의 장본인으로 간주한 유대 율법주의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한결같이 ‘그들만을’ 위한 특권계층의 전유물과 같은 종교생활의 소지자들이었습니다. 세리와 창기들과 같이 율법의 정죄를 당한 이들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의 범주에 포함하여 하나님 나라의 포괄적 의를 세우고자 하셨던 메시아의 대속적 사랑의 취지와는 정반대의 길을 간 것이지요.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비롯된 온갖 신령한 은혜는 사람이 더불어 함께 나누지 않으면 부정한 것이 되고맙니다. 중근동 사막 지대의 더운 날씨 속에서 생고기를 잡아 제물로 드리는 제사예식의 전 과정을 생각할 때 최대한 빠른 시한 내에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식으로 화목 제사의 음식을 모두 소비하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그 백성의 건강을 위한 위생학적 배려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계명대로 사는 것만이 인생을 복되게 하며 우리 몸의 건강상태를 최대한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그 마음가짐을 저버리고 ‘내 식으로’ 하겠다고 고집하는 순간 화목도, 건강도 모두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화목제물이 이틀을 지나기까지 남아있게 되면 더 이상 제물이 아니라 부정하고 가증한 것이 되서 혹이라도 그것을 취할 경우 그 사람 자신이 불순종의 죄를 범하는 결과를 낳게되고 맙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고 그 토대 위에서 이웃과의 화해를 즐기는 삶을 살기위해서 반드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계명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십시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와 제물의 특성을 결정하는 것이 결국 우리들 자신입니다. 믿음과 순종으로 내면이 거룩해진 사람이 드리는 모든 제사와 제물은 거룩한 반면에, 불신앙과 불순종의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의 제물은 부정하여 죄를 더욱 양산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몸과 마음을 다 하는 순종과 복종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산 제사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가 기뻐 받으실만한 삶을 사는 것이 가장 건강하고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길입니다. 순종으로 믿음도 건강도 모두 챙기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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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4일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의 번제물 위에서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 3:5)

레위기에 언급된 제사의 종류 가운데 화목제사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즐거움을 회복하고 만끽하기 위한 취지의 제사입니다. 속죄제나 속건제와 같이 죄사함을 구하는 의무감이나 책임감 때문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감사와 감격의 다짐 또는 헌신의 동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만큼 제사를 드리는 자 자신의 자발적인 동기와 욕구에 따른 제사의 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목제사에 관한 성경의 규정과 절차에 대한 설명은 의무와 책임감 때문에 드리는 다른 제사의 방식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차라리 더한 감이 없지않습니다.

레위기 7장의 설명대로 화목제사의 제물은 제물을 드리고 난 후 당일에 본인과 제사장들이 나누어 먹도록 되어있습니다. 제사 예식 후 그 제물을 본인 스스로 취할만큼 제사의 동기가 자발적이며 본인 자신의 안녕과 평안을 위한 취지의 제사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목제물의 일부, 즉 제물의 ‘콩팥’이라고 불리는 가장 중요한 부위와 그 주변의 기름을 불에 태워 연기로 하나님께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현대적 관점으로는 동물의 피와 기름, 그리고 콩팥/심장 같은 부위가 전혀 가치가 없어 보이지만, 고대 중근동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짐승의 심장부위가 가장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생명의 진원지이며, 사람으로 치자면 모든 생각과 감정, 또는 의지의 발원지라는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제사의 종류마다 제물과 그것을 바치는 사람 사이의 일체감을 전제할 때 화목제사 제물의 콩팥 부위를 하나님께 화제로 태워서 그 연기를 향기처럼 올려드리도록 한 것은 제사를 드리는 자 자신의 마음가짐, 즉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물의 심장 부위를 드리듯, 성도의 진심어린 감사의 고백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타서 연기로 올라가는 향기의 제사를 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음식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레 3:11,16). 성도의 감사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몫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충분히 감사했으면 실제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그의 몫의 음식과 같이 구체적으로 구별해서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감사의 마음을 반드시 물질로 표현하십시오. 액수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짐승의 심장부와도 같은 성도의 진심어린 감사의 표현이 문제입니다. 연기처럼 타없어지는 것만 같지만, 그 타는 냄새를 향기로 흠향하시면서 마치 음식과 같이 즐기시며, 그것을 대접하는 자에게 반드시 후한 것으로 갚으시며 진정한 화목의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중심을 다 드리는 식의 구체적인 마음가짐의 표현으로 매사에 하나님과의 화목의 주인공이 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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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7일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 3:9)

대 이스라엘그 이유는 모세의 율법 자체를 그들 자신의 공로의 일환으로 여기는 인간적 동기가 작용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증언대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율그러한 사람들에게 십계명을 허락하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한 것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에 속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율법의 가르침과 교훈을 표면적으로만 아니라 마음 중심을 다하여 따르고 지켜야 하는 이유입니다. 조건적으로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또 감사하여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신뢰와 존경, 그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자원하여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이며 계명입니다. 빌립보 교회에 만연하였던 대표적인 이단 사설 중 하나였던 할례파들의 주장과 달리 할례 예식 자체가 특별한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하는 바울의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참 구별의식의 일환으로 치러지는 할례는 오히려 마음판에 새겨져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구하는 이유는 율법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것을 준행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까지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성도가 뭔가 남다른 의로움의 여지가 자신에게 있다면, 그것은 그만큼 남다른 하나님의 은혜의 호의를 힘입은 탓입니다. 그  반대로 자신의 불의와 부족함이 느껴지는 경우에도 자기 자신을 탓하면서 한탄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공로를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얼마든지 새로워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에게 허락된 최고의 삶의 능력과 비결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약속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온갖 불의와 부족함을 대속해 주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 즉 ‘옳다 여기심’을 받을 수 있음을 전제할 때 정말로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서건 능히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 일을 가능케 하기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우리들 각자의 개인적 구세주가 되어준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공로와 능력을 마음껏 누리는 삶을 사십시오. 정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는 믿음의 순종과 사랑, 그리고 헌신의 즐거움을 맛보십시오. 사람의 겉모습, 즉 육신으로 모양을 내는 그 어떤 사람들보다 마음이 부요하고 거룩하여서 인생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선택된 자녀들로서 영광과 특권을 누리는 삶의 주인공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 사는 자가 정말로 귀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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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1일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시 118:18)

편 118편은 무려 430년에 달하는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킨 출애굽의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유월절 예식을 거행하면서 부르던 찬송시입니다. 특별히 유월절 식사를 마치면서 그 귀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현재에도 살아계시며 매일 그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에 대한 희망과 감사를 드리며 살 것을 다짐하는 노래입니다.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라고 부르는 노랫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문에 들어설적마다 세상 가운데 살면서 원치않게 범한 자신들의 온갖 불의와 죄를 사하심으로써 당신의 자녀로 거듭나도록 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은총을 떠올리도록 해줍니다.

인간이 절대자이며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스스로 옳다 여김을 받는 일이야말로 모든 시대 모든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와도 같은 것입니다.

불완전하고 불의한 인간성의 한계상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떳떳하거나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자기 스스로 의의 기반과 여지들을 찾고자 하지만, 우리들 자신에게서 난 것들은 한결같이 일정한 한계와 제약을 갖습니다. 한 편으로는 좋은것 같은데, 다른 면으로는 역시 불의하고 모자랄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적 의로움의 한계입니다. 그걸 모르고 자기 의를 고집하다 보면 결국 편협하거나 폭력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누구나 태생적으로 불의하고 부족할 수 밖에 없는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의의 근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의 의’를 말합니다. 성도가 삶 속에서 무엇이든 자기 자신에게 옳다고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삶의 문제점들이 대부분 우리 스스로 매사에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더 옳다고 여기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고려할 때, 성도가 삶을 은혜, 즉 은혜로 말미암은 의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지혜롭고 능력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스스로 충분히 의로우면서도 자신의 의로 인하여 결코 다른 아무도 불의하거나 부족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럴 이유도 자격도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우리에게는 의로움이 없습니다. 하나님만 의로우신데, 그분은 인간의 불의를 사하시기 위해 독생자의 희생을 각오하신 분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항상 의롭다 여겨주시기 때문에 나의 의는 다만 하나님의 의, 즉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칭의’ (justification)의 덕과 유익을 쌓기위한 것임을 아는 것이 성도가 정말로 의로와지는 삶의 비결입니다. 그러한 의의 문을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의 공로를 힘입어 항상 의의 문으로 다니면서 자기 자신과 또한 다른 사람들까지 의롭게 만드는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주님의 말씀 역시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노고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의롭게 하기위한 노고를 감당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스스로 충분히 의롭고 또한 남을 의롭게 하는 ‘의의 문’으로 들어서는 삶을 꼭 사시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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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4일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시 114:8)

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 광야의 힘든 여정을 지나면서 번번이 마실 물이 없어서 괴로움을 겪을 적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반석을 터트리는 식으로 물을 공급하였습니다. 단단한 반석의 표면과 같은 온갖 인생의 어려움과 한계상황이라도 능히 견뎌내게 하시며 생명의 원천과도 같은 시원한 물줄기를 제공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순전한 믿음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사건입니다.

그만큼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믿는 자들의 삶의 근원적인 필요를 채우실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와 동시에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 한가지는 반석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는 일이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에 속한 것임으로 그만큼 그의 영광과 주권이 드러나야 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민 20:1-13의 기록에 따르면 모세와 아론이 출애굽의 지도자들로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후 남은 백성들과 함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신 광야의 가데스 라는 곳에서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도록 하라는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지팡이를 두번이나 내리치면서 마치 모세 자신이 물을 내는 기적의 주인공인 것처럼 행한 데에 있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그만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반석의 표면과 같이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는 모든 현실 상황이 사실은 하나님 편의 영광이 드러나는 기회입니다.  그러한 믿음의 원리에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의 우선순위가 분명할 때 반석에서 못물이 나고 샘물이 터지는 것과 같은 기적적인 삶의 변화가 얼마든지 가능한 법입니다. 

사안의 경중을 떠나 성도가 진심으로 고려해야 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위기상황을 도리어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주권적 통치가 실현되는 계기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극단적 위기상황이라고 해서 자기 임의대로 행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버려야 합니다. 

매사를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고 그가 충분히 일하실 수 있도록 그에게 기회를 드리는 심정으로 그의 뜻과 가르침을 따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는 속담의 교훈처럼, 인생의 온갖 위기상황에 처할수록 더욱 더 주님의 뜻을 따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의 여유와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 간의 연단의 세월처럼, 인생의 위기를 오직 믿음의 법칙으로 타파해가는 법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 바다의 암초와 같이 광야 여정에 반석과 같은 위험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우리에게 구원의 반석이 되시는 이유도 마찬가지 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그의 성품과 의지를 본받는 것이 물론 힘든 일이지만, 성도가 그러한 마음가짐을 간직하는 일에 힘쓰면 주님 자신이 얼마든지 삶의 견고한 반석이 되어주신다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반석과 같은 인생의 위기 속에서 오히려 반석처럼 단단하고 견고한 믿음의 능력을 키워가기 바랍니다.

우리의 눈에 보기에 반석일 뿐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속에 농사를 짓기에 충분한 양만큼의 못물과 단 샘물까지 모두 준비해 놓았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온 세상이 하나님 편의 가능성과 희망의 여지들입니다. 반석과 같은 믿음의 주인공이 되어서, 반석에서 터져 나오는 못물과 샘물의 기적을 매일 맛보십시오. 주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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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7일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시 109:4)

편 109편은 시의 내용상 흔히 ‘저주의 시’ (imprecatory psalms)혹은 ‘저주 기도’로 분류됩니다. 원수에 대해서까지 무조건적 용서와 자기희생의 도리를 교훈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맞지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의 많은 저주 시들이 주는 교훈은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지극히 사실적인 신뢰와 위임을 통한 인간적 복수나 보복심리에 대한 부인에 있습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정직하고 진실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들으시고 마땅한 방식대로 갚아주시기를 바라고 구함으로써 스스로 원수에 대한 보응과 복수의 필연성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항상 부드럽고 고요하며 감사의 조건으로만 충만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온갖 원한과 억울한 사정으로 가득할 수 밖에 없다는 삶 자체의 현실성을 고려할 때, 원수에 대한 보응과 적개심까지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처리하고 받아들이는 일의 중요성을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인간성의 한계를 초월하여 천사와 같은 내면의 거룩함과 고요함을 지니는 존재가 될 것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삶의 극단적 상황 속에서 변함없는 믿음의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합니다. 자신을 괴롭게하는 원수들에 대한 당연한 복수심마저도 그의 주권적 통치의 영역에 속한 일이라는 사실을 믿고 자기 스스로 복수의 화신이 되고자 하는 마음 대신 오히려 하나님 편의 적절한 조치를 구할줄 아는 마음가짐을 요구하는 분입니다.

인내심의 한계를 벗어난 미움과 분노의 마음, 그 감정의 잔재들에 대해서까지 ‘주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그의 처분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과 결심이 작동해야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일이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뜻은 다분히 ‘전능자’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세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그의 자녀된 우리를 위하여 온갖 전능한 일을 하실 수 있는 그분께서 원수에 대한 보응마저도 대신해주실 것을 믿는 믿음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뜻에서 입니다.

