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5일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해하려 하는 음모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고” (삼상 23:9)
다윗은 사울의 살해 위협을 피해 도망자의 처지를 겪으면서도 베냐민 지파의 경계지역에 속한 그일라 지방 사람들이 블레셋 군대에게 침략을 당하고 타작마당의 수확물을 모두 빼앗기는 위험을 당하자, 그일라 사람들을 대신하여 블레셋 군대를 크게 무찌릅니다. 그 전쟁의 공과를 인정받아 다윗과 그의 일행이 그일라 땅에 편하게 머물 수 있는 것도 잠깐, 그 일을 밀고한 사람들 때문에 사울에 의한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되고맙니다. 자신의 휘하에 있는 600명의 사람들과 함께 또 다른 은신처를 찾아 그일라 땅을 떠나야 할지에 대한 결정을 앞두고,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간절한 기도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의 호의를 입고, 그와 더불어 언약이라도 맺는다 치면, 잔인무도한 사울의 성품상 그일라 주민들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므로, 차라리 다윗과 그의 일행이 다른 곳으로 가서 은신처를 모색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넘기겠나이까 주의 종이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가 내려오리라 하신지라” (삼상 23:11). 대규모의 군대의 이동을 앞두고 다윗은 일전에 베냐민 지파에 속한 놉 땅의 제사장 아히멜렉이 입던 겉옷인 에봇을 갖고서 거기에 달린 판결 흉패 안의 우림과 둠밈을 사용하여 자신의 간구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을 구합니다 –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에 붙이게 하라 아론은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흉패를 항상 그의 가슴에 붙일지니라” (출 28:30). 놉 땅의 제사장 아히멜렉의 겉옷을 갖고서 자신의 기도응답의 조건을 삼은 다윗의 행동은 단지 군대이동에 관한 전략적 판단을 얻기위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윗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한 선한 일의 증거를 위해 목숨을 건 제사장 아히멜렉에 대한 인간적 신의와 존경, 그리고 아히멜렉과 같은 제사장과 제사제도를 정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과 헌신의 마음가짐의 표시였습니다. 이는 하나님 편의 참되고 진실한 것을 추구하는 인간적 열심과, 그의 자녀된 자들에게 늘 최고의 것을 베풀고자 하는 신적인 은혜의 원리 및 그 작동방식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제사장의 에봇, 즉 판결흉패가 달린 겉옷을 기도응답의 도구로 사용하는 행위가 다분히 미신적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그 옷의 주인인 제사장 아히멜렉이 악한 왕 사울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과 선함을 죽음으로써 증거해주었기 때문에 그 에봇에 달린 판결흉패의 지시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며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호위대장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삼상 22:14). 우리 모두에게도 마치 다윗에게 있어서 아히멜렉과 같은 제사장이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인간 본연의 악하고 죄된 면만을 고려한다면 공의의 하나님에 의한 정죄를 벗어날 길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다만 한 가지, 즉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의 여지를 보시고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무죄하고 그의 의롭게 하시는 변화의 능력, 즉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을 자라고 변호해 주십니다 –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4-15). 순교의 제사장 아히멜렉의 힘은 바르고 정당한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다윗을 죽여야 한다는 사울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그가 한 말 –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 이 아히멜렉 자신의 다윗에 대한 평가를 반영한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의 충성심에 대한 긍정을 의미하며, 자신의 삶과 다윗의 삶의 일체감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아히멜렉’이라는 이름 자체가 ‘왕의 형제’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충성심의 이유와 목적이 바르고 정당할 때라야만 건전한 인격과 정신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충성심은 조건이나 결과에 따라 제약을 받기 마련이지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 성취를 위한 충성에는 결코 제약이나 포기가 없습니다. 사울에 의한 노골적인 위협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충성심을 변호하는 제사장 아히멜렉의 충성심의 대상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올바른 충성심이 그로 하여금 사울 왕의 절대권력 앞에서도 목숨을 내건 진실한 증인의 삶을 살게 만든 것입니다. 다윗의 기도는 제사장 아히멜렉의 진실하고 충성된 삶을 응답의 조건으로 삼기위한 것이었습니다. 거짓된 마음으로 참된 기도를 드릴 수 없고, 거짓된 기도로 참된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기도의 정직함과 충성스러움을 구해야 합니다. 정말로 자신이 구하는 기도의 응답을 구하는 성도라면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기면서도 성도의 삶의 원리는 하나님 자신의 생명과 부활의 속성을 따르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만물은 그 자체로는 결코 다 설명할 수 없는 창조주의 선함과 의로운 본성을 따르게끔 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위기는 대부분 기도생활의 위기에서 오며, 기도의 정직성과 충성스러움을 시작으로 하여 성도의 삶이 회복됩니다. 매사에 바르고 충성스러운 기도생활과 함께 바른 삶의 유익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샬롬!