그 믿음이 구체적 행위로 표현되는 것이 바로 성도의 기도입니다. 마음의 평화와 삶이 고요한 중에만 드리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몸이 상하고 마음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때, 즉 누군가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의 마음을 갖고서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모든 복잡한 마음상태를 경험하면서도 진정으로 삶의 해결사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주님께서 친히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법입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야할 것이지만, 특별히 누군가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이 차오를 때 더욱 더 그리하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으신 분인 까닭에 그 마음과 생각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때에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가장 정확히 아시고 치료할 수 있는 분입니다.

시편 109편을 포함하여 다른 대부분의 저주시의 결말이 한결같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감사찬송의 구절들로 끝나는 이유입니다 .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시 109:30). 복수와 저주를 구하는 인생의 ‘쓴 물’까지 찬송의 ‘단 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매사에 의지하는 기도와 간구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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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0일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유다서 13절)

다서는 겨우 한 장으로 구성된 짧은 서신이지만 메시지의 강조점의 측면에서는 가장 중요한 믿음의 도리와 방법을 설명해 주는 책입니다. 매사에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생활의 바른 도리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렀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에게 있어서 믿음의 동기가 그리스도 중심이 되지 않으면 자연히 온갖 허탄한 인간적 자랑을 내세우게 되고, 결국 삶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경건한 삶을 이어가는 데에 있어서 실패하고 맙니다. 성도의 삶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불행하고 허망한 일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의 삶 속에 주님을 모시고 그분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경건한 마음을 유지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에 비해 모든 그릇된 신앙의 열심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소홀히 하는 데서 기인합니다. 거친 파도와 함께 온갖 바다의 오물들이 쓸려와 해변을 더럽히는 것처럼, 매사에 자기중심적인 욕심과 이해를 절제하지 못하여서 복음의 진리를 갖고서 남을 미혹하거나 치부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의 행위가 바로 그것입니다. 혜성처럼 등장하였다가 그만 궤도를 벗어나 우주 밖으로 밀려나고 마는 유성과 같은 존재가 되고마는 유명한 종교지도자나 이단교리의 추종자들의 운명과도 같습니다. 참되고 진실한 성도는 결코 올바른 믿음의 궤도를 벗어날 필요가 없습

모든 인간적이고 인위적인 차이나 부러움에 상관없이,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얻는 이치를 가능케 하시는 분은 주님 예수 그리스도 한분 뿐입니다. 그 이름 외에 천하에 다른 어떤 이름도 필요없습니다. 정말로 성도에게는 그리스도 한분만으로 족합니다. 주님 한분 만으로 모든 부러움과 소원의 대상을 삼으십시오. 세상의 다른 어느 누구도 나의 죽음을 대신해 줄 자가 없으며, 대속의 죽음의 가치를 그분처럼 확고히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 말고 다른 어떤 고상한 것을 갖고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모두 이단이며, 거짓 교사들입니다. 주님만을 생각하고 바라며, 매사에 온전히 그분의 것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그것이 성도가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경건이며 능력입니다.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늘의 별과 같이 소중한 존재로 여겨주십니다. 의의 태양이신 주님 자신의 빛을 드러낼 반사체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에 있어서까지 주님을 잘 드러내는 스타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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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렘 23:24)

하나님의 존재의 특성을 가리키는 말 중 가장 흔하고 유명한 것이 바로 그의 무소부재하심, 즉 온 우주 가운데 그가 계시지 않는 곳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가 창조한 것 가운데 그의 간섭과 감독을 벗어난 것은 결코 없으며, 그의 피조물들이 그의 다스림과 통치 방법을 벗어나 살아갈 수 있는 여지는 결코 없습니다. 자연이 되었건 인생이 되었건 간에 창조주의 뜻과 계획을 거스리는 식으로는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현상이 이를 잘 반영합니다. 하나님의 무소부재성은 단지 눈으로 볼 수 있는 물리적 공간에 대해서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인간의 심리적 공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내면의 삶의 영역 어디에도 주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성도가 결코 마음으로 하나님을 멀리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생각 자체는 하나님의 사랑의 간섭을 멀리 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하려 들지만, 믿음의 갈망은 여전히 그의 사랑과 자비의 대상으로서 삶을 살아가게끔 하는 원리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의 생각 속에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것이 바로 이 사실입니다. 그 의 임재를 벗어난 상태에서의 말과 행동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서로가 주고받는 말 자체의 의미보다 그 사람과의 관계, 혹은 그의 인격과 성품에 대한 고려가 먼저인것과 같습니다.

누군가의 성품을 알면 그의 말의 의미와 동기가 더욱 분명해지기 마련입니다. 삶의 진정성이 동기가 되지않는 말이나 행동은 정말로 의미가 없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존재의 확실성과 그의 진실하심에 대한 두려움과 자각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수 없는 것처럼, 성도의 삶 역시 하나님께 대한 참된 두려움이 없이는 믿음의 이유와 능력을 갖지 못합니다. 믿는 자의 삶 어디에도 그가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며, 우리의 사고방식 중 그 어떤 것도 순전히 우리 식으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사랑이어야만 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그분께 대한 참된 두려움과 신뢰가 동기가 되어야만 합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함과 성실함으로 삶의 동기와 목적을 삼으시기 바랍니다. 눈 앞에 펼쳐진 삶은 물론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한 고민이나 소원에 대해서 어느 것 하나도 그의 뜻을 거슬려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정말로 그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그의 뜻을 대신할 협력자가 되기만 하면 불가능한 일은 결코 없습니다. 매일매일 삶을 그분의 생각과 말씀이 이루어지는 활동 무대와 같은 것으로 여기십시오. 선지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도가 삶을 하나님의 부르심의 취지로 산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온통 그의 말씀으로 가득한 삶과 생각의 소유자가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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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6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너희가 성 밖에서 바벨론의 왕과 또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과 싸우는 데 쓰는 너희 손의 무기를 내가 뒤로 돌릴 것이요 그것들을 이 성 가운데 모아들이리라” (렘 21:4)

로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명칭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한 초월자 하나님의 분명한 교훈과 깨우침을 제공할 때 쓰이곤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주인으로서 그들을 위한 각별한 돌보심과 구원을 베푸시지만, 그는 여전히 온 세상의 주인이신 까닭에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의 방식이 보편타당한 믿음의 원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 할지라도 일반적인 차원의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거나 지극히 상식적인 믿음의 원리를 저버리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격과 권리를 상실하고 만다는 뜻입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통하여 유다 민족의 정신 개조와 신앙생활의 새로움을 모색한 여호와의 뜻과 달리 유다 예루살렘 성이 결코 망하거나 허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찌기 여호와께서 다윗 왕을 사랑하사 그의 왕권을 영원히 지속시켜 주리라고 약속한 사실을 내세우면서 설마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는 일만큼은 없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한 헛된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기어이 바벨론 제국을 들어 유다 백성을 연단하는 모진 매처럼 사용하였습니다. 어설픈 민족주의적 이념을 내세우며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고 백성들의 마음을 미혹한 모든 정치인이나 종교인들의 주장은 허무맹랑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다 백성이 바벨론 군대와 맞서 전쟁이라도 불사하겠다고 만용을 부리던 전쟁 무기들이 결국은 그들 자신의 영토를 파괴하는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싸움은 결코 무기로 하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이스라엘을 위해 친히 전쟁의 용사가 될 것을 약속하신 그들의 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하는 것임을 교육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인생의 싸움터에서 참으로 그의 약속을 신뢰하면서 믿음에 따라 살고자 하는 자들을 위해 친히 전능한 용사와 같이 행하기를 기뻐하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십시오. 힘들고 어려워도 여호와 하나님을 언약의 주인으로 믿고 섬기면서, 삶은 다만 그의 뜻을 실현해 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여기는 믿음의 원리와 목적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각자를 포함하여 온 세상 사람들의 삶의 이치를 결정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더딜지라도 그의 약속과 의지를 따라 행하는자의 삶에는 확실한 믿음의 보상이 뒤따르는 법입니다.

매사에 바르게 기도하고 진실과 성심을 다해 그의 뜻을 따라 행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의 말씀의 교훈을 구하고, 꼭 그렇게 실천하도록 힘써 보십시오.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깝고 구체적인 삶 속에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매사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신 그의 힘을 빌어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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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9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렘 17:14)

앙인의 삶 속에서 찬송이 주는 가장 큰 의미는 자신의 올바른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 있습니다. 사람마다 즐거운 일이 있을 때에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성도가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우리를 기뻐하시며 또한 그분을 기쁘시게 할 자들로 세움을 받은 사실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가수가 무대에서 노래하는 동안만큼은 그 노래의 주제가 되는 대상에 대한 완전한 일체감과 공감을 경험하기 마련입니다. 감정적인 차원의 반응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주는 효과는 그 어떤 논리적인 해명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켜 자신의 찬송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레미야 자신의 하나님과의 일체감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은 자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 때문입니다. 주어진 현실 상황의 유불리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자신을 항상 기뻐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여러가지로 복잡하게 뒤엉킨 예레미야 당시 유다 백성들의 처지에서 가장 크고 심각한 문제점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그들 스스로 자기 자신들에 대한 건강하고 복된 이해력을 갖추지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죄로 인한 양심의 고소를 이기지 못한체 죄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하나님이 아닌 인간적 의지의 대상을 만들고 급기야 우상숭배의 죄를 용납하는 식의 하나님의 백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식의 행위를 일삼곤 하였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상상력이 초래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자기 스스로를 대하는 마음가짐에 있어서 타락하거나 왜곡되지만 않으면 하나님의 뜻하심 가운데 삶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여지는 항상 있습니다. 반대로, 성도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보는 눈이 타락하여 그만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자 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삶은 정말로 개선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 되고맙니다.

믿음생활을 유지해 가는 과정 내내 항상 찬송이 주는 위력, 즉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님 편의 이해를 확립하는 일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찬송은 결코 단순한 음악이나 노랫말 뿐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찬송가 가사의 내용과도 같이 찬송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그 토대 위에서 자기 자신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로서 거룩한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행위입니다.

날마다 힘있고 정다운 찬송으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 자체를 새롭게 세워가는 삶을 사십시오. 주님의 기뻐하심을 힘입기만 하면 성도의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치료의 과정이며 구원얻는 길이 됩니다. 큰 소리든 작은 소리든 간에 항상 주님을 찬송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흔한 복음성가곡 하나만이라도 노래말의 내용 그대로 자신의 삶의 고백이 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찬송과 함께 온갖 몸과 마음의 병의 치료를 경험하고, 언제든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삶의 나날을 보내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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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2일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고난 당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 같이 하시나이까” (렘 14:8)

믿음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실질적인 문제점은 하나님과의 친근함의 회복과 유지에 있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인격을 삶 가운데 친근하게 실질적으로 경험하면서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상 그렇지 못하는 데에 삶의 문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계시며 우리들 각자와 친밀하게 지내시고자 합니다. 다양한 삶의 문제점들에 대하여 우리 스스로 지극히 주관적인 해답과 방법을 도모해서 그렇지, 정말로 선하고 참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마음만 전제되면 그의 도우심과 긍휼의 약속 하에서 해결받지 못할 문제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께 대한 우리들 각자의 이해와 믿음의 방식이 어떠한 것인지의 여부입니다.

정말로 성도로서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소망의 근원이며 매사에 궁극적인 구원자로 여기십니까? 누구나 성도라면 그의 삶의 근본이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계획을 따라 행하고자 하는 데에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나 계획이라도 애초부터 그분의 기대와 요구를 먼저 고려하고 준비하는 식이 되어야만 합니다. 단지 보여주기 식이나 생색을 내기 위한 차원이 아니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분의 요구사항을 이행하고 점검하는 차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라곤 도무지 없는 로보트와 같은 존재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치와 목적을 그분의 뜻과 계획을 드러내고 성취하는 데에 두고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정말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무엇이든 잘 되고 유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소망의  주인이며 구원자입니다. 우리가 우리들 자신을 구원해 낸 이후 우리의 업적과 의로움을 부각시키기 위해 불러들이는 구경꾼이나 행사의 참가자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가 우리의 삶의 터전이며 주인이실 뿐 우리는 모두 잠깐 스쳐가는 나그네이며 거류자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 바로 그분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 우리에게 남은 단 한번의 호흡을 맡기고 영생에 이르도록 청하고 바랄 수 있는 소망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시며그의 아들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나그네 취급하지 마십시오. 필요한 때만 불러내어 도움을 청하는 임시방편처럼 여기지 마십시오.

그러기에는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십자가의 대속의 사랑의 가치와 효험이 너무도 중하고 친근하기 때문입니다. 그하루밤만 잘 넘기는 식으로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닙니다. 생명의 주님 안에서 영원을 소망하며 그것을 위한 준비와 투자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매사에 주님을 더욱 친근히 함으로써 항상 그분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는 삶의 나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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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5일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렘 10:23) 인생

정의 최종 목적과 그 과정이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일뿐 인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지적은 바벨론 포로기를 앞둔 유다 백성들의 처지에서 그리로 향하는 삶의 여정 자체를 두려워 한 나머지 가서는 안될 길을 선택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일깨우기 위한 것입니다. 주저하고 피하고만 싶은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길의 끝에서 그들로 하여금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살 길을 이미 준비하고 실행에 옮기는 중이었습니다. 구약성서의 대부분이 유다 백성이 바벨론 포로기를 지나는 중에 찬란한 문서 형태로 기록 구성되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 자체의 불변성을 전 민족적으로 경험한 시기가 바로 칠십 년간의 바벨론 포로기를 지나는 동안이었습니다. 번번이 그들 자신의 죄성으로 인하여 온전히 성취되지 못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경험한 시기가 바로 포로기 였습니다. 자유인의 몸으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어야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 스스로 일 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고 여겨지는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 편의 더 큰 구원과 회복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 믿음과 기다림, 복종과 소망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이끌어내는 참된 요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참된 능력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들 자신이 정해놓은 길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의 여정을 택하고 묵묵히 따라가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진실한 성도의 삶 속에서 믿음의 의지와 대상만 분명하면 삶의 모든 여정은 결국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며, 그가 원하시고 계획한 길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현명함이나 길 자체의 순탄함과 형통함의 여부까지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 모든 상황이 하나님을 궁극적인 의지와 소망의 대상으로 삼는 지의 여부만 중요할 뿐입니다. 좁고 협착해 보이는 길이 오히려 참 생명, 즉 영생의 길일 때가 많습니다. 지금 자신이 걷는 길이 순탄하고 사람들의 인정이나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 따위에 전혀 개의치 마십시오. 길이 바뀌고 여정이 힘들게만 보여도 그 길의 동행자가 주님이기만 하면 제대로 복된 길을 가고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쉽고 안락해 보여도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 길은 점점 더 해로워 질 뿐입니다. 쉽고 편한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괴롭고 힘들어도 주님을 따라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걷는 길이 참 행복의 길입니다. 매일매일 힘든 삶의 여정이지만 믿음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참 생명의 길을 주님과 함께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걷다보면 어느덧 자신이 하나님 나라 한 복판에 서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매일매일 천국을 향해 걸어가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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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날이 이르면 이 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말하지 아니하고 죽임의 골짜기라 말하리니 이는 도벳에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했기 때문이니라 “ (렘 7:32)

선지자 예레미야의 활동 당시 예루살렘 인근에 위치한 공동 묘지와 같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의 명칭이 ‘죽임의 골짜기’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진 사실은 성도의 삶 속에서 근거없는 불안과 염려의 여지들을 대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큰 교훈을 제공합니다. 불길한 상상은 자주 사실이 되어 나타나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유다 민족 최후의 날 바벨론의 침략을 두려워한 많은 백성들 중에 그만 믿음의 이치를 저버리고 온갖 현실적 대안만을 찾다가 하나님께서 금한 이교도적 우상숭배의 행위를 따라서 행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식을 신에게 제물로 드리는 정도의 열심만 있으면 당면한 현실의 불행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지극히 염려스러운 기대를 품게된 것입니다. 이방 신에게 제물을 드리는 것 자체가 있을 수없는 일인데 그것도 자식을 드려야만 한다는 식의 극도의 열광주의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기 칠십 년은 유다민족의 개조를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한 일종의 풀무질과 같은 꼭 필요한 연단의 세월이건만, 기한을 정해놓고 당하는 고난과 역경인데도 불구하고 당장의 피해만을 의식한체 이방종교의 효력을 기대하는 식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한 것입니다.

칠십년이라는 잠간의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할것 같은 염려스러움이 그만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본분을 망각하게 했고 그 결과 자신들의 삶 자체가 ‘죽음의 골짜기’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약성경에서 흔히 지옥이라고 불리는 헬라어위 ‘개헤나’라는 말이 ‘힌놈의 골짜기’라는 이름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염려와 걱정에 메이기 시작하면 결국 성도라 할지라도 삶의 자리가 염려스러운 처지가 되버리고 맙니다. 분명히 바벨론 포로기는 언약의 세월이었고, 그 힘든 고난과 역경의 세월만큼의 유익과 변화가 보장된 곳이었습니다. 애초부터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여전히 자기 스스로 선하고 어진 인생의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에 있음을 믿을진대 결코 삶의 어느 한 순간도 죽음의 골짜기에 갇혀지낼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양으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하기 위함인것처럼 (요 10:10), 죽음에 이르게 하는것만 같은 걱정과 염려가 사실은 성도의 삶에 생명의 위력을 더하도록 하는 보조장치일 뿐입니다.

죽음의 원리가 지배하는 것만 같은 세상살이에 절대 현혹되지 말고 생명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추구하는 삶을 사십시오. 우리의 삶을 위해 그가 친히 대속의 죽음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걱정, 근심, 염려 대신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의 끈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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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2일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 (렘 5:1)

선지자 예레미야의 활동 당시  유다 예루살렘 성에 의인이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성읍의 죄를 용서하고 심판을 물리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희망과 경고의 취지를 동시에 반영합니다. 의인을 한사람만 찾아도 성읍 전체의 멸망을 유보해 주실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 대해 자비롭고 은혜로운 분이신데 비해, 단 한 사람도 그의 마음에 합한 자가 없을 정도로 타락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매사가 그렇듯이 믿음의 역사도 단 한 사람의 의롭고 바른 결심과 선한 마음의 동기에서 시작됩니다. 단 한 사람의 가치가 별 것 아닌것 같지만, 모든 일이 단 한 사람의 진심과 성심을 다 하는 여지가 없어서 제대로 시작하지도, 끝맺지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단 한 사람의 존재의 가치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비교할 수 없는 확실한 우위를 지닐 때가 많습니다.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천국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처럼, 자루 속 밀가루 서 말을 전부 부풀게 하는 것이 사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누룩의 효과 때문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의 능력만 있어도 산을 옮기는 것과 같은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할 것이라는 교훈의 의도도 마찬가지이고요.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참되고 선한 마음의 결심을 절대로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참 생명력이 있는 밀알 한 톨의 가치는 농부의 일년 동안의 수고와 그 결실을 보장할 정도로 크고 확실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의 동기를 갖고 사십시오.

자기 자신은 물론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를 개선하는 일이 모두 한 사람의 참되고 거룩한 믿음의 결심에서 시작됩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을 유지해 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요구 조건을 다른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십시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이 되어가는 비결입니다.

온 세상이 변해도 자기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삶은 여전히 그대로이지만, 내가 변하기만 하면 온통 새롭습니다. 원인도 해결도 우선 먼저 내 속에서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는 것이 회개의 참된 의미입니다.

참된 회개로 주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주님은 모든 위대한 변화를 가능케 하십니다. 거듭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이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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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8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골 3:23, 24)

평생 관계성 속의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삶의 특성 상 성도의 삶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상급 역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하기 마련입니다
부부관계나 부모 자녀 관계, 그리고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 등 모든 형태의 인간관계가 사실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우리들 각자의 몫의 유업, 즉 영원한 상급의 기반입니다.
유업을 어떤 방식으로 잘 관리하는 지의 여부에 따라 상급의 종류 역시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성실과 진심으로 하는 데에는 반드시 그만한 고충과 함께 알찬 보람과 기쁨이 함께 하기 마련입니다.

매사에 주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은혜와 사랑, 그리고 신뢰의 원리를 따라 행하다 보면 인간적 한계에서 기인하는 모든 오해와 편견을 너머서는 서로 간의 유익이 반드시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꼭 알아야 할 것은 성도라면 모든 관계성의 유익과 최종적인 보상을 하나님께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삶의 유익을 이루고자 하는 취지를 무산하는 식의 현실위주적인 보상만을 구해서는 결코 인간관계의 유익을 보장할 길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와의 교제이든 간에 그  관계의 참된 유익의 가치를 하나님 편에서 찾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만 합니다.
부모 자녀 사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권한이나 자격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랑하고 위할 뿐입니다.

생명의 구원이라는 인생 최고의 보상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 한분 뿐입니다.
피차 더 주님을 바라고 사모하며 신뢰하는 사이가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아껴주어야 할 노릇입니다.
부부 사이든 부모 자녀 간이든,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들여다 볼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그 사람은 하늘의 유업을 받은 것입니다.
매사에 서로 잘 가꾸어서 하나님의 유업을 자랑할 수 있는 부부사이, 부모 자식 사이, 동료관계를 꾸려가야 할 것입니다.
하늘을 이고사는 성도의 모든 관계가 바로 하나님 나라이고 그곳에서의 삶입니다. 매일 천국을 경험하고 그 나라의 유업을 잇는 삶을 사십시오. 샬롬!


5월 1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 1:13)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변화된 골로새 교인들의 영적 상태를 가리켜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냄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김을 받았다고 말하는 바울의 의도의 핵심은 ‘나라’라는 말이 의미하는 ‘질서와 통치’에 관한 것입니다

부강하고 여유가 있는 나라일수록 그 나라의 법과 제도적 장치들이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법입니다.
법의 기능과 위엄이 약할수록 사회와 개인의 삶의 안정이 보장받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고요. 골로새 지역 자체가 수많은 이교도들의 혼합주의적 문화와 종교의 지배를 받던 곳이어서 그 곳 사람들 대부분이 영적 생활의 안정을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어둠의 영들의 지배와 통치 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종교생활에 심취할수록 삶의 내용이 엉망이 되고 믿음과 삶의 이율배반적인 요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한 혼돈과 어둠의 권세의 지배를 받는 삶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의 삶에 분명한 주인이 되셔서 그의 뜻과 계획에 따른 완전한 통치가 시행되도록 하는 분입니다.
그가 지배하는곳을 가리켜 하나님 자신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나라의 법과 통치 질서의 원리가 하나님의 사랑, 즉 독생자를 희생제물로 내어주시기까지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의지와 계획에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에서 수없이 강조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의 성장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의 분별력과 믿음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지배를 받는 자의 삶이 바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서 사는 자의 모습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사랑의 원리를 배제한체 자기 임의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아직 그 나라에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알 수 없는 어둠의 권세에 이끌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왕에 정해진 법과 질서는 마음을 다 해 온전히 준수할수록 그로인한 유익과 효능이 더해지는 법입니다. 까닭모를 혼돈과 어둠의 권세를 좇거나 그것에 매이는 식의 삶을 살지말고 모든 일들의 실체가 분명하고 한 분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의 원리가 지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 속한 자로서 삶을 사십시오. 그 나라에 속한 자들에게는 결코 어둠의 권세가 기세를 부리지 못하며, 더 이상 권세를 갖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가 훨씬 더 크고 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에 속한 자로서 그의 권세와 위엄을 갖추십시오. 그리스도의 권세를 대적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샬롬!


4월 24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약 2:13)

도가 본의 아니게 다른 누군가에 대하여 인간적 차별을 가하는 잘못을 범치 않기위한 유일한 방법이 바로 모든 인간의 허물을 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즉 긍휼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긍휼이란 죄된 인간의 한계를 아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마치 부모에게 잘못하는 자녀라 할지라도 그 자녀를 항한 부모 자신의 마음이 원망보다는 측은하고 불쌍한 마음이 더 큰것과 같습니다.
혹 자녀를 향하여 노한 마음을 품더라도 그 분노의 본심은 역시 자녀가 바르고 잘 되기를 바라는 염원에 있는 법입니다.

이 땅 위의 모든 인간을 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이 그와 같으며, 그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라야만 사람마다 자기 위주의 마음의 성향에서 비롯된 섣부른 판단이나 비난을 금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믿음 안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도덕적 ‘우월감’에서 비롯된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훨씬 낫다는 식의 이기적인 우월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리킵니다.
인간의 모든 허물과 죄를 사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필연적인 용서의 마음이 공감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까지도 마치 하나님처럼 필연적으로 용서의 의지를 갖고서 대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는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마음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그 아픔이 오히려 자신을 더욱 자랑스럽고 성숙하게 만드는 자랑스러움의 근거가 됩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기를 바라고 그렇게 될 때에 어느 누구를 대하여서도 부족감없이 마음의 담대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 마음의 여유와 자랑스러움이 있으면 아무도 차별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 안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참된 자랑스러움을 회복하고 그 토대 위에서 다른 사람들의 가치를 일일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삶을 사십시오.
자신을 사랑하는 일의 방법과 열매가 모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서부터 비롯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바로 알고, 그 이해와 깨달음 하에서 다른 모든 사람을 대하여도 역시 한없는 긍휼의 마음을 건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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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7일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눅 22:42)

류구원의 과업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의 핵심은 그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소원에 대한 갈망과 믿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저주스러운 죽음을 감당해야만 하는 지상 최대의 모순과 부조리의 상황에 처해서도 여전히 그 모든 일을 계획한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완전한 ‘설득’을 의미합니다.

부모에 대한 자녀의 본능적인 믿음과 신뢰, 또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온 몸과 마음을 다하는 식의 사랑과 기대감이 전제될 때 어떤 식으로든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사랑과 믿음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은 예수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 분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은 그가 추구한 하나님과의 관계, 즉 아버지와 아들로서 관계를 우리가 전수하고 닮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당한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시며 장차 온 세상의 주관자로 재림하는 영광의 주님으로 변모하기까지 하나님께 대한 아버지로서 신뢰와 기대가 절대적인 요인이었습니다.