2023년 3월 8일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삼상 20:17)
다윗과 요나단에 관한 이야기는 흔히 ‘우정’에 관한 성경 상의 교훈으로 자주 인용되곤 합니다. 사울 왕의 아들인 요나단이 마땅히 자신의 몫이 될 이스라엘 나라의 왕위를 아버지의 충실한 신하인 군대 장관 다윗에게 양보한 것이 친구에 대한 의리와 우정을 우선시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성 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다른 사람에 대한 참 사랑과 배려라는 점에서 그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참된 우정의 표본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우정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인자하심’ (the loving-kindness or the everlasting love)에 관한 교훈입니다. 마치 우정의 약속처럼 맺은 두 사람 사이의 언약의 내용은 다름아니라 서로에 대하여 “여호와의 인자”를 베풀라는 것이었습니다 –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삼상 20:15). 흔히 사랑이라는 말로 대체되는 ‘인자함’ 이라는 말처럼 바른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말도 없습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이란 결코 무조건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철저히 제한적이며 선택적입니다. 제한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순전히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따라 베풀어진다는 뜻이며, 선택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의 성품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미치는 효력과 범위가 무한하다는 뜻에서 입니다. 흔히 성도의 삶 속에서 ‘소망의 원리’처럼 자주 인용되는 말씀 가운데 하나인 롬 8:28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모든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도 사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교훈입니다. 믿음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궁극적인 신뢰의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저절로 선하고 유익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판단과 그분의 역사의 진행방식에 대한 ‘선한 동기’가 필수적입니다. 자기 자신에 관하여서는 물론,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관 방식에 대하여 신뢰하고 복종하여야 합니다. 예수를 ‘개인적’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우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들 자신의 이해와 방법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자체가 무조건적이지 않으며, 다만 그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이해와 신뢰를 간직한 사람들에게 해당합니다. 그런 뜻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오히려 철저히 조건적이며 선택적 입니다. ‘사랑할만한 자’를 사랑하시며, ‘은혜 받을만한 자’에게 은혜를 더하십니다. 자비를 베푸시되, 반드시 자비를 ‘베풀만한 자’에게 베푸십니다. 근자에 들어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을 동성연애의 이상향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성간의 사랑은 서로 다른 성적 욕구의 충족을 매개로 하는 데 반하여, 동성 간에는 이기적인 성욕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훨씬 더 고매하고 도덕적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부적으로 주어진 자신의 성 정체성을 부인하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새로운 성 개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반으로 그의 이름으로 맺어진 요나단과 다윗 두 사람 사이의 언약적 사랑에는 ‘동성’이라는 의식조차도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다만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사랑에 대한 믿음만 있었을 뿐입니다.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의 명을 거역하면서까지 여호와의 이름으로 다윗과의 언약을 맺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삼상 20:42). 요나단의 순교적 각오을 무릅쓴 사랑의 배려로 인해 훗날 다윗은 사울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두번째 왕이 되었고, 왕이 된 후 죽은 요나단의 소생으로써 두 발을 다 저는 므비보셋에게 평생 왕궁의 공급과 보살핌을 받을 수 있게 해줍니다 –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삼하 9:7). 서로가 영원한 사랑을 나누어야만 그 사랑의 효력 및 열매가 또한 영원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 즉 그의 인자하심을을 도구로 삼고 사랑의 법을 성취하는 삶의 주인공들이 되십시오. 샬롬!