죽음이라는 마지막 절망의 시험까지도 자신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뜻과 소원에 따라 선택하고 따른 결과가 바로 부활, 승천, 하늘 보좌 우편, 그리고 재림의 영광과 같은 것들입니다. 
 
주님처럼 인생의 고비마다 하나님께 대한 이해와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가르치신 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바로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온갖 요소들의 궁극적 주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억울한 희생이나 대적의 모함처럼 여겨지는 일들까지도 결국 나의 아버지께서 주도하시는 일이라고 여기게 되면 결코 손해될 것이 없습니다.
더 큰 유익을 보장받도록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능히 그렇게 하실 분입니다.
그가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모순과 불평의 여지까지도 다만 하나님께 대한 아버지로서 믿음의 회복의 기회로 삼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능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가 보시기에 우리는 영원히 사랑받을 그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샬롬


4월 10일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8)

성경에서 약속은 믿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변함없는 구원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성도가 삶을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해서 산다는 것은 자신의 삶 자체가 하나님 편의 구원의 열심의 표현이며 그 열심이 구체적으로 결실되어 가는 필연적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희망과 감격의 여지를 찾을 수 없는 경우에도 역시 하나님 편의 좋은 일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을 잃지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은 각각 특별해서 스스로에게 유익한 것의 가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성향이 있습니다.

삶 자체의 만족과 기쁨의 여지들도 저마다 각각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근거 위에서 인생의 가치를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구원의
약속의 진행과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성도의 삶만큼 값지고 품위있는 것이 없습니다.
사소한 일에도 그 일의 근본적인 동기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현실화하는 데에 있다고 믿게되면 정말로 자신이 매사에 하나님을 상대하는 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변하고, 특별히 우리의 자녀들에게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약속의 대상 혹은 협력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전달할 수 있게 됩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된 것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평생에 걸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온 결과였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의지와 결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매번 하나님의 약속의 후손으로서 삶을 선택함 으로써 최소한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이삭과 같은 하나님의 언약의 후손들이 되도록 해야 할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약속이며 그 보증입니다.
그분 안에서 매사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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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갈 2:8)

예수님 생전에 이스라엘 12지파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열두 제자로 부름을 받은 사도들에 비해 바울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개인적 만남을 통해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을 받은 사실에
대해 원치않는 오해와 차별을 받았습니다.

신약성경의 그의 모든 서신마다 서두에 꼭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도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일일이 밝혀야만 할 정도로 ‘정식’ 열두 사도의 반열에 속하지 못한 것이 마음의 근심거리가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방인을 위한 사도직이 열두 사도의 으뜸이라고 할 수있는 베드로의 사도직보다 결코 못한 것이 아니며 다만 동일한 차원의 다른 부르심의 유형을
따라 된 것이라고 여길 수 있었습니다.

방법은 단 한 가지, 즉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께 대한 성실한 태도에 있었습니다.
‘사도’라는 말 자체가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일의 종류나 성과, 또는 사람들의 반응까지도 결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성도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과업을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르심 내지는 보내심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지의 여부가 중요할 뿐입니다.

소위 직업의 귀천이라는 것은 인간의 감각 기능의 작용에 따른 것일 뿐입니다.
무슨 일이건 간에 그 일로 인해 맛보는 진정한 보람과 감사는 전인격적 차원의 판단과 만족에서 비롯됩니다.
어떤 형편에서건 간에 자신의 삶의 근거를 하나님에게서 찾고 구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비교할수 없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차원의 감사와 보람을 누리도록 하는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무슨 일이건 간에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된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진실한 삶의 만족과 보람을 맛보십시오.

무슨 일이건 간에 처음부터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시작하고 유지해 가십시오.
우리는 최소한 주님과 함께 하는 자들로서 우리 나름의 진정한 삶의 행복과 가치를 위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내게 주어진 삶에 관한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도들입니다.
그 거룩한 소명의 삶을 마음껏 누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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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7일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 12:13)

전능자이며 초월자인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의 원리에 따라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면서도, 또한 삶의 올바른 길을 택하여 걷는 책임이 우리들 각자의 몫일 때가 많습니다. 매사에 올바른 길을 택하여 살아갈 때 삶의 수고가 덜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곧고 올바른 삶의 길은 항상 하나님과의 약속을 전제로 할때 제대로 이해할수 있습니다. 매사에 하나님 편의 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고려하는 마음가짐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때때로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워 보여도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르고자 하는 마음의 동기로 시작하고 선택한 일에는 결코 후회스러움이 없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일치와 편안함이 수반되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로 순전히 자기 자신에게 좋을 양으로 선택한 일들은 으례히 얼마 되지않아 후회스러움을 초래하곤 합니다.
매사에 마음 속으로부터의 편안함과 일치를 제공하는 일에 대한 우선적 고려가 있어야만 합니다.
지금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의 마음의 평안과 일치의 정도가 얼마만큼인지를 살펴보고, 그 점에 있어서 부족한 점들을 스스로 매꿔가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일들이 결국 성공과 기쁨을 가져오는 법입니다.
성도가 진실로 하나님을 향한 내면의 담대함을 구비할 때 세상의 그 어떤 일로도 아주 낙심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믿음 안에서 누리는 마음의 담대함으로 항상 삶의 바른 길을 보장받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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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일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히 7:22)

말로 전달되는 약속의 효력과 가치는 의례히 그 말을 한 당사자의 인품과 의지를 기반으로 하기 마련입니다.
성품과 인격이 믿을만한 사람이 한 약속이라야만 서로 그 약속에 따라 행하고 그에 상응하는 결과에 대해 소망할 수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 전달된 율법의 제도에 따라 세워진 구약의 제사 예식과 달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계획의 가장 온전한 형태의 성취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모세라 할지라도 결코 흉내낼 수 없는 하나님의 본심과 본성의 계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능력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광야 40년 간의 백성의 지도자요 중보자로서 성실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한계는 그들을 위해 대신 죽을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때때로 백성을 위해 죽기를 각오한 적도 있었지만 그의 죽음이 결코 그 백성의 죄를 사하는 ‘대속’의 기능을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역시 죄로 오염된 인간 본성의 한계를 안고 태어난 자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온전히 거룩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인간의 죄성의 한계를 벗어나는 방식으로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위한 완전한 대속물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일을 명하시고 보증한 분이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 또한 재림의 약속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과정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방법까지도 모두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약속하였습니다.

모세와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서 비롯된 모든 행위와 약속은 그 자체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과 그 뜻의 성취만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히 믿고 기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적 ‘최선’이 결코 하나님 편의 ‘최고’를 능가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겸손히 그 은혜를 구할줄 아는 마음이 곧 지혜이며 능력입니다.
그 믿음을 간직한 성도의 삶에 하나님은 항상 ‘더 좋은’ 것을 허락하는 분입니다.
우리들 자신을 포함하여 온갖 인간적 한계와 구실에 매어 하나님 편의 더 나은 은혜의 약속을 소홀히 하거나 물리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대가를 치를지라도 사람에게서 난 것을 갖고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은혜로 허락하시는 죄사함의 약속과 영원한 삶에 이르는 길과 기회를 살 수가 없습니다.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사람들을 위해 항상 더 나은 삶의 방편을 보장해 주십니다.
매사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에 의지하는 삶을 사십시오.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그 분 안에 정말로 인생을 더 낫게 살 수 있는 여지와 기회가 많습니다.
하나님 편의 ‘더 좋은’ 길을 항상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의 죽임을 당한 이유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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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6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히 3:14)

‘확신’이라는 말의 원어의 의미는 원래의 계약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주로 계약 당사자인 종의 입장에서 주인의 제안을 믿고 중간에 다른 식의 제안이 와도 원 주인과 맺은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의 이치를 바르게 이해한다는 뜻의 영어식 표현인 ‘understand’라는 말이 문자 그대로 항상 자신이 알고있는 사실이나 진리의 교훈 ‘아래에 서있는’ (under + stand) 행동을 가리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 자신에게는 이런저런 이유들로 인해 변화의 여지 들이 하도 많아서 때로는 우리가 한 말조차도 믿을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물이 되게 하기까지 구원의 약속을 온전히 실행하신 하나님의 생각과 그의 말씀에는 상황이나 조건에 따른 변화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가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였으면 그 말 그대로입니다.
문제는 우리들 각자가 얼마나 한번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정한 뜻을 따라 끝까지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확신이라는 말의 의미가 그런것처럼, 성도로서 우리들 자신의 삶의 자리가 항상 그의 말씀의 경계 아래 처하는 것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조금도 거짓이나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삶의 계약과 언약에 충실하며 매사를 그와의 약속 ‘아래에서’ 이해하고 결정하는 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가장 성공적인 삶을  위한 계획과 계약은 언제든지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
항상 구원얻는 진리의 말씀 ‘아래에’ 거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삶의 모든 것을 복되게 하는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의 여정에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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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막 15:24)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옷조각을 나누고자 한 로마 군인들의 행동은 사형수의 옷이 지닌 부적 효과를 믿는 미신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을 당한 사람의 흔적을 몸에 지니면 그같은 불행한 일이 자신에게 닥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는 일종의 액운을 막는 습관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행운의 여지로 삼고자 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의 발로인 셈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어차피 모두가 다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누군가는 나 대신 불행을 감당하고 그 일을 위해 희생양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이 계기가 되지않은 모든 형태의 미신이나 우상숭배의 특성이 다 이와 같습니다.
인류의 죄를 사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우리를 온전케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우리 모두의 죄와 허물을 사하시기 위해 대신하여 돌아가신 탓에 그 능력과 효과가 결코 제한적이지 않습니다.
누구든 믿는 자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완전하고 풍성한 구원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를 온전케 하는 일에 있어서 다른 어떤 것도 더 필요치 않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사실을 믿는 사람은 그분 외에 다른 어떤 희생이나 대용물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일 외에 다른 무엇을 아쉬워 하거나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 한분 만으로 정말 만족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주님 예수 그리스도 외에 여전히 자신의 관심을 빼앗거나 부족함을 느끼도록 강요하는 것이 있다면 그만큼 주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의 여지가 모자란 탓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인의 삶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대입하여 해소되지 않는 문제는 결코 없습니다. 주님의 옷을 제비뽑는 군인들처럼 다른 사람의 불행을 기뻐하거나 기회로 삼거나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 땅위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진 후에도 여전히 나의 행복과 기쁨의 몫을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단 한 사람도 영원히 불행하거나 슬퍼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우리의 죄의 속량물이 되신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누구든지 기뻐하고 행복해져야만 합니다.
정말로 믿음대로 살면 모두가 함께 행복해지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그 일의 보증 입니다.
그 풍성한 삶의 원리를 좇아 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것입니다. 샬롬!


2월 27일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2:14)