2023년 3월 1일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삼상 18:1)
우정은 종종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계산적인 동기없이 친절하게 베푸는 것, 혹은 순수한 교제의 기쁨에서 비롯된 관대하고 계산되지 않은 행동으로 시작됩니다.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자발적인 사랑이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의 시작이었으며, 아버지 사울 왕의 폐위와 관련하여 온갖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계속해서 우정을 키웁니다. 그는 현재의 다윗을 사랑하였습니다. 조건과 상황에 맞는 지에 관한 시험을 통해 친구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단순하고 성급할 정도로 다윗에 대한 사랑을 표현합니다 –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삼상 18:3-4절).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친구로서 사랑은 우리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능한 모든 수익보다 앞서고 능가하는 차원에 속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우정이란 서로가 서로에게로부터 이익을 얻으며,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서로에게서 제공받는 관계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의 서슬퍼런 왕권체제 하에서 아무런 정치적 기반이 없던 다윗의 전인적인 후원자 또는 후견인이 되며, 다윗은 요나단이 죽었을 때 그와 그의 가문의 영광을 책임지며, 또한 불구자인 그의 아들을 평생토록 돕습니다 –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삼하 9:7). 중요한 점은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진취적인 사랑의 표현으로서 우정의 맹세와 언약이 ‘사람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이행되었다는 점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한 것은 다분히 여호와께서 다윗을 통해 이룩하시고 하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여망과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셨다”라는 뜻의 그 이름의 의미처럼,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이룩하시고자 하는 일에 대한 관심의 소유자였습니다. 요나단은 겨우 3000명의 이스라엘 군대가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삼상 13:5) 많던 블레셋의 대군을 상대하던 당시 신하와 함께 단 두 사람이 적진 한 가운데로 매복해 들어가서 수십 명의 대적을 물리침으로써 이스라엘 군의 사기를 드높이는 식으로 승리를 이룩하였습니다. 요나단이 그 싸움에 임하면서 했던 말이 바로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삼상 14:6)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의 이 외침이 마찬가지로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 임하면서 했던 말 그대로 입니다 –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삼상 17:36). 두 사람 모두 이스라엘의 구원이 군대의 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 백성과의 언약을 지키는 일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근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그들의 신 여호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성도와 성도 간의 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관계의 토대가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참되고 거룩한 믿음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다윗이 선지자 사무엘에 의해 자신의 아버지에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라는 사실을 알고있었을 요나단의 처지에서 혹이라도 자신이 계승하게 될 후계왕권에 대한 애착이나 이해관계의 우선순위를 따랐더라면 다윗에 대한 조건없는 사랑과 헌신은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요나단이 만일 그러한 인간적인 삶의 지배원리를 따랐다면, 그의 생애 역시 아버지 사울처럼 불행하고 비참한 것이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다분히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대한 기대와 관심을 뜻합니다. 온갖 조건적이며 이해타산적인 생각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피차 간에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고, 그처럼 고차원의 믿음의 초월을 가능케 하는 비결이 바로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과 생각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카락의 수까지도 다 헤아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움과 섬세한 은혜의 속성을 전제할 때 –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마 10:30), 성도의 거룩한 믿음의 동기에 비롯된 자기 헌신과 희생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이롭고 풍성한 투자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전 11:1). 성도가 믿음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상의 투자 및 투자 가치를 지닌 일이 바로 사랑이며 우정입니다. 이성 간이건, 비 이성 간이건 간에, 참된 사랑과 우정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을 나누는 삶을 사십시오. 서로의 불의함이나 부족한 점 때문에 사랑과 우정의 의무와 책임을 소홀히 하거나 저버리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나누는 방법입니다. 요나단처럼 마음으로 하나 될 수 있는 믿음의 ‘동료들’을 많이 만드십시오. 그것이 바로 삶은 물론 죽음까지도 영화로고 복되게 하는 삶의 비결입니다. 샬롬!
2023년 2월 22일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삼상 16:1)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나 곧 사울이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는 것을 사울에게 알리는 것이 사무엘의 일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라고 말합니다 (삼상 15:35).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슬퍼할 때가 끝났으며 새로운 왕을 임명할 때라고 말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무모할 정도로 앞을 향하여 ‘나아갈’ (move on)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은 부인할 수 없는 하나의 현실, 즉 성도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작업장’이라는 사실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되, 아직 체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다만 그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만 나아갈 수 있는 삶의 여정으로 부르셨습니다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창 12:1-4). 또한 하나님은 인류를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구원할 자, ‘구세주’를 주셨는데,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여 그 명성이 더럽혀진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이, 그리고 ‘의로운 사람’ 으로서의 지위를 포기한 아버지, 요셉에 의해 양육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복음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의 몸으로 복음의 약속을 구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매사에 이런 식으로 행동하심으로써 인류의 역사를 거룩하게 만드시고, 믿는 우리로 하여금 역사를 저항하는 대신 포용해야 할 대상으로 만드십니다. 사무엘이 사울 왕을 폐위한 일로 인하여 슬픔 중에 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더 나은 미래로 인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미래를 여는 인물이 바로 목동 다윗입니다. 