인간의 삶 속에서 가장 이해관계가 확실한 일이 바로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에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의 반열에 들게 된 일일 것입니다. 
믿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당해야만 할 죄의 형벌로서 죽음의 공포나 온갖 한계상황이 초래하는 절망과 낙심을 대신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있습니다.
그 일이 결코 현실적 대가가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사람이 임의로 만들어 놓은 생각의 변화와 같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분명한 희생의 죽음을 매개로 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일의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 효력을 누리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다만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지만, 그 은혜의 원천을 마련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죽음의 고통스러움을 허용하고 받아들이셔야만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고통은 물론, 그의 죽음을 기꺼이 허락해야만 했던 하나님 자신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성도가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삶의 방식이 결코 무분별하거나 무법해 질 수 없는 이유입니다.
삶의 어떤 여지 하나도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내 식으로,’ 혹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은혜를 알고 구하는 방법에 있어서까지 철저히 그분의 가르침과 교훈을 좇아야만 합니다.
‘목회서신’이라고 불리는 디모데 전, 후서와 디도서에 유난히도 절제와 자기관리, 또는 진실성과 성실함 등의 덕목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벗은 발을 물에 담그는만큼만 찬 물의 시원함을 맛볼 수 있듯이, 모든 믿음생활의 가치가 실제로 행한 만큼만 주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가 죽음을 맛보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므로써 인류를 위한 대속의 길을 마련 하였듯이, 성도의 삶 역시 믿음의 대가를 지불하는 일에 익숙해져야만 합니다.
저절로 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노력한만큼, 선한 일의 보상을 기대하고 행한 만큼의 인생의 상급과 열매를 누리는 법입니다.
참 믿음의 차이는 바로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 편의 확실한 의지를 인정하고 깨닫는 데에 있습니다.
자신이 남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감당하기까지 성실하게 살다 가신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삶에 대한 성실과 진심의 요구이기에 성경의 모든 요구는 지극히 당연합니다.
믿음의 원리에 따라 무슨 일에건 간에 선을 도모하는 삶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고 보상의 약속이 있습니다.
매일 매일 선하게 살것을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최고의 선함은 매사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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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막 15:24)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옷조각을 나누고자 한 로마 군인들의 행동은 사형수의 옷이 지닌 부적 효과를 믿는 미신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을 당한 사람의 흔적을 몸에 지니면 그같은 불행한 일이 자신에게 닥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는 일종의 액운을 막는 습관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행운의 여지로 삼고자 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의 발로인 셈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어차피 모두가 다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누군가는 나 대신 불행을 감당하고 그 일을 위해 희생양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이 계기가 되지않은 모든 형태의 미신이나 우상숭배의 특성이 다 이와 같습니다.
인류의 죄를 사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우리를 온전케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우리 모두의 죄와 허물을 사하시기 위해 대신하여 돌아가신 탓에 그 능력과 효과가 결코 제한적이지 않습니다.
누구든 믿는 자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완전하고 풍성한 구원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를 온전케 하는 일에 있어서 다른 어떤 것도 더 필요치 않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사실을 믿는 사람은 그분 외에 다른 어떤 희생이나 대용물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일 외에 다른 무엇을 아쉬워 하거나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 한분 만으로 정말 만족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주님 예수 그리스도 외에 여전히 자신의 관심을 빼앗거나 부족함을 느끼도록 강요하는 것이 있다면 그만큼 주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의 여지가 모자란 탓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인의 삶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대입하여 해소되지 않는 문제는 결코 없습니다. 주님의 옷을 제비뽑는 군인들처럼 다른 사람의 불행을 기뻐하거나 기회로 삼거나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 땅위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진 후에도 여전히 나의 행복과 기쁨의 몫을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단 한 사람도 영원히 불행하거나 슬퍼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우리의 죄의 속량물이 되신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누구든지 기뻐하고 행복해져야만 합니다.
정말로 믿음대로 살면 모두가 함께 행복해지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그 일의 보증 입니다.그 풍성한 삶의 원리를 좇아 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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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3일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막 14:22)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나눈 최후의 만찬, 즉 유월절 식사는 주님 자신의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메시아로서 사명감과 연합의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나눠준 떡과 포도주가 사실은 예수님 자신이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고 죽기까지 각오한 구세주로서 다짐과 헌신이었습니다. 제자들을 위해 준비한 식탁이 사실은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제공받는 식탁이었던 셈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극도의 슬픔과 고통의 현실을 마주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과 일치의 삶으로서 사명과 헌신의 마음가짐을 잃지 않았습니다. ‘축복’이라는 말이 다분히 ‘복된 말’을 내뱉는다는 뜻임을 감안할 때 대속의 죽음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어야 하는 일까지도 주님께서는 무한한 기쁨의 이유로 삼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음식이든 식사는 준비한 사람의 마음과 정성을 받아들이는 행위이기 마련입니다. 최후의 만찬석 상의 떡과 포도주를 대하는 제자들은 죽음도 가로막을 수 없는 메시아의 사명과 헌신의 다짐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인생 자체의 온갖 불안과 허무함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는 우리들 각자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항상 우리를 주님 자신의 영원한 사랑과 결심의 자리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 친히 준비한 하나님과의 영원한 결합과 일치를 이루는 데에 필요한 참 생명의 양식을 먹도록 하십니다. 그길만이 성도라 할지라도 인간 본연의 약함에서 비롯된 온갖 유형의 분리와 소외, 그로인한 불합리한 선택의 미혹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항상 주님과의 식탁 교제에 힘쓰는 삶을 사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성도들을 향한 음식이며 교제의 수단입니다. 영양소가 파괴되지 않은 유기농 식재료를 대하듯 순전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진리의 말씀이 온 몸과 마음을 살찌우는 삶을 매일 살아야 할것입니다. 샬롬!

2월 6일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막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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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0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자신의 희생적 죽음을 통하여 인류의 죄문제의 해결을 이루시고자 한 예수님의 결심과 사명은 결코 비극적이며 불행한 운명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그 반대로 주님의 다짐은 자신의 삶을 가장 보람있고 가치있게 살고자 하는 취지의 결단이며 행복 선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죽음이라는 인생 자체의 한계상황을 전제할 때 피할 수 없는 삶의 무의미함과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다른 누군가에게 끼치는 선하고 아름다운 유익을 고려하는 일 뿐입니다. 자신은 물론 다른 누군가에게 충분히 유익하고 복된 삶을 사는 것만이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인생의 허무함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대속물’이라는 말의 뜻은 종이나 노예의 처지에 있는 사람이 그 얽메인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될 수 있도록 하기위해 치르는 몸값을 가리킵니다. 고대 로마의 신분제도 하에서 타고난 종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몸값을 대신 지불해줄 자를 찾는 것 뿐이었습니다. 입양제도나 혼인 만이 유일한 법적 장치였는데, 적법한 절차를 따를 경우 거기에 수반되는 법적인 요건들, 즉 상속권이나 재산분할과 같은 문제가 있어서 결코 쉽지않은 일이었습니다. 평생의 은인과도 같은 사람을 만나야만 꿈꿀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일을 사명을 너머 그분 자신의 최고의 행복을 도모하는 심정으로 감당해 주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타고난 죄성으로 인해 불안과 공포, 두려움과 걱정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주님으로 믿는 믿음 안에서 더 이상 두려워 하는 종의 멍에를 맬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삶에 수반하는 온갖 두려움과 걱정의 원인이 되는 죽음의 한계상황을 벗어나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추구하는 자유인의 삶을 보장받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 일을 친히 무한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감당해 주신 분이 바로 온 세상의 구원자라는 사실에서 더욱 큰 즐거움을 갖게 됩니다. 우리들 역시 주님처럼 우리들 자신을 통해 다른 누군가를 유익하고 복되게 하는 길만이 인생의 참 행복이며 보람입니다. 그 일을 기쁨으로 감당할수록 우리들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가 더해지며 우리의 존귀함 또한 더하여 집니다.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힘입은 성도로서 반드시 그와 같이 대속의 삶을 사십시오. 나의 침묵과 손해, 상대적 불편함이나 박탈감을 통하여 오히려 다른 누군가를 섬기고 그의 지위와 가치를 높이는 삶을 선택하십시오.  아주 작은 실천이라도 주님처럼 대속의 취지를 내포하는 삶에는 반드시 하나님 편의 영원한 상급과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매사에 대속물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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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3일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8:31)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의 차이는 구원의 주체가 과연 누구인지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함께 예수께서 행하신 마가복음 상의 모든 구원의 역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행하신 일들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식의 동기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인류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 역시 그 주체가 다만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의 고난과 죽으심,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일이 사실은 그를 통해 보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본질이 순전히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며 친히 행하신 데에 따른 것임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의 입장에서도 사실은 그 점에 있어서의 믿음과 분별이 쉽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의 삶에 다양한 유형의 고난과 역경이 많은 사실 자체에 대하여 결코 당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능력과 판단의 여지를 너머서는 것만 같은 일이 많아질수록 그만큼 하나님께서 주도하는 삶의 여지들이 더해지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정말로 믿음대로 살고자 하는 성도의 삶의 모든 고난과 시련은 하나님 편의 구원의 여지들입니다. 자기 자신의 힘과 지혜로 해결한 일을 가리켜 구원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구원은 정말로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며 그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그 이름에 합당한 방식의 구원을 경험하는데 있어서 때때로 고난과 역경, 사람들로부터의 버리움 따위는 차라리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믿음의 초월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원래부터 하나님께 기대한 것이지 어떤 사람에게 요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의 어려운 순간마다 바로 지금이 하나님의 구원의 때라는 생각을 가지십시오. 인생의 모든 문제점의 해결을 도모하는 방법까지 주님의 생각과 같아야만 그 사람이 바로 주님의 제자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생 자체의 문제해결 방안을 삼으시기 바람니다. 그분만 우리의 참 구원자입니다. 샬롬!

1월 16일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막 6:39, 40)

마가복음의 오병이어 기적에 관한 기록은 다분히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대한 깨우침과 훈계의 목적이 강합니다. 이왕에 그리스도를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고 따르기로 하였으면 광야와 빈들과 같은 삶의 한계상황에 처해서도 그로 말미암은 삶의 궁극적인 보상과 공급의 원리를 변함없이 신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곳까지 그리스도를 좇아와서 온종일 하나님 나라의 소망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듣던 굶주린 무리들의 저녁식사를 먼저 염려하던 자들이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방법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뢰와 희망의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을 모두 돌려보내어 스스로 저녁거리를 해결하도록 하자는 식으로 제안하였습니다. 제자들 앞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시기 전 주님은 그들에게 수많은 무리들이 각각 그룹을 지어 앉도록 하는 일을 명하였습니다. 기적이 행하여질 삶의 자리를 준비하도록 한 것입니다. 굶주린 그 무리들이 결코 이 땅 위에서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사람들이 아니라 광야 한 복판에서 하나님 나라의 연회를 맛볼 자이며 그 귀한 자리에 참석할 자들로서 자의식과 마음가짐의 회복을 촉구한 것입니다. 정말로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에 대한 완전한 신뢰와 기대감이 없이는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가짐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가짐까지도 바르게 유지시켜야 하는 책임과 의무감 때문입니다. 성도가 항상 주님을 향한 소망과 기대감이 가득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주님은 광야 한 복판에서도 능히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위해 풍성한 식탁을 준비하실 수 있습니다. 광야를 배회하면서도 항상 연회 자리에 참석하는 자기 자신을 꿈꿀 수 있어야 합니다. 여행가방을 싸면서 의례히 식구들 몫의 식사도구를 가장 먼저 챙기는 어머니의 마음씨를 배워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세상은 온통 즐거운 식사와 연회 자리입니다. 그 풍성한 마음가짐의 여유 속에 바로 하나님 나라의 즐거움과 능력이 임하는 법입니다. 괴롭기만 한 현실에 치우치지 말고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풍성한 삶의 변화를 꿈꾸십시오. 떼를 지어 자리를 잡고 앉은 예수님을 따르던 광야의 무리와 같이, 그리고 그 자리를 정돈하던 제자들처럼 이제 곧 시작될 광야 한 복판의 연회를 꿈꾸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기대하십시오. 스스로에게 그러한 식의 마음의 여유를 허락지않는 것이 바로 죄이며 불신앙입니다. 그 반대로 늘 바라고 기대하는만큼 누리는 것이 바로 의로움이며 신앙입니다. 인생의 광야에서 불신앙의 사람이 되지말고 꼭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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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9일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막4:8)

씨를 뿌리는 자의 비유의 핵심 교훈은 복음의 생명력입니다. 생명이 있는 씨앗은 반드시 결실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옥토 외의 앞의 세 가지 마음 밭, 즉 길가와 돌짝밭, 그리고 가시덤블과 같은 마음밭은 모두 생명 자체의 결실을 어렵게 만드는 삶의 다양한 여지들을 포함합니다. 네 종류의 밭 가운데 세 곳에서의 노력이 모두 무위로 끝났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포기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마지막 옥토에서의 결실이 최소한 삼십 배, 육십 배, 혹은 백 배의 결실을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다분히 하나님 편의 능력과 성실함, 그리고 그에 대한 인간적 인내와 수고의 필연성을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 스스로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복음의 씨는 반드시 그 자체의 풍성한 속성대로 열매맺게 될 것입니다. 다만 뿌리는 씨앗이 참 생명을 내포한 것인지의 여부만큼은 분명해야 할것입니다. 모든 인내와 수고가 참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하고 그의 확실한 악속의 말씀의 토대 위에 선 것인가의 여부 말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죽은 씨앗을 살려낼 수는 없습니다. 정말로 우리들 자신과 서로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하고 약속하며, 함께 모든 기대와 소원을 나누는 식의 삶을 살아야 할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반드시 복음의 약속 위에 견고히 서고자 하는 삶을 사십시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개인적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십시오. 교리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삶의 실질적인 면에서 그가 과연 생명의 씨와 같이 작용하는 삶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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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일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막 1:22)

마가복음 상의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은 부르심과 가르침, 그리고 치유와 회복 등 세 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가 갈릴리 바다의 어부들이었던 제자들을 부르사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한것처럼, 성도는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이롭게 하는 구원의 복음을 위해 살아갈 자들로 세우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를 위해 성도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능력의 복음을 잘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 유대인의 회당의 흔한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달리 권위가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교훈, 즉 복음을 책에 기록된 내용으로서가 아니라 삶으로 실행하여 열매를 맺어야 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 말씀의 권위는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실행의지를 북돋는 능력과 보상의 말씀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그점이 분명할 때 그 교훈을 따라 사는 자의 삶에 귀신이 쫓겨나고 몸과 마음의 모든 괴로운 질병이 치료되는 회복의 열매는 당연한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당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전하는 교훈이 권위있는 자의 그것과 같아서 놀랐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다름아닌 그의 말씀에 대한 복종과 신뢰의 의무감이 일깨워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깨달음에 대하여 각각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 가에 따라 삶의 치유와 회복의 여부가 판가름 나는 법입니다. 마가복음 상의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활동은 그가 전하는 복음을 권세있는 하나님 나라의 교훈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삶의 속성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인들에 의한 무자비한 핍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결국 로마를 기독교화하는 일에 성공한 초대 기독교도들과 같이 온갖 괴로운 현실 속에서도 그 마음과 삶의 방향이 혼잡스럽거나 자포자기하지않는 능력과 질서, 그리고 조화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유일한 한 가지가 바로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의 권세를 경험하고 그것에 의지하여 삶을 바르게 세우는 일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것의 다스림을 받는 삶을 사십시오. 정말로 신앙인의 능력은 그가 믿고 받아들이며 실행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큰 권위를 갖는 지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권위있는 삶, 참 권세자다운 삶을 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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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7일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주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그들에게 내리지 아니하니라” (대하 32:26)

여간해서는 믿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비해 하나님의 보상과 보응은 항상 일관되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온 유다 나라의 종교개혁을 시도하고, 앗수르의 우세한 군사력에 맞서 선지자와 함께 기도로 대승을 이루고, 나라 전역에 각종 수리 사업을 시행하여 예루살렘 성에 지하 수문들을 둘 정도로 유다 나라의 기간 산업을 확충 발전시킨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바벨론 왕의 모략에 빠져 여호와의 성전을 마치 나라의 장식품인양 이방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기 위한 도구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교만에 빠지자 그만 바벨론의 덫에 빠지는 식의 위험을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과오를 지적하는 선지자의 충고 앞에서 이내 곧 뉘우치고 회개하자 바벨론에 의한 함락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행운을 얻습니다. 심지어 왕의 재산과 명성이 극에 달하고, 온 백성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경과 애도를 받고 세상을 떠나는 ‘존귀한 죽음’의 은혜를 얻기까지 합니다.

불완전한 삶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한 종말의 복을 얻게된 것입니다. 도저히 씻을 수 없는 것만 같은 우리들 각자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용기를 내어 늦게라도 삶의 올바른 도리인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의 동기와 삶의 실천에 대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풍성한 보상의 원리를 따라 갚으시는 분입니다. 구원과 영생이 사실은 하나님 편의 거룩한 보상심리의 열매입니다. 무엇이든 하나님을 대해서만큼은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확고한 보상심리를 간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갈증을 느끼는 어린 아이 하나에게 시원한 물 한컵 제공한 행위에 대해서까지 영원한 나라에서의 기억과 보상을 약속한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죄를 이기는 것도, 영원한 나라의 구원을 보장받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신실한 보상의 약속을 믿는 마음의 표현일 뿐입니다.

히스기야 왕의 위대함의 원천도 사실은 바른 것을 향한 자신의 열심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신뢰한 데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진실한 믿음의 동기에는 반드시 하나님 편의 보상이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 자신의 풍성한 은혜의 원리에 따라서 말입니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그의 풍성한 보상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 따라서 바르고 겸손하게 실천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반드시 갚으실겁니다. 샬롬! 

12월 24일

“아직도 어렸을 때 곧 왕위에 있은 지 팔 년에 그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고 제십이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하게 하여 그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제거하여 버리매” (대하 34:3)

여덟 살에 왕위에 즉위한 요시야 왕이 그의 나이 열 여섯에 이스라엘 온 땅에 미치는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첫번째로 소중히 여기며 실행한 것이 바로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이해, 즉 올바른 신관을 정립하는 일이었습니다. 신앙인의 삶의 대부분의 문제가 각각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이해에 달린 경우일 때가 많습니다. 요시야가 ‘다윗의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은 그 자신의 하나님에 관한 이해의 표준을 정하는 데 있어서 다윗 왕이 구하였던 하나님에 관한 이해를 근거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삼하 7:12-16의 소위 ‘다윗의 언약’에 관한 말씀에 다윗 자신의 하나님에 관한 이해가 잘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세 가지, 즉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그리고 영원한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새의 말째 아들로 태어난 자신을 이스라엘의 목자인 왕으로 삼아주신 여호와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며, 다윗이 범한 씻을 수 없는 죄에도 불구하고 그의 왕위를 영원히 보전해 줄것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 그리고 자신이 말씀한 것을 끝까지 이행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한 것입니다. 실제로 요시야의 생애 전부가 이러한 삼중의 하나님이 관한 이해를 토대로 합니다. 매사에 삶의 근본이 바르게 변하지 않고서는 뭔가 행위에 있어서 바람직한 변화를 기대하기가 여간 어렵습니다. 신앙인의 삶 속에서 삶의 근본이란 다름아닌 저마다의 하나님에 관한 이해를 뜻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이해가 두려움으로 점철된 경우 삶의 방식에 있어서 또한 온통 두려움과 염려, 그리고 공포의 성향을 띠기 마련입니다. 매사에 근본을 올바르게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에 관한 이해의 틀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확립하시기 바랍니다. 여덟 살 나이에 왕위에 오른 요시야가 그의 나이 열 여섯에 다윗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기위해 간절히 찾은 것은 그야말로 두려움없는 삶, 즉 하나님 자신의 은혜와 용서, 그리고 그의 언약의 성실함에 기대어 삶을 살고자 하는 갈망과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성도가 하나님에 관한 이해의 방식을 바꾸지 않고서는 삶의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받고자 한다면, 요시야처럼 다윗의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여겨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함 역시 그가 찾고 또 찾은 하나님의 위대함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의 하나님, 요시야의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 자신의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어야 할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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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일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주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그들에게 내리지 아니하니라” (대하 32:26)

여간해서는 믿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비해 하나님의 보상과 보응은 항상 일관되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온 유다 나라의 종교개혁을 시도하고, 앗수르의 우세한 군사력에 맞서 선지자와 함께 기도로 대승을 이루고, 나라 전역에 각종 수리 사업을 시행하여 예루살렘 성에 지하 수문들을 둘 정도로 유다 나라의 기간 산업을 확충 발전시킨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바벨론 왕의 모략에 빠져 여호와의 성전을 마치 나라의 장식품인양 이방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기 위한 도구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교만에 빠지자 그만 바벨론의 덫에 빠지는 식의 위험을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과오를 지적하는 선지자의 충고 앞에서 이내 곧 뉘우치고 회개하자 바벨론에 의한 함락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행운을 얻습니다. 심지어 왕의 재산과 명성이 극에 달하고, 온 백성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경과 애도를 받고 세상을 떠나는 ‘존귀한 죽음’의 은혜를 얻기까지 합니다.

불완전한 삶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한 종말의 복을 얻게된 것입니다. 도저히 씻을 수 없는 것만 같은 우리들 각자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용기를 내어 늦게라도 삶의 올바른 도리인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고자 하는 마음의 동기와 삶의 실천에 대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풍성한 보상의 원리를 따라 갚으시는 분입니다. 구원과 영생이 사실은 하나님 편의 거룩한 보상심리의 열매입니다. 무엇이든 하나님을 대해서만큼은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확고한 보상심리를 간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갈증을 느끼는 어린 아이 하나에게 시원한 물 한컵 제공한 행위에 대해서까지 영원한 나라에서의 기억과 보상을 약속한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죄를 이기는 것도, 영원한 나라의 구원을 보장받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신실한 보상의 약속을 믿는 마음의 표현일 뿐입니다. 히스기야 왕의 위대함의 원천도 사실은 바른 것을 향한 자신의 열심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신뢰한 데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진실한 믿음의 동기에는 반드시 하나님 편의 보상이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 자신의 풍성한 은혜의 원리에 따라서 말입니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그의 풍성한 보상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 따라서 바르고 겸손하게 실천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반드시 갚으실겁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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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3일

“이에 수소를 잡으매 제사장들이 그 피를 받아 제단에 뿌리고 또 숫양들을 잡으매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또 어린 양들을 잡으매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대하 29:22)

히스기야 왕의 명령에 따라 제사장들이 온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제사의 제물로 소와 양의 피를 제단에 뿌린 행위는 성전의 제단을 정결하게 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봉헌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목적으로 지어진 성전의 제단이 지극히 거룩하여 백성이 진심으로 드리는 제사와 제물이 원래의 의도대로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지고 하나님께서 또한 기꺼이 제물을 받으심으로써 온 백성의 삶이 편안해질 것이라고 믿은 제사중심적 판단이 작용한 것입니다.

제사와 제물을 매개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추구한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본질적으로 모든 인간의 삶의 참된 평안과 복이 절대자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와 소통에 달려있다는 사실만큼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이치를 거슬려 행하는 인간의 삶에 참 평안이 있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도모하는 모든 인간의 소망의 원천입니다. 추호라도 어긋나거나 바르지 못한 하나님과의 교제의 부족함과 불완전함을 온전케 하기위해 친히 모든 인류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피가 의미하는 생명의 존엄성과 거룩함이 순전히 그분의 공로에 의해 마련되었습니다. 그의 대속의 공로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의 기쁨을 얻게되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자로서 삶의 존엄성과 가치의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국가의 운명을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의 제단의 거룩함과 동일시 한 히스기야 왕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나라와 개인의 삶보다 능력있고 가치있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제단에 바쳐진 사람들로서 귀하디 귀한 자기인식을 갖고 생활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의 피의 공로를 힘입은 성도의 삶보다 강한 것이 이 세상에 결코 없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의 이름의 의미도 ‘여호와께서 강하게 하신다’입니다. 매일매일 ‘히스기야’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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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8일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 (대하 21:7)

집안에 불빛이 가득한 이유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이 많아 저녁 늦게까지 해야 할일이 많다는 뜻이며 시간적으로도 늦은 밤까지 일을 할만큼 충분히 여유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일찍 불이 꺼지는 집은 그만큼 식구들이 많지 않거나 또한 온 식구들이 나서서 해야 할 일조차  별로 많지않기 때문입니다. 식구들이 전혀 없는 탓에 불을 켜둘 필요조차 없는 것이지요.  남왕국 유다의 여러 왕들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집’인 유다의 등불을 계속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편의 은혜의 약속과 배려가 결코 무효화되지 않음을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왕국 유다의 입장에서 백성의 수나 영토의 범위가 훨씬 더 많은 북 이스라엘 왕조와의 연합만 달성되면 나라의 생존을 위한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마음의 유혹이 항상 있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을 시작으로 북 이스라엘과의 동맹을 위한 목적으로 남북 왕조 간의 혼인을 통한 연합을 시도하였음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유다의 형편은 더욱 악화되고 맙니다. 개인이나 국가 모두 한 집안을 일으키고 보전해 가는 일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의 돌보심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다윗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유다 나라에 등불을 계속 줄것이라고 말씀한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그 나라의 등불이 되어 마치 집을 돌보듯 나라를 돌보아 주시리라는 결심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켜둔 희망과 감사, 그리고 믿음과 사명의 등불을 아무도 임의로 끌 수 없습니다. 그러한 차원의 하나님 나라, 또는 하나님의 집을 가꾸는 성도의 책임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온갖 이유로 가정의 가치와 의미를 허무는 세태 속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집안 등불을 제공하신다는 성경의 약속은 자신의 집을 세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과도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하나님께서 친히 가정의 등불이 되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들 자신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의 자녀들의 집이 흩어지고 깨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몇 번 씩이라도 다시금 세우고자 하는 의지와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은 기어이 성도의 가정과 식구들을 세워주시는 분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편의 구원의 언약 위에서 든든하고 풍성히 세워지는 가정의 복과 희망을 내 것으로 붙잡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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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1일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고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더라” (대하 18:1)

남왕국 유다의 네번째 왕인 여호사밧과 북왕국 이스라엘의 일곱번째 왕인 아합 가문의 혼인은 두 나라 간의 연합을 통하여 서로의 번영을 도모하는 정치적 동기의 연합으로서, 고대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라 간의 동맹관계의 표시입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뜻을 자신의 삶의 ‘판단’ 기준으로 삼으면서 유다의 종교개혁에 힘써온 여호사밧의 처지에서 볼 때 이방 종교의 도입을 무릅쓰면서까지 순전히 다른 나라와의 연합을 수단으로 삼으면서 국력을 도모하고자 한 북왕국의 아합왕조와의 혼인관계는 남왕국 유다의 정체성과 신앙적 순수함의 가치를 보전해 온 그간의 모든 노고를 허사로 만드는 행동이었습니다.

아합 왕의 아내인 이세벨은 시돈 왕의 딸로서, 시돈왕은 아스다롯 신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의 행동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의 연합을 매개로 하여 국가의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유다 나라의 왕으로서 당연한 의무와 책임감을 저버린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이념적 가치관을 내세워도 성도가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그분과 맺은 언약관계의 일차적 의무감을 저버리는 것은 결코 영원한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여호사밧은 순전히 아합과 사돈 지간이라는 이유로 원치않는 아람 족속과의 전쟁에 참여해야 했고 그 일로 인해 선지자의  책망과 함께 사돈인 아합과 이세벨 가문의 처참한 몰락을 지켜봐야 했으며, 그 가문의 사위가 된 아들 여호람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비극적 운명의 조력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대개의 경우 성도가 인간관계의 실패를 경험하는 주된 이유는 그것만을 전부인것처럼 여기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성 자체의 한계를 직시하고 모든 관계의 궁극적 가치와 유익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치의 여부에서 찾고자 하는 ‘판단’ 기준이 필요합니다. 여호사밧의 경우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판단을 추구하는 데에 성공하였는데 그만 관계성의 차원에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막 9:49에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한 의미 그대로입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의 올바른 관계의 유익을 위해서 항상 소금의 부패 방지 능력과도 같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근간으로 하는 간섭과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성도에게는 인간관계의 성공도 결국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끝까지 하나님 편의 판단을 궁극적 기준으로 삼는 식으로 교제하며 사랑할 수 있어야 할것입니다. 혼인이 의미하는 영원한 언약관계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그 언약의 가치를 훼손하는 모든 유형의 인간관계를 조심하고 또 조심하십시오. 샬롬!