목동 다윗은 다른 목자들과 마찬가지로, 늘 ‘움직이는’ (moving on)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들어 다윗 자신을 이스라엘의 두번째 왕으로 추대하려고 오는 날에도 그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들에서 양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제목의 시편 23편의 저자이기도 한 목자 다윗은 자신이 양을 인도하는 목자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양을 인도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 역시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친히 빛이 되어 삶 자체의 모든 어둠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해 그 몸을 대속물로 내어 주기까지 매사에 앞으로 ‘나아가는’ (moving on) ‘선한 목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인생의 다양한 면들을 겪으면서 다양한 유형의 좌절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주어진 삶의 형편 그대로 오직 그의 부르심의 선한 뜻을 따라 매사에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들에게 선택적 부르심의 의미를 더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더 할 수 있도록 하시며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막 4:25); 얻고자 하는 자들에게 더 새롭고 더 많은 것을 얻게 하시는 분입니다 –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마 7:7-8). 불순종한 사울 왕을 폐한 하나님께서 어째서 이새의 아들, 그것도 일곱 형제의 반열에 들지도 못한 여덟번째 ‘막내’ 인 다윗을 새로운 ‘왕’으로 보셨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하나님께서 그를 찾으시던 날, 다윗은 들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따라 열심히 양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삼상 16:11). 성도가 매사에 자기 스스로에게 걸림돌이 되지만 않으면 매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윗처럼, 양을 치는 목동의 처지에서도 신적 기름부음의 대상인 왕과 같은 존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매사에 앞으로 ‘나아가고자’ (moving on) 하는 마음의 결심이 곧 믿음의 본질입니다. 다윗처럼,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그 형편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삶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아십니다 –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
2023년 2월 8일
“요리인이 넓적다리와 그것에 붙은 것을 가져다가 사울 앞에 놓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보라 이는 두었던 것이니 네 앞에 놓고 먹으라 내가 백성을 청할 때부터 너를 위하여 이것을 두고 이 때를 기다리게 하였느니라 그 날에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먹으니라” (삼상 9:24)
사무엘상에서 사울과 사무엘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그들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사울이 사무엘에 의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 두 사람은 함께 식사를 합니다. 이 식사는 예언자와 왕 사이의 친밀한 관계와, 사울의 통치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을 상징합니다. 함께 식사하는 행위는 개인 간의 우정과 신뢰의 유대를 나타내기 때문에 고대 중근동 문화에서 중요한 전통이었습니다. 그 점이 성서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성서에서는 언약을 맺고 평화 조약을 맺는 것과 같은 많은 중요한 사건들이 함께 식사하는 것으로 특징을 이루었습니다. 사울과 사무엘의 식사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그들의 동반자 관계의 시작을 나타내며, 사무엘은 새로운 왕으로서 사울의 영적 조언자이자 안내자 역할을 했습니다. 그 식사는 또한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선택하셨고 그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확증하는 역할을 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위하여 미리 준비해 둔 음식이 제물의 ‘넓적다리’ 부분인데, 이는 모세 오경의 제사의 규례에 따르면 제사장만 먹는 부분이었습니다 (레7:33-36, 출29:27). 사무엘이 그 부분을 장차 왕이 될 사울의 몫으로 떼어놓고 함께 먹었다는 것은 사울이 이스라엘 나라의 왕으로 나라를 통치할 때, 제사장적 사명과 책임을 다하기를 바라는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왕은 단지 백성을 다스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도록, 즉 예배의 삶을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사울이 하나님께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그로 인해 왕위를 다윗에게 양도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주 원인이 바로 제사와 제물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의 그의 부주의함 때문이었습니다 –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삼상 15:9-11).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기 전 날 굳이 사울과 함께 식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진 이유는 사울이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제사장의 몫으로 구별된 것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먹을 수 있으나, 다만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는 취지 하에서 먹고 마셔야 함을 일깨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대한 염려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우선적 열심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 이유이며, ‘사람이 떡으로만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짐승 제사를 포함하여 구약성경의 온갖 제사법이 한결같이 음식물을 드리는 행위를 기초로 삼는 이유 역시 인간의 가장 본능적이며 초보적인 요구를 해소하는 방법이 ‘하나님 앞,’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시사합니다. 때로는 ‘무엇’을 먹어야 할 지 보다, ‘어떻게’ 먹어야 할 지가 훨씬 더 많은 고민거리인 것이 사실입니다. 사울이 사무엘이 있는 장소를 찾아 헤매던 끝에 사무엘의 마을 근처에서 물 길러 나온 어린 처녀들에게서 들은 말 – “…그가 오기 전에는 백성이 먹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제물을 축사한 후에야 청함을 받은 자가 먹음이니이다 …” (삼상 9:13) – 이 사실은 사울 자신의 이스라엘 왕으로서 삶의 경계와 책임을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로 대변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 그 거룩한 삶의 의미를 먹고 마시는 것이 왕처럼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의 동기이며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일상의 사소한 영역일수록 더욱 더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한 자로 여겨 주시기 위해서 친히 마련한 거룩한 삶의 질서와 법칙을 따르십시오. 정말이지 하나님은 우리가 너무도 귀한 그의 자녀들이어서 음식 한가지도 아무렇게나 먹고 마시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분 자신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가장 신령하고 복된 은혜와 복의 선포와 함께, 단지 음식이 아니라 만물의 창조주인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혼의 양식과 그 풍성함으로 만족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매번 음식과 함께 하나님의 복을 먹고 마시는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그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정말로 배부름을 얻는 길입니다. 샬롬!
2023년 2월 1일
“그들이 이르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까 하니 이르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통치자에게 내린 재앙이 같음이니라” (삼상 6:4)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이후 광야 40년 간의 여정을 지나는 동안 이동식 성전인 성막 안 지성소에 안치된 법궤는 그들의 신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으로서, 하나님께서 두 발을 법궤 위에 내려놓고 앉아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로는 열두 지파 공동체가 모여서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도 하고, 중요한 현안을 상의하기도 하였던 실로에 위치한 성소에 법궤를 안치해 두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200년의 세월이 지난 후 지파 공동체인 이스라엘 민족의 결속력이 약해지고, 무엇보다도 가나안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을 막강하고 온갖 현실적 타락상에 이끌린 나머지, 급기야 블레셋 족속들에 의한 침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이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선지자 역할을 시작하기 전 지파공동체의 리더들, 즉 이스라엘의 방백들이 이끄는 싸움에서 블레셋 군대에게 대패를 당하고, 자신들의 가진 모든 것, 심지어는 성소에 안치되었던 법궤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의 진에 들어간 법궤는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에 의해 그 땅에 심한 종기의 재앙을 불러 일으키고, 그 결과 블레셋의 제사장들과 방백들이 나서서 법궤를 다시금 이스라엘로 돌려보내도록 합니다. 하지만 법궤를 그냥 돌려보내면 더 큰 화를 초래할 것임을 염려하여, 나름대로 블레셋의 제사장들의 권고에 힘입어 속건제를 드리고 예물과 함께 돌려보내기로 합니다. 속건제란 사람이 신에게 죄를 범한 후 죄책감으로 인한 양심의 고소를 면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의 일환으로서, 남아있는 죄의 여지들이 초래하는 신적인 보응과 형벌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진정’ (propitiation)효과를 띤 제사의 종류입니다. 한 마디로 신을 달래고 노여움을 풀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속죄제와 함께 속건제가 이스라엘의 대표적 제사의 종류가 된 것은 그만큼 그들의 신 여호와 하나님의 인격적 성품을 고려한 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경우, 이를 위해 고안한 제물이 그들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였습니다. 둘 다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블레셋 땅에 내려진 죽음의 재앙을 초래한 원인들 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겪은 재앙과 재난의 원인이 된 것을 형상화 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로 한 것은 자신들의 죄가 초래한 신적인 보응에 대해 아무런 불평과 원망의 마음을 갖지 않겠다는 표시입니다. 또한 그러한 무시무시한 재앙과 질병의 원인까지도 능히 마음대로 다스리시는 분이 바로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 하나님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흔히 ‘동종요법’ (hemopathy)이라고 불리는 민간치료법은 18세기 후반 독일인 의사 사무엘 하네만 (Samuel Hahnemann)이 창시한 대체 의학으로, 쉽게 말하면 ‘같은 것이 같은 것을 치료 한다’는 믿음을 반영한 치료법입니다. 음식의 영역에서도 ‘이열치열’ (以熱治熱), 또는 ‘이한치한’ (以寒治寒)의 원리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원치 않는 일로 인하여 삶의 역경이 초래될 경우, 대부분 우선적으로 ‘왜 내게 이런 일이’ 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며, 스스로의 처지를 ‘이상히’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소극적이며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하다 보면 자연이 뭔가 근원적인 차원의 문제 해결의 방법 또한 요원해지기 쉽습니다. ‘같은 것은 같은 것으로’ 해결하면 그만입니다. 즉 하나님 한 분 안에서 인생의 모든 예외적인 문제 해결의 방법을 터득하는 믿음의 초월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인간의 삶 자체가 순전히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면, 그 삶의 진행과정의 모든 예외적인 상황에 대한 근원적 해결방법 역시 오직 하나님께 있기 마련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방인이고, 당시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게 하던 원수의 나라였지만, 종교적 영역에서 그들이 채택한 ‘동종요법’의 생존전략만큼은 이스라엘이 반드시 배워야 했습니다. 기도의 사람 사무엘이 그 민족의 대표적 선지자로 아직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전 온 이스라엘이 ‘제멋대로’의 신앙생활을 고수하는 중이었습니다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21:25). 한 우물을 파듯, 믿는 자의 삶의 ‘원천’은 오직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뿐, 그리고 그의 성령의 능력과 감동 뿐입니다. 이왕에 그리스도 예수를 생명의 구주로 모신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삶의 최종적인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기준과 그 해답은 하나님의 뜻 뿐입니다. 슬픔과 불행의 원인에 대해서까지도 다만 하나님의 뜻에 맡김으로써, 슬픔에 대한 기쁨의 이유를 찾고, 불행에 대한 행복의 원인을 발견하는 참 믿음의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세상살이와 마찬가지로, 성도가 믿음생활의 균열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결국 자기 자신마저도 믿지못하는 불행을 겪게 됩니다. 반대로 믿기로만 하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막 9:23)고 말씀하는 하나님의 아들, 우리들 각자의 ‘대속자’의 능력을 모든 면에 걸쳐 힘입을 수 있습니다. 믿음생활의 ‘동종요법’의 유익을 꼭 누리십시오. 샬롬!