11월 14일

“유다 사람이 뒤를 돌아보고 자기 앞 뒤의 적병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부니라” (대하 13:14)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제사장이 부는 나팔소리의 용도는 대략 세 가지입니다. 광야에서 진영의 이동을 알리는 신호이거나,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표시, 또는 전 국가적인 차원의 각종 절기의 때를 알리는 소리 등입니다. 그 세 가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하나님의 전적인 간섭과 보호하심에 의해 이루어지는 ‘예식’과 같은 것이라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삶의 자리를 이동하는 것이나, 원수들의 공격에 맞서 전쟁을 치르는 일, 그리고 온 백성이 한데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이 모두 하나님의 허락하심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무감과 염원의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의 새로운 개척도,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두려운 대적을 물리치는 일도, 뭔가 초월적인 차원의 삶의 기쁨과 행복도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의 수하에서 군대장관을 지낸 여로보암이 이끄는 팔십만에 달하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군대를 남왕국 유다의 나이어린 아비야 왕의 사십만의 병력으로 맞서는 일은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승리할 수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상황에서 백성이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고 제사장들이 나팔을 분 행위는 그 때가 바로 자신들의 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고 간섭하여 전쟁을 치르는 때라는 믿음과 각오, 그리고 헌신의 표시였음이 분명합니다.

그 나팔소리를 하나님께서직접 들으시고 그들의 처지를 기억하시겠노라는 (민 10:14)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른 행위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 유다 백성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고 그들을 괴롭게 하던 여로보암과 그의 군대는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이 복병에 둘러쌓인 유다 백성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단 한가지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이었던 것처럼, 삶의 한계상황에서 그분께 자신의 사정을 알리는 일을 주저하지 마십시오.

소위 삶의 한계상황에서의 반응이 우리의 믿음이며 신념입니다. 전쟁까지도 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시작하라는 것은 그것까지도 다만 하나님께 속한 일이며 그가 능히 이길 수 있도록 하신다는 약속의 표현입니다. 가장 약하고 혼돈스러운 삶의 처지에서 가장 강해지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것이 믿음이며, 그 믿음을 가능케 하는 것이 성도의 부르짖음, 그 원초적 신뢰의 표현입니다.

매사에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식과도 같이 그분을 더욱 더 신뢰하고 갈망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가 우리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 이유와 조건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의 귀에 들리고 기억되도록 하십시오. 범사에 기도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샬롬!

11월 7일


“솔로몬의 병거 메는 말의 외양간은 사천이요 마병은 만 이천 명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 (대하 9:25)

평화의 왕이 되어야 할 솔로몬 왕이 병거와 마병을 많이 두었다는 것은 그가 그의 아버지 다윗과 같은 믿음의 순수함의 자리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합니디. 일찌기 모세의 법을 통하여 누구든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자 하는 자는 고대 사회의 전쟁의 수단인 말을 많이 둠으로써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말 것을 요구한 하나님의 뜻을 위반한 것입니다.

결국 솔로몬의 온갖 물질적 부요함과 지혜, 그리고 명성이 그의 통치 기간인 40년으로  끝나고맙니다. 실제로 그의 사후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즉위한지 얼마 되지않아 이스라엘이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갈리워 분열왕국 시대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 후로 이스라엘 왕조의 모든 영화는 사라지고 각각 생존에 급급한 상황을 맞고 결국 두 왕국 모두 이방 나라들에 의해 파멸되는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솔로몬 뿐만 아니라 이 땅 위의 모든 나라와 개인의 영화가 고작 40년, 한 세대에 그치고 마는 현실적 교훈을 통하여 인생의 한정된 시간 동안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깨우침을 일깨워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처럼 병거와 마병을 준비하면 결국 전쟁을 부르는 삶을 살고 그러한 운명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격이 되고맙니다. 주님 예수그리스도처럼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당하면서도 사랑과 용서, 그리고 평화의 열매를 추구하는 삶을 삶으로써 생명과 평안, 그리고 온갖 신령한 것의 가치를 전파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 평화를 위해 부름받은 자로서 삶의 소임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1월 1일

“내가 또 그 곳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넣은 궤를 두었노라 하니라” (대하 6:11)

솔로몬이 지은 성전의 궁극적인 용도와 가치는 그가 친히 그곳에 안치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궤, 즉 십계명이 새겨진 모세의 두 돌판이 들어있는 상자를 모셔 둔 사실에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한 장소인 성전의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바로 그의 언약을 영원히 지키고 보전하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신앙생활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하나님과의 약속의 의미를 빼고나면 남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구원의 모든 조건과 이유가 전적으로 하나님 편의 약속과 그의 실행 의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그의 소유된 자들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였고, 부르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여 하나님 자신이 또한 영광을 받고자 한 그의 의도와 계획을 그가 약속한 대로 끝까지 믿고 나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한 순간 아무리 그럴듯하여도 결국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믿고 따라야 할 것은 하나님 편의 영원한 약속 뿐입니다.

대등한 차원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말씀한 그대로 이루실 줄을 믿고 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의 약속을 믿고 행할 때 또한 그의 모든 말이 성도의 삶 속에서 영원한 언약의 기초가 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애초에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이동식 성전인 성막 안의 법궤에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기적의 지팡이, 그리고 광야에서 먹던 하늘양식인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들어있던 것이 솔로몬의 성전에는  다만 여호와의 언약이 새겨진 두 돌판만 그 안에 담고 그것을 여호와의 ‘언약궤’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모든 가시적인 삶의 조건이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워도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사는 자들의 삶에는 항상 그의 영광이 가득하여 반드시 그가 말씀한 그대로 삶의 변화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모시고 살되 반드시 그의 언약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여 사십시오. 그의 언약의 주인공이 되어서 그가 궁극적으로 이룩하시는 역사의 선한 섭리인 구원의 유익을 모두 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10월 24일

“그러나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시 106:13)

출애굽 이후 광야 사십 년 간의 여정에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의 잦은 실패의 원인은 매사에 자기위주의 생각에 젖은 나머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은혜의 속성을 망각하고,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섣부른 이해와 판단을 일삼은 탓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의 관점에서 그 백성을 위하여 ‘천대에’ 걸쳐 유익하고 복된 것을 말씀하는데 비해 그들은 당장의 욕구를 해소할 수 있어야만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의 삶 속에서 구체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되기까지 반드시 오랜 기다림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말씀이 진리의 특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진리의 유익을 믿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 우리의 인간성 자체에 포기하고 부정해야 할 여지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용기가 깨끗해야만 거기에 담는 내용물의 순수함이 보전되듯 우리의 현실주의적이며 본능적이기만 마음가짐이 ‘영원히’이로운 것들을 더 좋아하는 형태로 바뀔 필요성이 있습니다.

정말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믿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삶의 기쁨과 유익을 보장합니다. 예수께서 친히 자신을 가리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는데, 정말이지 그분처럼 살고 죽을 수만 있다면 인생의 참된 길에서 가장 바른 진리와 생명의 유익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참고 기다리는 마음가짐의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운동선수가 기록 경신을 위해 나타내 보이는 몸짓은 한 순간이지만 그 한번의 동작을 위해 무수한 기간 동안의 준비와 연습을 감당해내는 것과 같습니다.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진리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의지에 온전히 작용하여 영원한 삶의 가치를 일구어 내는 것이 될 수 있도록 한번 더 참고 더욱 귀담아 들어서 마음에 새기는 식의 삶을 살아야 할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교훈을 찾기위해 많이 기다리고 포기하는 시간이 절대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 일일이 영원한 삶의 기초를 닦는 과정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간절히 사모하여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샬롬!

10월 19일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시 103:4)

여호와 하나님의 크고 광대하심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이해의 영역이 바로 그의 용서, 즉 인간의 죄와 허물을 사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성품에 대한 믿음에 있습니다. 죄가 강요하는 어떠한 마음의 책망이나 두려움, 그리고 유혹의 여지보다 크고 강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용서의 마음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다윗 왕조의 패망과 함께 초래된 바벨론 포로기를 겪으면서 경험한 전 민족적인 차원의 상실감과 부끄러움, 무엇보다 백성 개개인이 신적 형벌의 당사자라는 생각으로 인한 죄책감을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그들 자신이 경험한 어떠한 죄의 무게보다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에서 비롯된 죄사함의 의지가

훨씬 더 크고 위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백성의 파멸의 자리에까지 함께 가셔서 모든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건져내시겠다는 뜻이며,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신다’는 말은 그의 영원한 사랑과 긍휼의 본심 안에서 우리들 각자를 왕처럼 존귀한 자고 여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긍휼’이라는 히브리 말이 여인의 자궁을 뜻합니다.

자기 태에서 난 자식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이듯, 죄와 허물이 초래하는 인간성의 폐단과 같은 것이 하나님께는 결코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 마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며, 그렇게 하기를 주저하고 비난하는 것이 바로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죄의 두려움과 형벌의 크기보다 크신 분입니다.

그의 사랑과 구원에 관한 모든 약속은 죄성이 초래하는 인간의 어떠한 불편한 감정보다 더 크고 위력이 있습니다. 크신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의 삶을 사십시오. 그의 인자와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들여 왕처럼 귀하고 거룩하여 죄와 상관없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그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충분히 그렇게 할수 있습니다. 샬롬!

10월 17일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시 104:24)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신 자신의 본성상 끊임없이 일하시는 분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과 같은 창조행위는 태초에 있었던 일회적인 행동이지만, 피조물을 돌보고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다른 일들을 하나님은 끊임없이 지속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창조의 아름다움과 선함, 그리고 유익함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데에 있습니다. ‘주께서 하신 일’이 많다는 시편의 고백은 만물의 이치에 내재된 창조주 하나님의 일의 속성, 즉 아름다움과 선함의 여지와 가

능성이 많다는 뜻입니다. 똑같이 괴롭고 힘든 노역을 감당하면서도 그 일이 주는 즐거움과 보람, 그리고 유익을 생각하며 일 자체로 인한 버거운 마음을 능히 떨쳐버릴 수 있는가 하면, 일로 인한 괴로움과의 동일시를 참아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노동의 ‘즐거움’이라는 식의 단순한 생각 외에 창조주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는 세상의 모든 이치의 궁극적 선함과 유익을 믿는 믿음의 마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성경의 많은 말씀들이 ‘영광스러워’ 보이는 것들 만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자체의 영광의 ‘원리’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는 그의 자녀들을 그가 반드시 복되고 영광스럽게 하실 것임을 믿는 믿음의 마음이 작용한 탓입니다. 불의한 인간의 죄와 허물을 기어이 사하실 것을 약속한 성경의 모든 약속도 마찬가지 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창조’의 원리를 믿는 믿음의 결과인 것이 사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을 반드시 그가 친히 회복하고  구원하사 온전케 하십니다.

창조와 종말이 사실은 하나입니다.  혹 구원의 기쁨과 감사의 이유가 더 이상 자신에게 남아있지 않는것 같은 현실 속에서도 그러한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원이  창조주께 속해 있으며, 그 모든 것의 보존과 유지를 위한 그의 모든 일과 계획의 선함을 끝까지 믿으십시오. 자기 태에서 난 자식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부모가 없듯이, 창조주의 선한 간섭이 없는 인생은 결코 없습니다. 우리는 다 그의 ‘지으신 것들’입니다. 그가 마침내 아름답고 복되게 할것입니다. 샬롬!

10월 10일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시 98:3)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선물과 관련하여 성도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구원의 방법과 목적이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식’의 구원이 아니라 애초부터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른 구원의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그의 피조물에 대한 긍휼과 진실한 사랑의 원리가 아니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식의 죄사함과 관계의 회복을 이룩하는 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부모 자녀 사이의 천륜에 의해 맺어진 관계성 속에서나 있을법한 일들이 단지 믿음을 매개로 하여 하나님과 그의 자녀

된 성도들의 삶 속에 무수히 발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주님으로 믿는 믿음의 당사자가 아니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사랑의 신비를 경험하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구원의 능력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구하는 모든 소원과 바램이 철저히 그분 위주의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최소한 내 나름대로의 조건적이며 공로 위주의 판단에서 벗어나야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의미를 알고 그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완전하심, 그리고 그의 신실하심을 믿는만큼 우리의 구원이 완전해지고 변함없는 것이 됩니다.

독생자까지도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물이 되게할만큼 온 세상 만민의 구원을 염원하신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며 우리 모두를 향한 그의 마음입니다. 그의 인자하심은 변함없는 영원한 사랑을 의미하며, 그의 성실하심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그분 나름의 확증을 가리킵니다. 우리를 향한 그의 선택적 사랑에 대해 결코 후회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실함입니다.

그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기억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가치있게 활용하고 잘 간직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것인 바에야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그 효력과 값어치를 무효화하거나 능가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매사에 안심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더욱 보람있고 가치있게 사용하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샬롬!