2023년 1월 25일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삼상 2:18)
생물학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모두 엄마는 자녀들에게 ‘첫 번째의 집’ 이며 모든 관계성의 기초입니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착상하면 거기에서 합성되는 부모의 유전자가 자라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 역시 난자입니다. 엄마 쪽의 유전자적 환경은 난소에서 태반에로까지 이어지며 임신 이후에도 태반에 끼치는 영양소나 자극제 들이 태아로 하여금 바깥 세상과의 관계성을 결정하는 요소가 됩니다. 엄마가 격동하면 아이도 격동하고, 엄마가 매사에 주를 의지하고 안정적이면 아이도 역시 그러합니다.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에게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한 사람에게는 자식이 있었으나 한 사람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자녀를 생산치 못한다는 이유로 이해 늘 괴로워하던 한나의 처지를 가리켜 성경은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니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온갖 마음의 괴로움 속에서 한나가 취한 한가지 일에 관하여 이르기를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삼상 1:10) 라고 말합니다. 한나는 구체적으로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를 평생에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11절)라고 하였습니다. 온갖 마음 상한 일로 인하여 스스로 격동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서도 한나는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의 증거를 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로 무려 2세기 동안 지속된 고대 이스라엘의 12지파 공동체 간의 반목과 혼돈의 세월을 끝내고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허락한 ‘메시아 언약’을 추종하는 나라를 삼기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한 기도의 사람 ‘사무엘’의 탄생은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스스로 격동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의 삶을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를 구하는 심정으로 기도한 ‘기도의 여인’ 한나에 의해 이스라엘의 민족적 구원의 단초가 제공된 것입니다. 눈물과 통곡의 기도를 통해 얻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의 전에서 봉사하며 제사장을 섬기는 자로 드리기로 서원한 한나는 아들은 낳은 후 겨우 젖을 뗄 때까지 밖에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성소에 거하는 아이’로 바쳐지고 나면 한나 자신이 매년 한 차례 제사를 드리러 가는 때 외에는 아무 때나 쉽게 만날 수 도 없었습니다. 일년에 한 차례 새로 자란 몸의 치수에 맞는 옷을 만들어 싸 들고 가 아들의 몸에 입혀주는 순간만큼만 ‘어미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일년에 한 차례 밖에 볼 수 없는 어머니의 낯을 대하면서, 하나님과의 서원을 지키기 위해 단 하루 동안의 아들과의 ‘면회’를 즐기고 난 후 애처로이 뒤돌아서 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배웠을 것입니다. 제 몸에서 난 자식에게 제사장의 겉옷인 ‘에봇’을 지어 입히면서 어린 사무엘을 마치 제사장처럼 대하는 어머니에게서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외심’과 영적 질서에 순종하는 법을 익혔을 것입니다. ‘은혜 받은 자’라는 어머니 한나의 이름의 뜻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 은혜를 힘입어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평생 배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의 이름의 뜻이 바로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 사무엘의 인격과 정서가 이스라엘 나라를 바르게 할 왕과 왕위를 세웠습니다. 사무엘은 바로 한나에게 임한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그녀의 선물이었습니다. 구약학자 월터 브루거먼은 미국 식 가족 제도의 폐해의 삼 요인으로 ‘망각’ (amnesia)과 ‘실망’ (despair), 그리고 지나친 ‘자율’ (autonomy)을 거론하면서 그에 대한 기독교 식의 해답으로 ‘기억’이 있는 이야기 (memory/story), 절망을 껴안는 ‘희망’ (hope/the embrace of despair), 그리고 ‘순종’의 자유 (obedience)를 제시하곤 합니다.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엄마의 최고의 선물이 바로 절망을 껴안는 ‘희망의 옷’입니다. 한나가 어린 사무엘의 매년 자란 키만큼 치수에 적당한 제사장의 겉옷인 에봇, 즉 하나님을 섬기고 그를 바라보게 하는 ‘희망의 옷’을 지어 입혔듯이, 참되고 거룩한 믿음의 유산을 옷처럼 자녀들에게 지어 입힐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녀의 수치든 영광이든 모두 부모의 눈물로만 덮을 수 있습니다. 샬롬!
2023년 1월 18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 4:4-5)
기쁨과 평화의 본질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라 그러한 감정들의 근거가 되는 삶의 태도와 행동 및 관계성에서 발견됩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현재 명령형을 사용한 이유는 기쁨이 행동을 유발하는 습관적인 ‘태도’라는 뜻에서 입니다. “항상”이라는 부사를 포함시킨 것은 “상황에 관계없이”를 뜻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문구는 “주 안에서”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기쁨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좋은 소식이나 예기치 않은 의무의 유예, 힘들게 얻은 목표 달성 등. 하지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오래 지속될 뿐만 아니라 삶의 여러가지 도전으로 인해 지칠 때에도 우리를 지탱해 주는 주님께 대한 궁극적인 신뢰를 토대로 하는 기쁨을 촉구합니다. 주님께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구축된 지속적인 관계에 뿌리를 둔 것이며, 기쁨을 일으키는 주체가 주님 자신이므로 잃어버리거나 타협의 여지가 없는 유형의 기쁨입니다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7).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계,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 대한 관계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기쁨은 늘 상호 지원을 통해 배양됩니다 –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빌 2:18).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항상 동의하거나 잘 지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 각자가 기쁨의 원인이 되는 관계를 만드는 데 책임이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바울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명령으로 관계성을 토대로 한 기쁨의 원인에 대해 설명합니다. 영어의 ‘관용’ (generosity 또는 kindness) 은 종종 온유하고 온화한 성품과 관련이 있는데 비해, 헬라어로 관용 (epieikes)은 ‘법이나 관습에 따른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온유하고 친절하게 대할 뿐 아니라, 마땅히 주어진 권력이나 권세를 행사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특별히 누군가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서 더욱 그러합니다. 바울은 이 명령을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로 문맥화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력을 행사하지 않거나 다른 방식으로 행사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겸손이 필요한데,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확신함으로써 그 일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는 주된 이유는 그 사람의 유익 뿐 아니라, 용서하는 자 자신의 유익을 위함 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기보상 욕구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법이나 관습에 의해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서도 오히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6)는 명령으로 대응합니다. 걱정할 것이 없다거나, 우리가 걱정하는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염려와 두려움의 이유를 하나님과의 친근한 관계 속에서 찾으라는 뜻입니다. 저마다 삶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서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께 더욱 잘 알려지도록 하라는 명령입니다. 우리의 삶에 대해 우리들 자신보다 더 많은 성실과 충성의 의무를 지닌 분에 의해 유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기 때문에 염려의 과정 내내 우리들 자신을 더욱 개방하는 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빌 4:7의 평강의 약속은 이 모든 과정의 결말과 같습니다 –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바울이 말하는 평강 또는 평화는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지고 주어지기 때문에 ‘선물’입니다. 단지 수동적으로 받는 선물이 아니며, 우리의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 넘는 평화의 능력으로서, 그것을 만드는 분이 누구인지, 누구를 위해, 또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재고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상상력은 우리의 상상력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며, 우리를 인생의 영원한 기쁨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으로 더 깊이 인도하심으로써 우리를 보호합니다. 성도에게는 기쁨도 관용도 모두 명령입니다. 당장의 자기 사정을 앞세우며 거절하거나 사양할 수 없습니다. 믿음과 순종으로 기뻐하고 관용을 베푸는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샬롬!
2023년 1월 11일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빌 1:12)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은혜’라는 말이 모두 156회나 사용되었는데, 그 중 101-109회가 바울이 쓴 편지들에 나옵니다. 그만큼 바울의 삶과 신학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의 선물로 말미암은 구원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강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흔히 은혜의 속성을 가리켜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소극적인 면의 은혜는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부르심, 즉 신적 은혜 안에서의 무조건적 선택을 가리키는데 비해, 적극적인 은혜의 속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차별 없는 은혜, 즉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에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을 여호와 하나님과 맺은 언약 백성으로 부르신 은혜도 충분히 역동적인 것이지만, 거기에는 이스라엘 민족 고유의 자화상, 즉 선민으로서 자의식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로서 은혜는 그야말로 삶을 변화시키는 전능자의 위력과 그에 대응하여 반응하는 인간의 의지적 결심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후 빌립보를 비롯한 마게도냐 지방의 여러 곳에서 인간을 참으로 자유케 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전파하다가 옥에 갇힌 처지에 들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당한 일이 오히려 복음전파에 ‘진전’이 되었다고 말한 것은 다분히 하나님의 은혜의 적극적인 속성을 강조하기 위함 입니다. 만약에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단지 자기 자신에게 임한 특별한 호의와 특권에 해당하는 것이라고만 이해했다면, 메인 자 혹은 갇힌 자로서 그의 현실상황은 하나님의 은혜의 속성과는 상관없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은혜라는 말의 참된 의미를 특별한 ‘호의’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특별한 ‘일’과 그 일의 성과로 이해하였습니다. 실제로, 그의 메임을 통하여 로마황제의 시위병들이 입에서 입으로 그리스도의 복음과 관련한 일들을 전파하기 시작했으며, 그 일이 결국 하나님께서 로마인들을 구원하시는 일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빌 1:13). 