10월 3일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시 92:12)

시편에서 종려나무와 백항목의 이미지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성을 기반으로 하지않는 악인의 삶을 풀과 같은 것으로 비유한 말씀과의 대조를 위한 것입니다. 한 순간에 자라고 이내 곧 지고마는 풀의 생애 주기와 종려나무 또는 백항목의 주기는 전혀 다릅니다. 수명 자체가 일년생 혹은 그 이하를 주기로 하는 풀과 달리

종려나무의 수명은 대략 200년, 백향목은 최소 백년의 성장기를 지나면서 향을 발휘합니다. 그 두 종류의 나무가 모두 구약 시대의 성막과 성전,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의 도구와 건물 재료들로 사용된 것이 괜한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영원한 가치를 위한 건축 자료이며 영원히 귀하고 빛날 것을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참되고 영원한 것의 가치를 위한 믿음의 수고를 결코 아까워하거나 평가절하하지 마십시오. 최고의 값어치를 위한 것인만큼 얼른 바라는 식의 성과가 없다는 사실만으로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을 바라는 성도의 삷의 스케일이 ‘세상의 것’만을 위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그것과 같을 수 없습니다. 인내하면서 한번 제대로 심기우기만 하면 200년 혹은 100년을 지속하는 열매와 향을 내는 종려나무와 백항목과 같은 삶을 사십시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아는 것처럼, 오랜 세월의 인고의 과정을 지난 열매와 향은 본인 자신보다다른 사람들이 먼저 알아보는 법입니다. 여호와의 성전 그 뜰 안에 심긴 백향목처럼 ‘백년’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내내  참 믿음과 소망의 향기를 발휘하는 성도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샬롬!

9월 26일

“이에 다윗 왕이 일어서서 이르되 나의 형제들, 나의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나는 여호와의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판을 봉안할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어서 건축할 재료를 준비하였으나” (대상 28:2)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켜 “우리 하나님의 발판을 봉안할”곳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본래 유목민 생활을 위주로 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삶 속에서 그들이 섬기던 여호와 하나님은 항상 그 백성과 함께 거처를 같이 하시는 분입니다. 광야의 이동식 장막성전에 거하시면서 그 백성이 가는 곳 어디든지 동행하시며 친히 그들의 수호신이 되어주기를 기뻐하신 분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왕권의 번창과 더불어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 취지로 이스라엘 민족의 신인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크고 화려하게 짓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 자신이 밝힌 것처럼, 성전은 하나님 자신의 거처, 즉 그의 발판과 같은 곳입니다. 사막의 모래바람을 지나면서 흙묻은 발의 신을 벗고 잠시라도 편안한 쉼을 누리고자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자신의 발판처럼 여기는 이유는 결국 그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의 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안식하는만큼 그 백성의 삶에도 쉼과 평안이 있기를 바란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안식처인 성전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그를 믿고 섬기는 성도의 삶에 평안이 없다면 모순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솔로몬에 대한 다윗의 당부의 내용이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대상 28:8)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꿈꾼 성전신앙의 본질이 결국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의 평안이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발판, 즉 발을 얹는 곳으로 여기는 법궤의 내용물이 다름아닌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과 만나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입니다. 모두가 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신뢰의 의미를 일깨우는 것들입니다. 솔로몬 성전이 지어진 이후에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했을 때 그 귀하고 화려한 성전 건물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성도의 삶에 안식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복종에서 기인합니다. 모든 생각과 감정이 그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기대감으로 채워지도록 하십시오. 주님께서 그의 영으로 친히 내주하시는 우리들 각자가 바로 무형의 성전입니다. 우리의 삶과 생각 속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평안이 있을 때 비로소 주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때마다 일마다 평안을 주실겁니다. 평안을 뜻하는 샬롬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솔로몬의 이름이 사실은 우리 모두의 이름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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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8일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대상 22:9)

성경은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의 전을 세울 마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닌 그의 아들 솔로몬이 그 일을 담당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가 다윗 자신의 손으로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의 기본 취지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와 일치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성도의 삶에 더 이상 피흘림이 의미하는 복수와 원한의 여지가 없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전의 주된 기능인 제사 예식의 조건이 바로 피흘림의 제사, 즉 희생의 제물로 인한 인간의 죄의 용서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피흘림의 고통과 보응을 담당할 터이니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의 삶에 다시는 그로인한 고통과 아픔이 없기를 바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죽게하는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 역시 우리들 각자의 삶이 강요하는 온갖 폭력과 보응의 방식을 벗어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평화의 아들 솔로몬 대의 번영을 위해 친히 온갖 이방 부족들과의 싸움을 담당하였던 그의 아비 다윗의 심정으로 주님은 믿는 우리에게 평화의 선물을 주시고자 하는 분입니다.   독생자의 죽으심 만으로 충분합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약속 안에서 끊지못할 미움과 원한의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의 언약 안에서 모든 삶의 폭력성을 벗어 버리십시오. 그가 친히 우리의 모든 싸움을 대신해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위해 대신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의 삶에 있어서 싸움은 그의 몫이며, 사랑과 이해, 그리고 용서와 평화는 우리의 몫입니다. 성도의 그 거룩한 이기심을 주님께서 친히 기뻐하십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 분 안에서 평화의 능력과 기쁨을 얻으십시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손으로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거처, 성전을 짓는 일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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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2일

“너는 힘을 내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힘을 내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대상 19:13)

구약성경에 언급된 이스라엘 나라와 이방 민족들과의 전쟁에 관한 기록은 인간의 삶 자체의 피할 수 없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묘사합니다.     
죄성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지배욕과 독점적 소유를 향한 갈망이 없다면 폭력을 정당화하는 전쟁 또한 없겠지만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의 본성상 보다 많은 것을 독점하고픈 마음의 유혹을 떨칠 수가 없어서 필경 전쟁이 삶의 대안처럼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비록 인간의 죄성이 빚어낸 필연적 선택이긴 하지만 그 전쟁의 방식과 목적만큼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도록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기준 역시 과연 그 전쟁이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며 친히 함께 하는 것인지의 여부입니다.     
다분히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적 욕심이나 복수를 위한 앙갚음 식의 싸움을 하나님께서 주도하실 리 없습니다.     
 도전이 되었건 응전이 되었건 간에 성도의 싸움은 하나님 편의 거룩한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감춰진 내면의 동기가 하나님 자신의 선함을 반영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정말로 선한 일을 위한 의롭고 진실한 싸움만이 성도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싸움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지극히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그를 의지하는 자의 삶에 가장 참된 승리의 기쁨을 안겨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않는 모든 마음의 동기로부터 벗어나는 거룩한 내면의 투쟁을 경험하십시오.       
성도의 내면에 참된 승리가 확립되는 순간 그의 인생의 모든 싸움에서 비로소 최종 승리자가 되는 법입니다.   
원수는 언제든 내 안에 있습니다.   
자신을 이기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이며, 그가 싸우는 모든 싸움은 항상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전장에서 매일매일 승리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개인적 구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이유입니다.     
그의 대속의 공로를 믿는 모든 사람은 삶의 전쟁에서 반드시 이기게끔 되어 있습니다. 샬롬!                                                                                                                                                                                                                                                           

9월 5일

  “그 때에 너희 사람 수가 적어서 보잘것없으며 그 땅에 객이 되어 이 민족에게서 저 민족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백성에게로 유랑하였도다” (대상 16:19, 2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이스라엘은 아직 나라를 이루기는 커녕 그야말로 이방 땅의 나그네와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 약속에 의지하여 조상 적부터 살던 곳을 떠나 팔레스타인 지역에까지 이르는 먼 길을 달려 온 아브라함은 정말로 이방 땅의 객으로서 유랑하는 신세였습니다. 삶의 방식 자체가 편하고 온전하기 때문에 여유삼아 믿음생활을 도모하는 처지에서는 도저히 알 수조차 없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언약관계로서의 삶의 또 다른 측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언제든지 하나님 중심으로, 그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 또는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반드시 기억하는 데에 있습니다.                                설혹 삶의 무게에 짓눌려 우리 힘으로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는 경우에도 순전히 그분의 변함없는 기억 속에서의 변화와 회생을 도모하는 것이 참 믿음의 능력입니다.                                                                                                                                    온갖 이상적인 믿음의 내용에 비해 현실에서의 자기 자신의 삶의 불안정함이나 초라함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정말로 믿음의 능력은 우리들 자신의 삶의 처지의 지배를 받지                                순전히 하나님 자신의 뜻과 계획대로 입니다.                                                             그의 뜻과 계획은 이 땅에서 유리 방황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 산지를 주어 온전한 나라를 이루도록 하기위함이었습니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취한 이스라엘이 그 언약을 누리지못하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경계도 없는 하늘나라를 약속하기까지 믿는 자의 삶을 언제든지 복되고 안전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든 삶의 상황 속에서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고 그가 주시마 약속하신 새 가나안, 즉 천국의 기쁨과 복을 지금 이곳에서 경험하는 삶을 사십시오.                 성도의 삶은 그곳으로의 진입을 위해 오히려 이 땅위에서의 방랑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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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0일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대상 13:14)

갓 사람 오벳에돔은 다윗이 한때 싸워 물리친 블레셋의 대장군 골리앗과 같은 출신지의 사람입니다.                      ‘에돔사람의 종’이라는 그 이름의 뜻과 같이 에서의 후손에 속한 사람으로서 야곱의 후예인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살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다윗의 청에 따라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자기 집에 모셔들이고 온 가족이 석달 동안이나 잘 돌본 끝에 풍성한 복을 얻게 됩니다.             물질의 복만 아니라 후에 그 자신을  포함하여 그의 후손들까지 성막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의 직무를 맡게됩니다 (대상 36:4-8).                                                                앞서 레위 지파 사람 웃사가 법궤를 소홀히 취급하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하고 마는 현실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인간적 차별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전심으로 그의 뜻을 따라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법입니다.                                                          법궤가 다시금 이스라엘의 영토 안으로 돌아오듯 주님의 영광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 함부로 예측할 수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누구일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주님께 속한 일의 가치를 바로 알고 거룩한 것을 참으로 거룩하게 전심을 다해 위하며 섬길줄 아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일체의 차별없이 마땅한 은혜와 복을 더하실 것입니다.                                                                                                           단 삼개월 동안의 헌신만으로도 오벳에돔의 중심을 아시고 자손 대대로 이어지는 귀한 복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그를 마땅히 높여드리는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합당한 은혜와 복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오벳에돔 가문의 복을 다 누리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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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0일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행 25:11)

인생이 때로는 잘 살기위한 것이 아니라 잘 죽기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삶 자체의 한계상황을 전제할 때 그것을 맞이하는 방식이 전혀 타의에 의한 강요와 같은 것일지, 또는 자신이 의도하고 소망한 모든 것의 완성을 경험하는 식의 것일 지의 여부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풍성하고 의미있는 삶의 실재가 아무래도 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과 준비의 필요성과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서 사명을 감당하도록 부름받은 바울이 동족 유대인들의 오해와 시기로 인해 죽임 당하는 일을 피하고자 한 것은 결코 살아남기만을 바라는 욕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간절히 추구한 ‘올바른’ 죽음,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로마에 이르기까지 전파하고자 한 일의 완성을 위한 부르심의 의미와 목적을 고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본연의 사명을 이룩하는 일의 연장선 상의 죽음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죽는 일까지도 다만 참된 삶, 즉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이루기 위한 영적 삶의 한 방법이었던 셈입니다.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라는 바울의 결심은 자신의 죽음의 의미와 가치를 정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라는 의미의 표현입니다.                  생명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의 올바른 삶을 사는 길만이 우리들 자신의 죽음의 가치와 의미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바르고 참된 삶의 의지와 결심이 있을 때라야만 죽음 자체의 비극과 허무가 극복되는 법입니다.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죽음의 희생양이 되지않기 위해서라도 성실하고 충만한 삶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여야 합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기준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은 언제든 충실한 삶의 의무와 동기로 충만한 자들에게 은혜를 더하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부활의 산 소망과도 같은 생명의 약속과 능력 외에 다른 어떤 인간의 상한 감정이나 그릇된 판단에 자기 자신을 내맡기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 편의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힘입도록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오직 그의 판단만이 참되고 진실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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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4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행 19:20)

바울 사도의 3차 전도여행 중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행하신 기적, 즉 사람들이 바울의 손수건과 그가 두르던 작업용 앞치마를 병자의 몸에 덮기만 해도 병이 나은 기적은 다분히 그가 선포한 예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말씀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선민의식의 근거를 더 이상 율법의 권위가 아니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서 찾는다는 뜻으로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속성과 취지의 삶을 살것이라는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의와 공로, 삶의 자격과 기준, 천국의 표준 등이 모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바뀐 것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가 미치지않는 삶의 영역이 더 이상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한 믿음의 전제 위에 서게 되면 과연 성도의 삶 속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불가능한 여지들이 없게 됩니다.                                                                                              우리들 각자가 무한대의 신뢰를 통해 무한의 능력과 치료를 얻도록 하기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허락하신 이름이 바로 구원자 예수의 이름입니다.                                  그의 이름으로 받는 물세례의 의미처럼 삶의 모든 요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와 능력에 사로잡히도록 하십시오

성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한다는 것은 예수의 이름에 대한 믿음과 기대감이 모든 일의 동기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것 하나 가릴것 없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의 산물이 되도록 하십시오.  매사에 말씀을 적용하고 그 말씀에 내포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내세움으로써 우리의 삶에 말씀이 흥왕하고 세력을 얻게끔 할 수 있습니다. 

매 순간 그분의 말씀이 우리들 각자의 말과 생각을 제압하도록 하십시오.                그 거룩한 복종과 겸손을 통해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를 덧입게 됩니다.      주의 말씀처럼 거룩하고 복되며, 권세있는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