율법이 아닌 복음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주도하는 적극적인 은혜의 속성을 전파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개인적으로 확보하는 호의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하신 일들, 또는 하시고자 하는 일을 위해 때로는 호의나 특권처럼 보이는 것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면서도 성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십자가의 대속물로 내어주셨습니다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그러면서도 그의 삶 어디에도 은혜의 속성이 베어 있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성도가 정말로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에 따른 것이라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일들을 자기만족과 의의 근거로 삼아야 합니다. ‘메임’과 ‘진보’라는 말의 대비가 의미하듯, 인간 편의 메임이 하나님 편의 진보의 여지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로 나 자신을 비롯하여 자에게 속한 것이 완전히 메여야만 뭔가 하나님 편의 유익과 진보를 이루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뜻에서 바울이 결론적으로 한 말 –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 은 성도의 삶 속에서 늘 ‘최고의 선’은 그 판단 기준이 하나님 중심적이라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믿음 안에서 은혜롭게 살다 간 성도의 삶과 죽음 모두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또한 우리 모두를 참으로 유익케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을 진데, 사사로운 일로 인한 메임과 벗어남이 무슨 대수인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늘 그가 하시고자 하는 일의 가치와 우선순위를 도모하는 삶을 사십시오. 온갖 유형의 메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자유가 아니라 (freedom from), 자원하여 메일 줄 아는 것 (freedom to)은 정말로 강력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지의 표상입니다. 은혜의 열매를 위한 자원하는 메임을 통하여 복음 안에서 진정으로 자유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샬롬!
2023년 1월 4일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약 2:24)
이 말은 야고보가 창 15:6에서 도출한 결론입니다 –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런데 그 말이 바울이 칭의에 대해 가르치는 것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은 같은 창 15:6을 인용하면서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5)라는 식의 정반대의 결론을 내립니다. 같은 성령의 영감을 따라 사도직을 감당한 두 사도가 대속의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 ‘칭의’ 교리에 대한 서로 반대되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만 같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바울의 칭의에 대한 이해는 의를 ‘전가하는’ (impute) 것인 반면, 야고보에게는 ‘의롭게 보인다”’ (show to be righteous)는 뜻입다. 바울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은 그가 하나님을 믿을 때 의롭게 되었습니다 –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롬 4:3).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에게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때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백 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였을’ 때, 즉 실제로 이삭을 제단에 올려 놓았을 때 입니다 –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1). 야고보는 더 나아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을 때 비로소 그를 의롭다고 간주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에서 비롯된 그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바로 그를 의롭다고 여겨준 하나님의 말씀, 즉 창 15:6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칭의가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의를 ‘돌리시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에, 야고보에게는 성도가 실제로 의로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야고보의 주요 관심사는 ‘죽은 믿음’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17). 야고보의 경우 신자는 그의 행위에 의해 의롭게 보여야 하며, 따라서 믿음에 대한 헛된 주장을 하는 사람은 귀신보다 못한 자들로 간주됩니다 –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18절). 믿음이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는 그의 주장과 일치하여,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언제 의롭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 그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보여지는’ 지점으로 돌아가 그가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의롭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1). 실제로 그 순간 여호와의 천사가 아브라함을 향하여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창 22:12)라고 외칩니다. 사람이 의로워 진다는 것은 바울의 경우처럼, ‘의롭게 여겨지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야고보의 경우처럼, 의로운 것을 ‘보여주는’ 부분도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행위’의 대조를 위해서는 당연히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의로운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 믿음에 관한 헛된 말, 즉 ‘믿음과 말’의 대조를 지적하기 위해서는 야고보처럼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 만은 아니니라” 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정말이지 사람의 말이 깃털처럼 가벼워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새의 깃털처럼 가벼워서 하기 쉬운 것이 말이기도 하지만, 바람에 날아가 버린 새의 깃털처럼 되돌리기 어려운 것이 또한 사람의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벼우면서 또한 가장 무거운 것이 바로 사람의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질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그처럼 무게 있게 받아들이는 성도의 삶이 바로 그의 의로움을 나타내 보이는 길이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안과 진실함이 가득한 교회’가 되고자 하는 올 해 우리 교회의 표어를 이루기 위한 첫번째 전제가 바로 ‘말씀을 성취하는 교회’입니다. 무엇이든 자신의 삶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이룩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을 좇는 삶을 통해 성도의 의를 자랑하고 보장받는 삶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샬롬!